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이 지났지만, 장지동 연립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랜만에 집에 온 엄마는 화장대 서랍을 뒤적였지만 민정이를 의심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이상하네…….” 지갑을 몇 번 뒤적거리던 엄마는 그냥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어디다 썼나?" 그게 끝이었다. 민정이는 방문 틈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들킬까 봐 무서웠던 게 아니었다. 정말 모르는 건가 싶었다.
며칠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또 잠깐 집에 들렀다. 돈이 필요하다며 서랍을 급하게 열고 닫았다. 하지만 민정이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머리만 한번 쓰다듬었다. "민정아. 숙모 말 잘 듣고 있어." 그 말에 민정이는 서글프면서도 화가 났다.
영동 거리에서는 상황이 달라지고 있었다. 시작은 우연이었다. 배고프다는 아이들에게 돈가스과 빵을 사 먹이고, 양말을 사줬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날 이후부터 아이들은 골목 어귀에서 전과 다른 눈으로 민정이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야, 민정아.”, “오늘 뭐 안 사주냐?”, “너 돈 많잖아.”
처음에는 으레 던지는 짓궂은 농담 같았다. 민정이도 대수롭지 않게 맞춰 웃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무언가 뒤틀리고 있었다. 예전에는 그냥 옆에 앉아 있어도 됐다. 아무것이 없어도 서로 어울렸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주머니에 돈이 있을 때만 아이들이 더 모여드는 것 같았다.
결국 어느 날 밤, 민정이는 또 화장대 서랍에서 돈을 꺼냈다. 그리고 영동 거리로 향했다. 급하게 넣느라 주머니 속 지폐가 거칠게 구겨졌다. 예상대로 아이들은 민정이를 연신 반겨댔다.
“야, 왔다!” “오늘은 어디 가냐?” “영화 볼까?”, “피자라는 게 맛있다는 데 그거 먹고 싶다.” 아이들이 웃었다. 민정이도 따라 웃었다. 그런데 가슴 한쪽이 묘하게 허전했다. 그때였다. 곁에 서 있던 말랭이가 불쑥 말했다. "야." "왜?" “그만해." 아이들이 웃음을 멈췄다.
민정이는 굳어진 얼굴로 말랭이 친구를 돌아보았다. “뭘.” “돈 쓰는 거.” 잠시 정적이 흘렀다. “뭐라고?” 친구는 민정이를 한쪽으로 데리고 갔다. “……니 돈 아니잖아.” 민정이의 표정이 굳었다. “무슨 소리야.” "모를 줄 알아?" 친구는 민정이의 시선을 피하며 낡은 계단 난간 아래 흙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민정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숨이 턱 막혀왔다. 친구는 한참 뒤에야 다시 말했다. “나는 그냥…….” “…….” “네가 안 그랬으면 좋겠어.” “왜.” “그냥.” 말랭이 친구는 쓴웃음을 지었다. "예전의 니 모습이 좋아.“ 그 말이 가슴을 때렸다.
아이들이 돈 때문에 모인다는 걸. 말랭이 친구는 알고 있었다. 민정이도 짐작은 했지만 외면해왔는지도 몰랐다.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영동 거리에는 가느다란 가랑비가 조금씩 흩뿌리고 있었다. 민정이는 젖어드는 주머니 속에서 남은 지폐를 꺼내 바라봤다.
애초에 돈이 탐나서 시작한 짓은 아니었다. 버려졌다는 외로움 때문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있고 싶었다. 또다시 혼자 남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돈을 쓰면 쓸수록 아이들은 가까워지는 것 같지만, 더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가랑비 속에서 영동 거리의 간판 불빛이 흐릿하게 퍼졌다. 민정이는 젖은 아스팔트를 내려다보았다.
민정이는 비에 젖은 지폐를 다시 주머니 속에 구겨 넣었다. 주머니는 전보다 두툼해졌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한참 동안 빗물 고인 바닥만 내려다보던 민정이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는 아직 잘 몰랐다. 다만 예전보다 더 외로워졌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