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어‧귀촌에 성공한 사람들⑥] 어선어업 부안 하서면 고상철‧ 방미선씨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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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어‧귀촌에 성공한 사람들⑥] 어선어업 부안 하서면 고상철‧ 방미선씨 부부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0.09.18 11:29
  • 기사수정 2021-03-16 09: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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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키 잡고, 부인은 어망 손질 달인… 새터민 여성 어업인 꽃게 찬가
북송(北送)‧ 두 번의 중국 탈출한 파란만장 삶… 지칠 줄 모르는 귀어 일기
흉작- 풍작- 흉작’ 롤러코스트 새내기 어업인의 길… 부안 안착에 온힘
“수익구조 개선할 냉동창고 등 가공시설이 필요해요”

 

/사진=투데이 군산
/사진=투데이 군산

 

"중국으로 첫 탈북 후 북송되어 혹독한 감호시설 생활로 고초를 겪으면서 재탈출, 중국과 동남아 국경 등을 넘고 넘어 남한행에 성공했습니다. 이 과정에 어린 아들까지 데리고 나와 한국 사회에 적응해 가고 있으며 새터민 어업인의 길을 걷고 있답니다.”

귀어‧ 귀촌 생활 3년 차인 방미선(52)씨.

미선씨는 2002년 중국으로 탈북한 이후 북송·중국 떠돌이 생활과 함께 동남아를 거쳐 6여 년 만에 남한 사회에 정착, 얼마 전부터 부안군 하서면 한 마을에서 남편과 함께 새내기 어업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남한에 정착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지금의 남편 고상철씨와 중매 결혼했다. 처음에 만난 상철씨는 말수는 적었지만, 속이 깊고 부드러운 성격에 이끌려 곧바로 신접 생활에 들어갔다. 이곳저곳을 경유하며 제2의 고향 부안군에 이사 온 것은 2017년 5월이었다.

최근 부안군으로부터 열심히 살고 있는 귀어‧ 귀촌인이 있다는 소개와 추천을 받았는데, 그 주인공이 미선씨 부부였다.

9월16일 오후, 군산에서 오양수 전라북도 귀어귀촌센터장과 함께 자동차로 달려 미선씨 부부가 사는 부안군 하서면의 한적한 마을에 도착했다.

그들 부부의 안식처에서 사연을 듣고 취재를 해보니 핫 스토리의 주인공이 미선씨였다. 조심스럽게 양해를 구하고 본격적인 그들 부부의 귀어‧ 귀촌 생활에 대한 에피소드와 고민 등을 들어봤다.

활달하고 적극적인 분이라 일반 귀어‧ 귀촌인이라 생각했는데 취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미선씨는 곧바로 ‘떳떳하게 북한에서 온 새터민’이라 밝혀 그녀의 도전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미선씨의 삶은 드라마틱한 내용을 넘어 파란만장한 이야기들로 넘쳐났다.

스토리의 시작은 34살 때인 2002년. 우리에게는 한일월드컵이란 전세계 축구인들의 축제로 들떠 있을 때였다.

그 시절, 북한의 어려운 경제 사정과 체제에 염증을 느낀 미선씨는 과감하게 중국행을 시도, 동북3성의 곳곳을 떠돌다가 운 나쁘게 공안에 잡혀 북송됐다.

/사진=투데이 군산
/사진=투데이 군산

2004년 북송 후 ‘단련대’라는 준 감옥시설에서 극심한 고문과 강제 노역 생활을 하던 중 죽기 살기로 탈옥했다. 이곳을 빠져나온 직후, 친정이 있는 함경북도 경성군으로 들어가 아들(당시 14살) 등과 함께 북송 된지 2년 만에 두 번째 중국행에 성공했다.

피폐한 고향을 등지고 탈북했지만 가혹한 삶의 연속이었다.

미선씨의 떠돌이 생활은 2차 탈북 후 인신매매조직에 팔려 중국 동북3성의 깊고 험한 산골로 끌려가 중국인과 강제 결혼생활을 해야 했다. 특유의 강인한 정신력으로 6개월 만에 다시 탈출했지만 고된 식당 생활 등 해보지 않은 일이 없을 정도로 처참한 삶이 계속됐다.

