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109] 미션스쿨 멜볼딘여학교 출신(학생·교사)애국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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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109] 미션스쿨 멜볼딘여학교 출신(학생·교사)애국지사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3.07.19 14:49
  • 기사수정 2023-07-20 09: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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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명학교의 남매학교로 출발한 멜볼딘학교 출신들 항일운동 헌신
졸업생들… 대야출신 이순길 지사· 마산 항일운동 이유희 지사 등
이 학교 교사들… 고석주· 윤석구· 황현숙· 김영순 등 항일지사들
말년의 이순길 독립지사/사진=후손 제공
이순길

# 멜볼딘여학교 출신(교사) 맹렬한 항일활동… 대한민국애국부인회 등

1919년 3·1운동 이후 여성들을 중심으로 한 항일민족운동은 불길처럼 타올랐다. 처음에는 혈성단부인회→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 통합(대한민국애국부인회)되는 과정을 거쳤고 나중에는 근우회란 이름으로 발전적인 해체를 했다.

앞선 송죽회는 1913년경 평양에서 조직되었던 여성독립운동단체로 독립군의 자금 지원, 망명지사의 가족 돕기, 독립을 위한 회원들의 실력 양성을 목적으로 결성됐다.

점조직 형태로 운영되던 송죽회는 1916년 기독교 계열의 여학교 교사들을 중심으로 지방 조직을 구축하며 확대됐다. 송죽회는 소나무()와 대나무(竹)를 합한 것으로 민족에 대한 곧은 절개를 의미했다. 이곳의 비밀통신원이 대야출신 이순길 지사였고 그의 선· 후배(정신학교와 멜볼딘여학교 출신)들이 대거 참여했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1919년 6월 임시정부에 대한 군자금 지원을 통합됐는데 여기에는 군산멜볼딘여학의 이순길(청주지부장), 오현주와 이유희 등이 활동했다.

멜볼딘여학교의 교사였던 김영순(중앙의 서기)과 이마리아(군산지부장) 등도 주된 역할을 했다. 이들 교사출신은 정신여학교 졸업생으로 대야출신 이순길 항일지사와 깊은 인연을 갖고 있었다.

이후 멜볼딘여학교 교사출신인 방신영도 후배 이순길 지사와 함께 여성운동 및 항일여성단체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다. 신간회 조직과 함께 탄생한 근우회(1927년 5월)의 산파 역할을 한 것으로도 알려졌다. 근우회의 집행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또 독립지사 김마리아를 중심으로 재조직된 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1919년 11월 28일 발각돼 조직임원들이 모두 검거돼 사실상 국내 활동이 와해됐지만, 이후 해외에서 그 조직은 지속됐다.

김마리아가 이후 망명해 중국· 미국에서 유학하는 동안에도 군자금 마련 등 임시정부를 지원하며 유지됐다.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의 와해 이후 소강상태에 놓였는데 통합되고 발전적인 조직이 근우회였다.

‘근우회’는 기존 항일운동을 뛰어넘어 신간회(1927년 2월)와 같은 여성운동 통합론에 따른 근대여성운동단체의 효시다. 당시 여기에는 당대 대표적인 여성활동가들이 참여했다. 방신영은 멜볼딘여학교 교사로 활동했고 이순실 지사의 선배였다.

이런 역사적인 의미에도 불구, 이 모임의 대표자들 중에는 일제강점기 말기 친일로 돌아서는 사례도 있었다. 멜볼딘여학교 출신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들은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아야 했다.

# 멜볼딘여학교 출신의 항일지사

※이순길 항일애국지사(1891~1958)

대야출신 이순길 지사는 철저하게 배일에 가려진 여성항일운동지사다.

멜볼딘여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 정신여학교를 마치고 후학 교육과 독립운동에 전력했다.

이 지사는 정신여학교를 졸업(학제 개편으로 1회) 후 천안 광명학교와 기전여학교 등 12년간 교직에 종사하면서 제자 임영신(이승만 정부시절 상공부장관)의 애국운동을 지원했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을 목적으로 결성된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에 독립운동자금을 전달하는 임무를 수차례 수행했다. 실제 해방 후 부통령을 지낸 함태영 선생으로부터 독립선언서 등을 전달한 공로도 있지만 아직 그 내용이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 지사는 비밀요원(통신원)과 같은 존재여서 그의 행적이 드러난 것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일찍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 지사의 집안은 부모들의 교육열과 신앙심 등으로 근대문물 및 사상과 접했고, 독립운동 등에 헌신해왔다. 백범 서거 후 중앙정치무대에서 퇴장, 지역 기독교 전파 등 종교활동으로 소일했다.

