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127] 대야·개정면의 母교회 ‘지경교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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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127] 대야·개정면의 母교회 ‘지경교회’(2)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4.05.09 11:59
  • 기사수정 2024-05-09 12: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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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경교회 설립 큰 공헌자 초대 장로 최흥서와 그 가족들
최 장로의 자손들, 지역의료 및 우리나라 의학발전 헌신
유명 목회자들 배출 … 이우석 목사· 장경동 목사 등
기독교장로회 총회지정 역사유물. / 사진=투군
기독교장로회 총회지정 역사유물. / 사진=투군

대야· 개정면의 모(母)교회격인 ‘지경교회’의 역사에 중요한 인물이자, 핵심 역할을 이는 단연코 ‘최흥서 초대 장로(1860~ 1937)’다.

최흥서는 오인묵(구암교회 1대 장로로 한국인 최초의 의료 선교사 오긍선의 아버지), 장인택 등과 함께 지역 개화기 기독교사에서 기여한 인사였고 그의 후손들 또한 군산과 우리나라 의학발전에 엄청난 역할을 했다.

이웃 김제출신인 그는 기독교 신앙과 근대문물에 눈을 떠 대야로 이주한 근대기를 빛낸 신앙인이다.

그러면 최흥서는 어떤 인물이었나.

# 지경교회의 초대 장로 최흥서는?

최흥서는 1860년 7월에 오늘날 김제시 만경읍에서 태어났다.

1873년 가족을 따라 당시 임피현 지경리(만자산)로 이주하여 살다가 조달현이라는 인물과 만나면서 삶이 바뀌었다 할 수 있다.

당시 조달현은 보부상이었는데, 그가 어떻게 기독교에 귀의했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조달현은 보부상으로 이 마을, 저 마을로 다니며 물건을 팔면서 기회있는 대로 복음을 전했던 인물이다.

최흥서는 그 후 군산선교부에 있던 전킨(한국명 전위렴 1865~ 1908) 선교사를 찾아가 기독교 교리를 정식으로 배웠다.

최흥서는 1897년 4월 10일에 전킨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입교한 후 이웃 사람들에게 열심히 복음을 전하게 된다.

자신의 집에서 10여km나 떨어진 궁멀(오늘날 구암동산)의 군산선교부까지 걸어 다니는 열성을 보였다.

앞서 최흥서는 1900년 만자산 주변의 자신의 집에서 최관보, 정백현, 이양화 등 교인들과 함께 예배를 시작했다.

이곳이 만자산교회, 즉 오늘날 대야의 지경교회가 첫 발을 내디딘 순간이었다.

지경교회에 있는 옛 교회 모습. / 사진=투군
지경교회에 있는 옛 교회 모습. / 사진=투군

당시 선교사들의 평을 보면 그는 중농출신으로 매우 조용하고 깊은 신앙심을 지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신앙과 성품은 당시 군산선교부의 평신도 지도자로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었고, 교인들에게 크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단다.

최흥서는 1910년 일본에 의한 강제병합 당시 교인들과 함께 나라의 독립을 위해 철야기도회를 가진데 이어, 3·1운동이 일어났을 때도 만세운동을 하다가 교인들과 함께 일경에 체포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후 농촌진흥운동(야학설치 운영) 전개를 통해 민중계몽에 앞장섰다.

그는 가족들을 신앙으로 이끌었고 영명학교 등을 졸업시킬 정도로 자녀교육에 열중했다.

그는 초기 개신교 인사로서 훌륭히 호남선교의 견인차 역할을 했으며, 평생 장로로서 헌신했던 초기의 개신교 발전의 공로자였다.

그의 가계도 역시 기록들을 살펴보면 매우 흥미롭다.

아들과 손자들까지 다수가 의료인의 길에 들어가 의사로서 뿐 아니라 의학자로 길러내는데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아들 최주현은 영명학교와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시켰고 구암교회 설립에 앞장선 장인택 조사의 딸을 며느리로 삼았다.

그의 아들은 영명학교와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한 최주현으로 의사면허를 딴 뒤 대야 삼성당의원을 운영했고 큰아들 최영태는 영명학교와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한 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를 거쳐 세브란스 의전 학장을 지낸 세균학 권위자로 성장했다.

기록에 의하면 그의 작은 아버지(또는 동생 ?)도 영명학교와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한 후 경기도 파주에서 병원을 개원했단다.

최흥서의 손자 최영태 박사의 업적은 대단하다.(디지털 의사신문 2011년 8월11일자 참조)

한편 1899년 군산항 개항보다 7년 앞서 1892년 11월 전킨, 레이놀즈(리눌서) 등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6명이 제물포에 도착한 뒤 1893년 1월27일 선교부 공의회를 조직하고 군산· 전주 · 목포· 광주· 순천에 선교스테이션을 확보했다.