그래도 그녀가 끝까지 굴하지 않고 남한행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자신은 물론 하나뿐인 아들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였다.

두 차례에 걸쳐 중국행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의 지리에 밝은 데다 그녀의 영민함 때문이었다.

그녀의 주된 탈출 경로로 활용됐던 함북 경성과 회령, 온성 등지는 중국 접경지대에 있는 투먼시(도문시)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있을 뿐 아니라 동쪽은 혼춘시, 서쪽은 엔지시(연길시) 등과 접해 있어서 지리적으로 익숙한 곳이었다.

또한, 북한에서 우리의 고등학교와 유사한 학교를 졸업해 언어 능력과 기억력 등이 출중했던 것도 한몫했다. 심지어 인신매매로 중국인에게 팔려 갈 때도 2차 북송만은 피해가기 위해 그곳으로 들어가는 지리를 거의 다 암기했을 정도였다.

이런 미선씨에게 서광이 비춰진 때가 2008년이었다.

2~ 3년 동안 중국의 곳곳을 떠돌면서 남한행 탈주 루트를 찾던 중, 아는 브로커의 도움으로 중국국경과 가까운 미얀마로 잠입해 태국 등을 거쳐 ‘탈북 시도 6여 년 만’에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고대하던 남한행에 성공했다.

/사진=투데이 군산
/사진=투데이 군산

 

이 과정에서 겪은 일들은 기억하기도 싫지만, 동료의 죽음- 배신- 아픈 인권 유린 경험 등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녀의 인생 스토리는 쓰면 소설이요, 드라마로 담을 내용 등으로 가득했다.

그야말로 파란만장이란 말 밖에….

한국에 도착한 후에 하나원 교육과정을 거쳐 경남 마산시에 정착했다.

마산에 살던 중에 지인의 소개로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했는데, 그가 고상철 선장.

그는 전남 흑산도가 고향으로 열네 살 때, 먹고 살기가 어려워 군산으로 나왔는데 그 시절부터 배와 관련된 일이라면 안 해본 일이 없었을 정도로 그 분야에 이골이 난 사람이었다. 생계를 위해 학교 대신 뱃일을 하면서 삶을 지탱해왔을 뿐 아니라 그 분야에서만 오롯이 일해온 전문가라 할 수 있다.

결혼과 함께 남편의 삶터인 전남 목포시로 2008년 이사했다.

상철씨는 어선 기관장으로 생활하고 있어 그럭저럭 생활을 꾸려나갔었지만 미선씨는 어린 아들을 조금이라도 나은 환경에서 살 수 있도록 물불을 가리지 않고 일을 했단다. 생소한 북한 사회에서 온 새터민에게 녹록한 직업과 직장은 그림의 떡이었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결혼 후에도 남편에 의존하는 삶을 살기보다는 ‘함경도 또순이’다운 주도적인 생활을 했었다.

미선씨의 억척스러운 생활은 요양병원 요양보호사는 물론 영광굴비 손질 및 선별 작업 등에 이르기까지 일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다녔다. 영광굴비 선별작업을 하던 때에는 2~ 3일 동안 꼬박 밤잠도 자지 않을 정도로 고단한 생활이었지만 가족의 행복한 삶을 꿈꾸면서 생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단다.

다른 사람의 2배가량 잽싸게 일을 해서 그곳의 사장들은 미선씨에게 일손을 자주 내밀기 일쑤였다.

이런 말을 쏟아내자 남편 상철씨는 “일에 관한 한 그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눈썰미가 뛰어나 일 처리를 잘했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솜씨에 대해선 자타가 공인할 정도다.

