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서류를 접수하고 돌아오는 지하철 안, 민정이의 무릎 위에는 빳빳한 서류 봉투 하나가 놓여 있었다. 생의 한 단락을 잘라내고 온 직후였으나 그녀의 코트 깃은 여전히 칼날 같았고, 표정은 서늘할 정도로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때, 정적을 깨고 낯선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피해자 지원센터입니다. 민정 씨 사정은 다 들었어요.”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민정이 필사적으로 묻어둔 진실을 하나둘 파헤치기 시작했다. 변호사 선임 비용, 한부모 가정 신청, 국가 지원금…. 낯선 여자의 친절한 목소리가 민정이의 귓가를 긁어댔다. 꽁꽁 싸맨 상처를 억지로 들춰내는 그 단어들에 민정이의 예민함이 극에 달했다. “괜찮습니다! 남의 일이니 신경쓰지 마세요!”
서둘러 전화를 끊었지만, 민정이는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다시 전화를 걸었다. 자신과 가족의 비밀이 어디에선가 새고 있다는 공포로 상대에게 실례를 했다는 게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사과를 했다. “제가 사실 공무원인데, 이런 거 알려지는게 무섭네요. 그냥 조용히 살고 싶어요. 죄송합니다.”
민정이는 언제부터인가 가해자로 오해받는 것이 편했다. 누군가의 동정 어린 시선에 기대는 '가련한 피해자'가 된다는 것은, 그녀가 여태 지켜온 자존심이라는 성벽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사건을 접수한 이후 그녀에게 쏟아지는 낯선 이들의 동정 어린 시선과 말투가 너무도 부담스러웠다. 그녀의 상황을 다 알고 있는 이들과 마주치자니 자신의 신세가 길가에 널부러져 있는 노숙자 같았다.
하지만 세상은 민정이가 혼자 감당하기엔 너무도 거칠었다. 아이들은 할머니가 있는 군산에 가고 싶어했지만, 직장에서는 민정이의 전출을 받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몇 달만 참으면 승진할 수 있다고 회유하고 있었다. 집안을 뒤로 하고, 일을 열심히 했던 것이 인생의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또다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며칠 후 결국 민정이는 그 낯선 여자에게 다시 전화를 했다. 벨이 한 번 울리고, 연결되었지만 민정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목이 먼저 잠겨버렸기 때문이다. “아.이.들.이요...” 그 말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다음부터는 소리가 제멋대로 새어 나왔다. 수화기 너머에서 여자는 서두르지 않고 기다렸다. 민정이의 울음은 더 깊어졌다. “제가요...이런 거... 잘못해서요.”. 민정이는 타인 앞에서 울어도 된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그녀는 진심어린 사람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수단을 동원하여 민정이의 손을 잡아주었다. 정든 직장을 떠나던 날, 상사는 민망함이 섞인 얼굴로 민정이에게 물었다. “그렇게 힘들면 털어놓지 그랬어요?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지낼 수가 있습니까? 나는 정말……. 민정 씨는 걱정 하나 없는 사람인 줄 알았어요.”
그럴 만도 했다. 민정이는 이혼 서류를 냈던 그날 아침에도 평소보다 일찍 출근해 완벽한 회의 자료를 준비했으니까. 하필 회의 도중 상사가 사람들 앞에서 서류 뭉치를 집어던지며 애먼 소리로 민정이를 호되게 질책할 때 울음을 쏟아낼 뻔하기도 했다. 다행히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때 민정이는 서류를 줍는 척하고 고개를 숙이며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맺힌 슬픔을 간신히 닦았다. 자신 때문에 분위기가 망가지는 게 더 싫어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게 익숙한 민정이었다.
상대의 동정심을 먹고 사느니 차라리 비난받으며 얼어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던 여자. 지원센터의 그녀는 고마워서 선물을 건네주는 민정이에게 한참을 바라보다 말했다. “이제 이렇게 살지 않으셔도 돼요. 어떻게 남의 이목을 다 따지면서 세상을 혼자 다 떠안으려고 하세요.” 그 말은 민정이의 생을 관통하는 화살 같았다.
민정이는 그제야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열세 살 장지동 연립에서 시작된 그 이른 추위를 여전히 홑몸으로 외투 한 벌 없이 버텨내고 있었던 자신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