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안 記者의 '군산 야구 100년사'] 군산상고 석수철 감독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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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안 記者의 '군산 야구 100년사'] 군산상고 석수철 감독 ②
  • 조종안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 승인 2021.01.15 08:06
  • 기사수정 2022-01-14 20: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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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선수 시절 별명은 ‘미련 곰탱이’

군산중앙초등학교 4학년 때 운동장에서 부모님과./사진 출처=군산야구 100년사
군산중앙초등학교 4학년 때 운동장에서 부모님과./사진 출처=군산야구 100년사

석수철(昔守哲)은 1973년 군산시(당시 옥구군) 옥서면 옥봉리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착했고 주관이 뚜렷했다고 한다.

성격은 매사에 신중하고 꼼꼼한 편.

1980년 군산비행장 부근 옥봉초등학교에 입학, 야구에 재미를 붙였으나 여건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 아버지가 서둘러 시내 중앙초등학교로 옮겨주는 바람에 야구와 인연을 맺게 된다.

 

“조계현, 장호익, 백인호, 고장량 등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전국을 호령하던 때였죠."

"야구는 하고 싶은데 시골학교라 야구부는 없고···. 마침 중학교 때 야구선수였던 아버지가 눈치 채고 전학을 시켜주셨어요. 아버지와 마음이 통했던 거죠."

"처음 포지션은 3루수였고, 릴리프로 마운드에 서기도 했지요."

"시합도 여러 차례 나갔는데 성적은 별로였어요. 그래도 야구가 좋았고, 유니폼 차림의 제 모습이 자랑스러웠던 것을 생각하면 팔자에 타고난 모양입니다. (웃음)”

 

타고난 노력형이었던 석수철의 초등학교 선수 시절 별명은 ‘미련 곰탱이’.

야구가 재미있기도 했지만, 타력과 주력이 앞선 동료들을 따라잡기 위해 달리기도, 타격 연습도 열심히 했다.

감독이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미련한 곰처럼 연습한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란다.

친구들의 놀림에도 연습이 끝나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는 그는 “몸도 생각했어야 하는데 성장기에 너무 무리해서 프로선수 생명도 짧았던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군산중학교 야구부에서 유격수와 3루수를 번갈아 봤던 그는 1989년 군산상고에 진학해서 2학년 때 3루수로 자리를 굳힌다.

그가 졸업 때까지 전국규모대회에서 거둔 성적은 제45회 청룡기대회 3위(2학년)와 제72회 전국체전 3위(3학년)가 전부였다.

그는 고등학교 1~2학년 시절을 무척 힘들게 보냈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전국대회에서 4강에 들어야 대학진학 자격이 주어지던 때였는데, 입학하던 해에 성적을 못 내니까 어린 마음에 불안감이 밀려오더군요."

"주위 시선은 따갑고, 훈련은 훈련대로 고되고···, 이중삼중으로 고통을 받았어요."

"야구를 계속 해야 하는지 회의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힘들어하다가 새로 부임한 나창기 감독 제의로 3루수를 맡으면서 안정을 찾았죠.”

 

대학 3학년 때 국가대표로 선발

국가대표선수 시절 동료들과(가운데 석수철)./사진=군산야구 100년사
국가대표선수 시절 동료들과(가운데 석수철)./사진=군산야구 100년사

 

전력투구 정신으로 무장한 석수철은 군산상고 3학년 가을, 전국체전 고등부 야구에서 3위의 성적을 거두고 성균관대로 스카우트된다.

1992년 대학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그는 그해 5월 6일 벌어진 제26회 대통령 배 대학야구대회 첫날 1회전 경기(성균관대-서울대)에서 9회 말 통쾌한 두 점짜리 홈런으로 신고식을 대신한다.

그날 경기결과는 14-4로 성균관대 승리.

1992년은 한양대 2학년 때 LA다저스에 입단한 박찬호를 비롯해 조성민, 염종석, 정민철, 임선동 등 한국야구를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려 놓을 유망주가 여럿 배출된 해였다.

석수철도 그들과 함께 기대주로 떠올랐고, 국가대표 시절에는 해태 왕조의 마지막 감초로 불리는 김종국(고려대)과 키스톤콤비를 이루며 팬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는 성균관대 선수 시절 춘계리그, 추계리그, 대통령배 등 각종 대회에서 기회가 올 때마다 짜릿한 동점 홈런도 날리고, 통쾌한 승리 타점을 때려내는 등 야무진 타격과 안정된 수비력을 보여준다.

2학년 춘계리그부터는 주전 3루수 자리를 꿰찬다. 그러나 야구는 아홉 명이 하는 경기다. 그의 맹활약에도 팀 성적은 하위권을 맴돌았다.

당시 성균관대 야구부는 한 시즌 통산 3승을 따내는 게 보통이었고, 약체팀인 서울대를 만나야 4승을 올리는 정도였다.

그처럼 부진한 팀 성적에도 석수철은 3학년 때 대학선발팀으로 활약했고, 가을에는 국가대표 3루수로 발탁된다.

당시 야구부 동료들과 학생들은 모교에서 11년 만에 국가대표 선수가 나왔다며 축하해 주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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