한참 이야기 꽃을 피울 때 핸드폰이 여러 차례 울려댔다. 마을 동네 분이 과일 한 상자를 가져가란 내용 같았다. 자신은 인터뷰 중이라 남편에게 눈짓을 하니 외출해서 사과를 가지고 왔다. 이곳 생활을 한지 오래되지는 않지만 동네 사람들과 어울릴 정도로 가까워지고 있다니 다행스러워 보인다. 그녀의 이웃과의 교류 노력 덕분이었다.

미선씨는 남편과 달리, 수많은 일을 해보았지만, 어선어업은 난생처음이었다. 바닷일을 하러 나가는 날이면 또순이 중 또순이라는 그녀도 무척이나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일에 적응하느라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단다.

물론 어선 운전의 베테랑인 남편을 믿고 무턱대고 복합어선을 허가받아 출항에 나섰지만 엄청난 손해만 보고 자망어선으로 다시 바꾸는 등 시행착오가 뒤따랐다.
더 나이가 들기 전에 노후를 생각해서 정을 붙이고 정착해서 살곳을 마련하자는 게 부부의 작은 소망이었다. 그 고민과 열망을 담아 시작한 일이 귀어‧ 귀촌을 통한 어업인의 길이었다.

처음에는 군산으로 이주, 어선을 마련해서 가력도까지 오가는 강행군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앞서 일해온 어업인들의 텃새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인근 고창 앞바다까지 진출했지만 그곳은 더 심했다.

활달한 ‘함경도 또순이’ 미선씨가 궁여지책으로 그분들에게 (자신은) 북한에서 온 새터민이라고 읍소하자 조금씩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는가 하면 도와주기까지 했다.

“일도 어렵고 힘든데, 그런 일까지 당하니 자신들의 신세타령만 해야 할 정도로 많은 눈물을 흘렸지요. 숱한 죽을 고비를 넘나들었지만 이런 고충은 정말 참아내기 어려웠답니다.”

 

/사진=투데이 군산
/사진=투데이 군산

 

호사다마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들 부부가 그동안 너무도 많은 고초와 고통을 겪었던 삶을 살아서인지 몸에 무리가 왔다. 병원 진단 결과, 상철씨는 디스크와 어깨 수술을, 미선씨도 그 무렵 허리가 좋지 않아 병원에 가보니 수술을 하라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부부는 수술을 마치고 다시 삶의 현장으로 돌아왔다.

2017년 봄 꽃게잡이를 시작해보겠다는 심산에서 출항했지만, 고전의 연속이었다. 아마 이 시기쯤 되었던 것 같다. 비바람이 엄청나게 불던 어느 날, 이역만리를 돌고 돌아 살기 위해 이곳에 온 새터민이니, 도와달라고 눈물로 간청했다. 이를 지켜본 선배어업인들이 그제서야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한 것.

문제는 새벽부터 일을 해야하는 어업의 성격상 몸이 겨우 수술해서 호전되었는데 악화되자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이를 딱하게 본 지인이 부안군 하서면의 한 마을에 월세로 집이 나왔다고 알려줘 2017년 7월 현지 방문 후 계약을 맺고 생업 전선으로 향했다. 이곳이 지금의 안식처다.

주거지를 겨우 해결한 뒤 바다로 나섰으나 생계유지조차 힘들었고 가을 꽃게잡이도 마찬가지였다. 주변에선 전어잡이를 해보라는 권유도 있어 새롭게 도전도 했다.

새내기 어업인 부부는 처음으로 전어잡이를 해봤으나 심야 작업을 해야 하는 상황으로 몸만 힘들었지, 손에 잡히는 돈은 거의 없었다. 기름값 조차 건지기 어려웠다.

/사진=투데이 군산
/사진=투데이 군산

 

그해 겨울은 혹독했다. 구매한지 몇 달도 안 된 차를 팔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겨우 생활을 꾸려 나가야 했다. 이런 경험은 산교훈으로 남았다.

2년 차인 2019년에는 봄철 꽃게잡이부터 수익을 올렸을 뿐 아니라 가을까지 호실적이어서 가력도항 최고의 어획고를 얻었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이런 경험을 살려 올해는 더 나은 어업인이 될 것이란 굳은 믿음이 있지만, 최악의 상황은 아니어도 내년 생계 걱정이 앞선다.