군산에 들어온 전위렴 선교사는 궁멀로 불리던 곳에 선교거점을 확보하고 한국인 장인택 조사와 예배를 시작했는데 이곳이 당시 궁멀교회다. 오늘날의 군산구암교회다.

# 최영태 박사(1909~ 1992) - 발진티푸스 백신 개발, 초대 산업보건협회장

항일정신의 메카라는 영명학교 이미지와 다른 분야에서 활동한 이가 고 최영태 박사다. 최박사는 발진티푸스 백신 개발과 함께 진폐증 환자 보호에 앞장선 선구자이기도 하다.

최영태는 조부와 부친 등 집안의 영향으로 당시 신학문의 중심지였던 영명학교를 졸업한 후 세브란스의전(1930)을 졸업한 후 같은 해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미생물학교실 전공생(기초의학교실 조교)으로 재직하면서 일본 오사카대학에서 의학박사를 받았다.

국내로 돌아와 세브란스 의전 미생물학교실 교수 등을 거쳐 학장에 올랐다.

세계2차대전 중에는 페스트 등 방역연구에 힘써왔고 해방 후엔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보건학 석사학위(MPH)를 취득, 1949년에는 당시 보사부 방역국장으로 재임하는 등 우리나라 전염병 예방에 역량을 발휘하기도 했다.

이 무렵까지만 해도 최영태는 산업보건과 거리가 먼 분야에 종사하였으나, 1952년 대한석탄공사 보건관리실장으로 일하면서부터 산업보건 특히 광산근로자에서 발생하는 진폐증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대한석탄공사산하 장성광업소, 함백광업, 그리고 영월광업소 근로자를 대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규폐증(진폐증의 일종)에 대한 역학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를 1956년 석탄(石炭) 2호에 발표했는데 이는 진폐증에 관해서 뿐 아니라 우리나라 산업보건 분야의 첫 논문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후 노동청 산업보건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직하면서 특히 진폐증 환자의 보호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진폐증의 국제분류법 활용, 진폐증의 장해등급 판정, 합병증 그리고 단일광산에서 일하지 않고 여러 광산에 종사한 근로자에서 발생한 진폐증에 대한 사업주의 책임한계 등이 그의 재직 중에 이루어진 일이다.

진폐증과 그 합병증으로 입원대상으로 판정된 환자들을 노동청으로부터 위임받고 가톨릭의과대학 성모병원에 직업병 클리닉을 개설, 진폐증 환자의 임상적 관리를 처음으로 시작했다. 이는 1965년의 일이었으며 진폐증환자 치료의 출발이었단다.

1963년 보건사회부에서 주관한 보건관리자 직무교육에 참가한 사업장 보건관리자와 보건관리요원 그리고 강의를 담당한 강사진 등 38명이 같은 해 보건연수원에 모여 대한산업보건협회 창립총회를 가졌는데, 최영태 박사가 초대 회장으로 선임됐다.

이 모임이 우리나라 산업보건의 첫 거름 역할을 했었다.

그 후 1980년 회장 직을 사임할 때까지 17년간 회장을 연임한 것만 보아도 그가 산업보건에 얼마나 큰 관심과 열의를 가졌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대한예방의학회장, 아시아 산업보건학회 수석부회장과 회장을 역임하면서 1970년대 아시아 산업보건학회를 서울에 유치한 바 있는데, 이는 당시 우리나라 사정으로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는 도미한 후 미국에서 생을 마쳤다.

한편 최영태 박사와 관련된 내용 중에 재미난 기록이 세브란스 의전 등산부 활동인데 월간 산와 연세산악회 회사(會史) 자료 등의 책자에 나온 대학 시절 등반 사진 등이 오늘날까지 전한다.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산악부는 1936년 7월 10~ 31일 사이에 최영태 외 6명이 태백산과 금강산을 등반했다. 1937년 7월 2개조로 나누어 한조는 오대산과 장백산을 등반해 다른 한조(임명소외 4명)는 태백산, 설악산, 오대산, 장백산, 한라산을 등반하면서 한편으로는 산간마을의 산촌위생실사(무의촌진료사업)를 병행했다.

일반적으로 이곳에서의 활동이 우리나라 근대산악운동(등산)을 발전시킨 사료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학교측은 1928년부터 근대등산활동의 시작을 세브란스의전 등산부로 보고 있다.

# 지경교회가 낳은 목회자들

이우석 목사(1901~1942)는 군산영명학교와 평양숭실학교를 거쳐 평양신학교 졸업(1927)한 후 전남 해남에서 목회했다. 그의 설교는 항상 신사참배 등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애국 애족의 설교로 일경의 감시 대상이 됐다. 그는 투옥과 함께 극심한 고문을 받고 후유증으로 순국했다. 이곳에서 시무했던 목회자들로는 김필수 목사, 이진휘 목사, 한영수 목사 등이 있었고 김선경 목사와 장경동 목사, 그리고 수많은 교역자들도 이곳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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