가족 관계로는 이 지사의 바로 아래 남동생은 이요한(작고) 전 전북도지사였고, 그 가족들은 지경교회 등을 발전시킨 지역유지였다.

작은 남동생인 이요순 지사(1902~ 1937)도 항일운동가요,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인물이다.

한편 멜볼딘여학교 출신이지만 역사 속에 가려진 인물들도 있다.

이순길 지사와 같이 멜볼딘여학교의 출신으로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이들은 적지 않지만 역사적인 자료에는 별로 남아 있지 않아 무척 아쉬운 일이다. 다만 일제의 감시망인 고등경찰요사와 육군성 등의 자료에 남아 있다. 당연히 국가보훈부의 공훈자료실에도 그들과 관련된 기록들은 다수 있다.

이 지사의 후배 이유희(정신여학교 후배) 지사도 마산의신여학교에서 교사와 그 지역 3· 1운동에 깊게 간여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흔적이 없어 안타까움을 남기고 있다.

다만 군산시(당시 옥구군) 개정면 용암리 출신인 이유희 지사도 송죽회와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의 군산지부장이란 이름이 나온 점으로 미뤄 항일운동에 깊게 간여한 것은 분명하다.

# 멜볼딘여학교 교사들의 항일운동

※고석주 (1867~1937)

애국지사 고석주
애국지사 고석주

후손을 찾지 못해 공동묘지에 묻혔던 독립운동가 고석주 선생의 유해가 2017년 3월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충남 논산시 은진면 태생인 고석주 선생은 1903년 하와이로 이주해 신민회, 대한자강회, 국민회 등에서 활동하며 항일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고 선생은 1919년 군산 3·5만세운동을 주도한 뒤 체포돼 1년 6개월 동안 투옥되기도 했다. 출감 뒤 1929년 10월 서천군에 판교교회를 세워 교육사업 등으로 지역사회에 공헌했다.

1937년 7월 별세, 판교면 복대리 공동묘지에 안치됐다가 서거 80년만인 2017년 3월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5묘역에 안장했다. 정부는 고인에게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윤석구 전 제헌의원(1892~1950)

1892년 3월 15일 충청남도 서천군 화양면 완포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상경해 영국인 선교사가 세운 한영학교를 수석 졸업했고, 졸업 후 한영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1913년 중화민국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독립군으로 활동하던 그는 황포군관학교를 2기로 졸업했고, 김구의 명령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삼수군지국 서기로 임명돼 활동하기도 했다.

1922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내 자금책에 임명되면서 귀국해 전라북도 군산멜볼딘여학교 교사로 부임했고, 이후 이곳에서 정착했다.

그는 교사로 근무하면서 꾸준히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송금했고, 임시정부 귀국 준비위원에 임명되어 군산부에 ‘영신환’이라는 한약방을 운영하며 8.15 광복을 맞이했다.

8.15 광복 후 우익 정치인으로 정계에 입문,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군산지부장,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군산지부장, 비상국민회 전라북도 대표의원 등으로 활동하다가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군산에서 당선됐다.

이후 이승만의 요청으로 1948년 8월부터 1949년 6월까지 초대 체신부 장관을 지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가족들과 함께 군산을 떠나 고향 충청남도 서천군으로 피신했으며, 다시 군산으로 반공강연을 했다. 그 뒤 조선인민군이 군산시에 도착할 즈음 일본으로 건너갈 배를 기다리다가 입성한 인민군에 체포, 전주형무소로 옮겨진 뒤 초대 체신부 장관에 임명돼 재직한 것이 밝혀져 1950년 9월 인천 상륙작전으로 후퇴하는 조선인민군에 총살됐다.

※한국 첫 여성경무관 황현숙(1902~1964)

1919년 3· 1운동 때 충남 천안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보안법 위반으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부인신문(1950년 1월24일자)에 따르면 황 선생은 만세운동 직후 공주형무소에서 유관순 열사와 한방에 갇혔고 멜볼딘여학교에서 교사로 재직 중 1929년 광주지역 학생들의 동맹휴학운동의 배후로 지목되자 옥중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해방 후 1945년 9월 조선여자국민당을 창당했고 백범 김구 선생과 이승만 전대통령 등 민족지도자들과 함께 남조선 대한국민대표 민주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특히 마산출신 황 선생은 최초의 여성경무관으로 당시 내무부 치안국 여자경찰과장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김영순(1892~1986)

김영순 독립지사
김영순 독립지사

김영순의 항일투쟁은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활동으로 시작했다.

