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문화산책] 관문, 관문도시. 그리고 관문문화
상태바
[군산문화산책] 관문, 관문도시. 그리고 관문문화
  • 이화숙(군산문화도시센터 센터장)
  • 승인 2023.08.21 08:36
  • 기사수정 2023-08-21 08: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화숙 군산문화도시센터 센터장
이화숙 군산문화도시센터 센터장

먼저 결론을 말하겠다. 군산의 특질을 한마디로 잘라 말하자면 그것은 바로 '관문도시'라는 것이다. 군산은 역사적으로 한반도의 대표적인 '관문'이었고, 그래서 '관문도시'가 형성되었고, '관문도시'가 가질 수 있는 문화적 특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 문화적 특성을 '관문문화'라고 해두자.

'관문'은 영어로 '게이트웨이'라고 한다. '관문'이라는 용어는 고대 중국 한나라 시절부터 많이 쓰였다. 서역으로 가는 길목이나 이민족과의 교류가 빈번한 곳에는 만리장성 같은 성벽을 쌓아 경계를 삼고, 그 나들목에는 거대한 대문을 건축하고 군대가 주둔하여 지켰다. 실크로드로 가는 길목의 옥문관, 진나라를 지키기 위해 험산에 건설한 함곡관 등이 유명하다.

몇 년 전에 서울시가 경기도와 접경 지역 열두 곳을 '관문도시'로 지정했다는 보도를 보았다. 아무리 적당한 말이 없어도 이렇게 아무 데나 갖다 붙이면 안 된다. 예나 지금이나 '관문'은 한나라, 또는 문화적 토양이 다른 한 지역과 외부와의 출입 통로를 일컫는 데 써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항만과 국제공항이 있는 인천이 대표적인 '관문도시'라 할 것이다. 그런데 인천은 근대 개항 이전에는 이 나라의 '관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한강 입구에 버티고 선 강화도가 '관문' 역할을 해왔다. 미국의 제너럴 셔먼호가 조선과의 통상을 요구하며 농성한 곳이 강화도 아닌가. 그것은 그곳이 '관문'이었기 때문이다.

신라시대에는 영광 법성포가 중국과 일본을 잇는 '관문' 역할을 한 적이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예성강 입구의 벽란도가 그랬지만 다 옛이야기다. 조선시대에는 왜관이 있었던 낙동강 하구 부산 일대가 '관문'이었고, 부산은 그 전통으로 지금도 우리나라의 해양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관문'은 한때 융성했다가 세월이 가면 쇠한다.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꽤 오랫동안 '관문'의 역할을 한'곳을 찾아보라면 어디일까? 여기저기 꼽을 수 있겠으나 군산만 한 곳을 찾을 수는 없다. 군산은 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 '관문'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 역할을 충실히 감당할 것이라고 예상된다.

1899년 5월 군산항을 개항하고 외국인이 거주할 거류지가 정해졌다. 외국인은 다수의 일본인과 소수의 청국인이었다. 그때부터 밀려온 청국인이 화교학교를 세우고 짬뽕을 만들어 팔았다.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가 근대교육기관인 영명학교(현 제일고)와 멜볼딘여학교(현 영광여고)를 세운 것이 1902년이다. 한국전쟁 당시 군산은 미군 주둔지였고, 미군기지는 여전히 건재하며 그때 세워진 양키시장은 아직도 있다.

군산은 금강과 만경강 사이에 끼인 도시이다. 항구도시로 이런 큰 강을 둘씩 끼고 있는 곳은 세계적으로 흔치 않다. 서해를 건너온 배는 금강을 따라서는 백제의 수도인 부여, 공주까지 올라갔고, 만경강을 따라서는 전라감영이 있고 후백제의 도읍지인 전주까지 올라갔다. 대개 국제선이나 세곡을 실은 큰 배는 하구인 군산에서 하역하고, 육로나 작은 배를 이용하여 상류로 올라갔다.

소정방의 당나라 군대가 이곳으로 올라왔고, 백제 부흥군과 일본 지원군이 나당 연합군과 전쟁한 백강구(白江口)도 이곳 어디였을 것이다. 최무선 장군의 진포대첩이 있었던 곳이며, 여말 이성계가 황산대첩에서 박살 낸 왜구들이 쳐들어온 곳도 이곳의 옛 이름인 진포다. 고려시대 개경 정부는 김부식을 고군산군도로 파견하여 고려 사신을 영접하도록 했다. 진나라 말기 유방에게 패한 장수 전횡이 어청도를 거쳐 이곳으로 왔다는 전설이 있다. 고군산군도 일대에는 많은 무역선이 오갔고, 당시 침몰선의 유적이 심심찮게 발굴되고 있다. 이런 역사가 말해주듯이 군산은 전형적인 '관문도시'이다.

1908년에는 군산과 전주를 잇는 우나라라 최초의 신작로(현대식 도로)인 전군도로가 개통되었고, 1912년에는 군산, 익산을 잇는 군산선 철도가 개통했다.

'관문도시'에서는 모든 것이 시대를 선도한다. 그것이 특징이다. 지금이야 양주, 양담배, 양복, 양옥이 보편적이지만 한 시절 그것은 다른 데서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군산만의 생활풍속이었다. 군산 사람들은 일찌감치 커피와 빵에 익숙해 있었고, 축구, 야구, 권투 등 양식 스포츠를 좋아했다. 외래문화를 곧잘 수용했다.

그렇다. '관문도시'의 문화적 특질은 개방성이다, 외래문화에 배타적이기보다는 수용적이다. 산업혁명의 여파는 일본을 근대국가로 변모시켰고, 그것은 곧바로 군산으로 들어왔다. 전기, 전신전화, 상하수도, 항만, 각종 현대식 공장이 군산에 건설되었다. 그 당시 건설된 첨단 수리시설, 바둑판식 전답이 군산에는 즐비하다. 외래문화는 일단 수용되면 시민들은 그것을 내 것인 양 포용하고, 그리고 서서히 변용된다. 짬뽕이 그렇듯 그냥 그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내 것으로 고쳐 쓴다.

군산에서 횟집을 찾는 외지인들은 그 상차림에 놀라 자빠진다. 횟집의 스키다시(突き出) 식문화는 군산만의 특색인데, 일본식 밑반찬을 우리나라 양반집 12첩 반상으로 변용해놓은 것이다. 요즘은 많이 줄어서 한 스무 가지 정도 반찬이 나온다. 한창때는 가짓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곳 사람들은 묵은지 한 포기를 햄, 소시지와 탕 끓여 군산식 부대찌개를 만들어 먹는다.

이처럼 군산은 면면히 '관문문화'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오는 곳이다. 인천, 부산, 요코하마, 상하이, 프랑크프루트, 로테르담, 샌프란시스코 등이 대표적인 '관문'이지만 군산처럼 역사를 간직한 곳은 많지 못하다. 동아시아에서는 마르코폴로가 극찬한 중국 항저우와 근대 일본을 탄생시킨 나가사키 정도를 꼽을 만하다. 군산은 그런 정도의 반열에 두어도 손색이 없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