요즘 새벽 2~ 3시부터 오후 4시까지 나가서 일하는 강행군 속에 하루 13~ 14시간의 노동과 그물 작업까지 마치면 잠자는 시간도 부족할 정도다. 올해는 첫해에 비하면 나은 편이지만 어장의 그물을 도난당하는 일이 빈번할 뿐 아니라 가을 꽃게의 씨알까지 좋지 않아 부부의 얼굴에 그늘이 짙게 배어 있다.

여력이 없는 새내기 어업인이어서 냉동창고가 없어 시세차익을 챙길 형편도 되지 않는다. 게다가 보관할 장소는 물론 꽃게도 부족해 인터넷 판매와 같은 방식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으니, 대출금 상환과 생활비 걱정이 마음을 무겁게 한다.

2017년과 올해와 같은 상황이 반복되면 생활조차 걱정인데, 4~ 5개월 만 일하고 안정적인 노후를 기약할 수 있을지….회의가 밀려온다.

이들 부부가 막연한 운과 정부 등의 지원만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새터민 어업인과 같은 새내기 어업인들을 위해 정부의 정책 지원과 배려가 전향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는 취재하는 내내 한결같은 여론이었다.

꽃게가 어느 정도 어획이 된다고 해도 중간 도매상들의 농간을 피할 수 없으며 그들의 횡포를 벗어나려면 냉동시설의 신축이 무엇보다 절실하다는 게 그들 부부의 고민이자 숙제다.

시설을 추가하려면 대출을 많이 받아야 가능하다는 점에서 새내기 어업인의 마음이 절망으로 바뀌지 않도록 공동창고 건립 지원이라도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일은 마을 분들과 교류가 차츰 빈번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사진=투데이 군산
/사진=투데이 군산

 

북한의 경우 미풍양속이라 할 수 있는 흔적들이 남아 있는데 미선씨가 살았던 그 시절에는 고향마을 주민들이 밤이면 만나서 노래를 부르고 일하는 전통도 있었단다. 물론 통제사회라 감시기능을 유지하는 방편이기도 하지만.

북한과 남한의 사회상은 생판 다르다.

미선씨는 남한에 처음 왔을 때 낮에는 몰라도 밤이면 그런 북한 사회의 모습과 달리 각 가정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는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단다. 그래도 미선씨는 희망의 끈을 단단히 붙들고 있다.

자신이 30대까지 살아온 그곳은 아무리 일을 많이 해도 강제적인 분배를 통한 삶을 살아야 했지만, 지금의 삶터에선 자신이 열심히 노력한다면 얼마든지 생활을 바꿀 수 있다는 점은 무엇보다 큰 의미로 다가선다고.

나이가 들면서 안정된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더 열심히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거듭하며 고단한 몸을 이끌고 쌀쌀한 초가을 새벽, 고군산군도와 칠산어장으로 향하고 있다.

추신: 미선씨의 귀어‧ 귀촌 성공적인 안착을 기원하며

자신과 함께 사선을 넘어온 20대 후반의 아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이곳에서 검정고시(중‧ 고교 자격증)에 합격했다.

타지에서 조선업종에 종사하다 결혼까지 해 어느새 두 아이의 아빠가 됐단다. 이제 고향이 남한인 자신의 피붙이가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어린 나이에 온갖 어려운 일을 겪었던 아들에게 빚진 마음이어서 온통 아들 걱정뿐이란다.

남한사회에 정착한 지 10여 년을 보냈지만, 어린 시절과 다른 경쟁 사회의 흐름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더욱 그렇다.

보험설계와 배달까지 다양한 일들을 해야 하는 아들의 장래 때문에 오늘도 잠을 뒤척인다.

사랑스러운 배우자와 아들(손자)들의 삶을 안착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을 마다하겠는가.

그동안의 고통과 같이해온 아들이자, 사선을 넘은 동지로서 오롯이 그의 삶을 응원하는 그녀에게 큰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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