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안 記者의 '군산 야구 100년사'] 영원한 군산인 故 최관수 감독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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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안 記者의 '군산 야구 100년사'] 영원한 군산인 故 최관수 감독 ③
  • 조종안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 승인 2021.02.05 08:06
  • 기사수정 2022-01-14 10: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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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단 후 처음 거머쥔 전국대회 패권... 그날의 풍경

도선장(군산-장항)에서 몸을 푸는 최관수 감독과 선수들(1970년대 중반)./사진=군산야구 100년사
도선장(군산-장항)에서 몸을 푸는 최관수 감독과 선수들(1970년대 중반)./사진=군산야구 100년사

 

최관수 감독은 전심전력을 다 해 선수들을 가르쳤다.

동녘 하늘이 환하게 밝아오면 선수들보다 일찍 운동장에 나오는 등 솔선수범의 행동으로 지도했다.

직접 마운드에 올라 위력적인 볼로 타자들의 타력과 선구안을 길러주었다. 국내 실업 야구를 주름잡던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선수 개개인의 소질을 계발하고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경기력 수준을 한층 높였다.

또한 ‘뛰어난 선수가 되기에 앞서 도리를 다하는 인간이 되라’고 권한다.

훗날 영화로도 만들어진 유명한 일화가 있다.

추석날 훈련하던 선수들이 막걸리를 몰래 마시고 사고를 쳤다. 학교는 처벌하려 했으나 최 감독은 자신에게 맡겨달라고 간청한다.

그는 선수들을 모아놓고 “내 잘못이니 나를 때리라!”며 방망이를 건넸다.

모두 머뭇거리자 “안 때리면 내가 이곳을 떠나겠다”고 경고했고, 선수들은 펑펑 울면서 ‘하늘 같은 감독님’을 때렸다.

이후 선수들은 하나로 뭉쳤고, 그 ‘끈기와 근성’으로 1971년 전국체전 정상에 오른다.

1971년 10월 12일. 서울에서 개최된 제52회 전국체전 야구고등부 결승전(군산상고-배재고) 열리는 날이었다.

전북 대표 군산상고가 서울 대표 배재고를 1-0으로 누르고 우승하는 순간 선수들과 감독은 한 덩어리가 되었다.

감격! 또 감격... 하늘도 군산상고 우승을 축하해주는 듯, 그날의 하늘은 더없이 높아 보였고 눈이 시리도록 푸르렀다.

수천의 관중들은 야구의 새 역사 탄생에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보냈다. 한국야구 역사상 전국대회 패권을 전북 대표팀이 처음으로 차지한 날이었으니, 군산상고 우승은 그해 체전이 낳은 가장 값진 기적이었다.

게임이 종료되자 선수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최관수 감독, 김병문 전 교장, 이용일 경성고무 사장을 차례로 하늘 높이 헹가래 쳤다.

이날 새벽에 상경한 응원단 400여 명은 목이 터지라 응원하였고, 게임이 끝나자 일제히 운동장으로 뛰어내려 광란의 물결 속으로 휩쓸렸다.

군산상고 선수들이 투숙한 퇴계로 3가 동신여관은 이날 밤늦도록 축하객이 줄을 이었고 수십 통의 축전이 날아들었다.

군산과 전주에서는 속히 내려오라는 독촉 전화가 빗발쳤다.

당시 언론들은 군산상고의 전국대회 첫 우승은 서울 세와 영남 세력의 대결장이었던 한국 야구의 세력 판도를 뿌리부터 흔든 ‘태풍의 눈’이었다며 선수들의 투혼과 최 감독의 용병술을 높이 평가했다.

군산상고는 1972년 황금사자기 부산고와 결승전에서도 9회 말 대역전극을 펼치며 우승, 국내 고교야구 강팀으로 자리를 굳힌다.

최 감독이 재임한 10년 동안 군산상고는 ‘역전의 명수’로 재탄생하면서 전국규모 대회에서 놀라운 성적(우승 6회 준우승 5회)을 기록한다.

그는 군산상고뿐만 아니라 호남야구와 한국프로야구에도 커다란 행운을 안겨주었다.

그의 가르침을 받은 역전의 명수들이 1982년 출범한 해태타이거즈 주축을 이뤘고, 전국 각 지역에 많은 팬을 확보했다.

해태는 그 저력을 바탕으로 한국프로야구 최강팀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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