[장지동 연립 3부: 민정이의 세계 #12] 영웅본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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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동 연립 3부: 민정이의 세계 #12] 영웅본색
  • 김규아
  • 승인 2026.05.29 05:27
  • 기사수정 2026-05-29 05: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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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의 밤거리와 홍콩 영화의 습한 공기는 묘하게 닮아 있었다. 시내 곳곳의 담벼락에는 늘 국도극장과 군산극장에서 상영하는 홍콩 영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검은 코트를 걸친 주윤발은 담배를 문 채 눈을 내리깔고 있었고, 장국영은 금방이라도 어디론가 사라질 사람처럼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들은 영화 속 인물들의 말투와 걸음걸이를 흉내 냈다. 성냥개비를 물고 담배 피우는 시늉을 했고, 괜히 인상을 찡그렸다. 욕 한마디에도 어깨에 힘을 줬다. 민정이도 어느새 그 흉내를 내고 있었다.

집에서는 숨소리조차 죽이며 살던 아이가, 거리에서는 일부러 눈을 가늘게 뜨고 걸었다. 무서워도 티를 내지 않았다. 약한 모습을 보이면 끝장난다고 생각했다. 그건 반항이라기보다 갑옷에 가까웠다.

영동 거리의 밤은 늘 눅눅했다. 샤크 아이들은 계단 난간에 걸터앉아 주윤발이 선전하던 밀키스를 돌려 마셨다. 껌을 자근자근 씹거나 침을 뱉기도 했고, 지나가는 아이들을 공연히 노려보기도 했다. “야, 민정아.” 샤크의 아이들 중 하나가 성냥개비를 던졌다. “주윤발 해봐.” 아이들이 키득거렸다. 민정이는 피식 웃으며 성냥개비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괜히 턱을 치켜들었다. “야, 진짜 똑같다.”, “눈빛이 딱 그거네.”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시시덕거리고 있으면 잠시나마 모든 걱정이 사라졌다.  

그날 밤도 아이들은 시민회관 뒤 공사판으로 향했다. 철근이 삐죽삐죽 튀어나온 공사장 위로 바람이 불었다. 젖은 흙냄새와 먼지가 뒤섞여 올라왔다. 아이들은 진흙이 흥건한 바닥에 쪼그려 앉아 컵라면 하나를 돌려먹으며 시답잖은 이야기를 했다.

“야, 우리 진짜 영화 같다.”, “뭐가?”, “샤크 말이야. 조직 같잖아.” 아이들이 웃었다. “웃기시네.” 민정이는 중얼거렸지만, 속으로는 싫지 않았다. 매번 당하기만 했던 자신에게 같은 편인 무리들이 의지하고 있다는 게 든든했다.

그때였다. 골목 아래쪽에서 다급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야! 잡아!” 고개를 돌리자  남자아이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뒤에서는 덩치 큰 오빠들이 욕설을 내뱉으며 쫓아오고 있었다. 그중에는 롤라장에서 디제이를 보던 오빠도 섞여 있었다. 아이는 겁에 질린 얼굴로 두리번거리다 샤크 아이들 뒤로 숨어버렸다.

“살려줘….” 숨넘어가는 목소리였다. 샤크 아이들의 표정이 굳었다. “뭐야 저거….”, “야, 괜히 엮이지 마. 저 형들 무서운 사람들이야.” 웅성거림이 번졌다. 잠시 후 공사판 안으로 들어 온 오빠들이 주변을 훑었다. “야.”, “그 새끼 어디 갔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민정이는 뒤에 숨은 아이를 힐끗 바라봤다. 떨리는 어깨, 겁에 질린 얼굴. 장지동 연립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자신 같았다. 롤라장에서 자주 봤던 오빠 하나가 민정이를 발견했다. “뭐야. 니네 패거리냐?”, 민정이는 대꾸하지 않았다. 오빠들은 피식 웃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그냥 가.” 민정이는 천천히 걸어나가 무리들을 막아섰다. 뒤쪽에서 누군가 작게 중얼거렸다. “야… 민정아.” 도망가자는 목소리였다. 민정이도 무서웠다. 다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하지만 그냥 버티고 싶었다. 어떻게 되던 상관이 없었다. 전에 공사판에서 대신 맞아주던 말랭이 친구 얼굴이 떠올랐다. 그 친구를 뒤로 하고 도망쳤던 그때 그 기억이 아직도 목구멍에 돌덩이처럼 걸려 있었다.

민정이는 오빠들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애 울잖아.” 순간 공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하, 그래서 어쩌라고?” “와, 씨…. 니가 대신 맞을래?” 오빠들이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가왔다. 민정이 뒤에 있던 아이들이 하나둘 뒷걸음질 쳤다. 

저 멀리서 순찰을 돌던 경찰차 불빛이 골목을 스쳐 지나갔다. 민정이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경찰차를 향해 소리를 질러댔다. “도와주세요! 여기 깡패있어요.” 그 소리는 경찰을 향한 게 아니었다. 오빠들이 듣고 물러섰으면 하는, 거의 본능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잠깐의 정적. “너, 두고 보자.”, “나중에 걸리면 가만 안둔다.” 서로를 돌아보던 오빠들은 이를 갈며 도망쳤다. 민정이도 혼이 나갔다. 그동안 겪었던 무서움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 아이는 그대로 도망쳐버렸고, 샤크 아이들도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공사판 위로 바람이 세게 불었다. 철판이 덜컹거리며 흔들렸다. 그 소리를 따라 아이들의 가슴도 쿵쾅거렸다. 조금 전까지 주윤발 흉내를 내고 웃고 떠들었지만, 다들 알고 있었다. 자기들은 영웅본색 같은 영화 주인공이 아니라는 걸. 큰 소리 한번, 주먹 하나에도 쉽게 부서질 수 있는 아이들일 뿐이었다. 다만 버려지지 않기 위해, 무너지지 않기 위해, 서로의 옆에 있을 뿐이었다.

"나... 먼저 간다." 샤크의 무리 중 하나가 땅바닥만 보며 흘리듯 말했다. 미처 다 마시지 못한 밀키스 캔이 툭 떨어졌다. 고맙다는 말도 없이 가버린 아이가 사라진 골목 끝을 보며, 아이들은 처음으로 서로의 눈을 피하기 시작했다. 가짜 영웅놀이는 끝났다. 무서운 오빠들이 뱉고 간 ‘두고 보자’는 보복의 말이, 눅눅한 공기 속에서 소리 없는 공포가 되어 아이들 사이를 갈라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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