1892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1914년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뒤 1915년 군산멜볼딘여학교 교사로 있다가 3·1운동 이후 모교인 정신여학교 사감으로 옮겨갔다.

이곳에서 1919년 결성된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는 1919년 9월에 이르러 김마리아· 황애시덕 등을 중심으로 결사부· 적십자부를 새롭게 꾸리는 등 조직을 탈바꿈하였다.

독립운동에 좀 더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이때 김영순은 서기에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그러나 1919년 11월 그 조직이 드러나면서 체포, 1920년 12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태화여자관 교사를 거쳐 정신여학교 사감으로 재직했고, 1927년 근우회 창립에도 힘을 쏟았다.

신간회 창립 및 제1회 집행위원회 활동 이후 김영순의 활동은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지만, 박원희와 함께 교양부를 맡아 여성의 지위향상과 항일독립운동에 힘썼다.

1929년(37세) 애국지사인 이두열과 결혼하여 아들과 딸을 낳았고, 이들을 모두 애국자로 키웠다.

이 과정에서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아 아들의 교육도 제대로 시킬 수가 없었다. 또한 남편 이두열 지사의 감옥생활을 하는 동안 홀로 농사를 지으며 가정을 이끌어가는 억척스러움도 보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편 멜볼딘여학교 교사로 함께 활동하던 이마리아도 김영순 지사와 정신여학교의 동기생으로 애국부인회(군산지부장)과 송죽회 회원 등으로 활동한 것으로 나와있다.

# 멜볼딘여학교의 교사 출신의 방신영(1890~1977)

한국 최초의 요리책인 ‘요리제법’ 저자…우리나라음식 체계화 공헌

우리나라 최초의 요리연구가이자 군산과 인연도 있다.

방신영은 정신여학교 졸업생으로 이순길 지사의 2년 선배로 멜볼딘여학교에서 수년동안 교사로활동했을 뿐 아니라 여성항일단체인 근우회와 조선기독교 청년회 연합회 등에서도 맹렬히 활동한 이력이 있지만 항일운동 기록은 없다.

이종근(새전북신문)기자의 군산인문기행이란 책자에도 방신영 전 교수가 멜볼딘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내용은 나온다. 앞서 정신여학교의 후배 김영순 항일지사가 멜볼딘여학교에 내려오기 전에 군산에서 근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정은섭씨(이순길 항일지사의 외손)의 어머님 생전 기억과도 일치하는 내용이다.

그는 멜볼딘여학교 졸업생 가능성도 있다고 전언하고 있다. 다만 서울출생의 그와 그 가족들이 어떤 경위로 군산에 왔는지는 확인되지 않아 그 진위는 나중으로 미뤄야 할 것 같다.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어머니에게 음식솜씨를 익히고 기독교 정신으로 세워진 정신여학교에 진학한 후 최광옥 교사로부터 본격적으로 조리법을 배웠다.

그는 음식만들기를 좋아했고 그의 어머니가 음식을 만들때마다 옆에서 지켜서서 조리법을 한가지씩 종이에 받아 적는 등 요리를 학문으로 연구하고자 했다.

1910년 정신여고 졸업 후 군산 멜볼딘여학교와 광주 수피아여고 등에서 15년간 교편을 잡는 동안 1913년 어머니로부터 전수받은 한국 요리를 정리해서 한국 최초의 요리책인 ‘요리제법’을 출판했다. 그의 조선요리제법은 최초의 근대식 한국 요리책으로 2017년 5월 등록문화재(제686호)로 지정됐다.

1925년 일본 동경영양요리학원에서 2년동안 본격적으로 요리를 연구한후 귀국해서 그동안 연마한 요리와 영양학을 이화여전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그는 차분한 성격으로 잘들리지 않을 만큼 나지막한 음성으로 강의했으나 항상 창의적이고 건설적이어서 제자와 동료들의 사랑을 받았다.

1929년 이화여전에 가사과가 설치된 후 1952년 정년퇴직할 때까지 20여년동안 미스 모리스(Harriett Morris), 김함나 등과 가정학 교수로 있었다. 당시 모리스는 육아· 서양요리· 영어, 김함나는 실내장식과 주택, 방신영은 한국 요리를 가르쳤다.

1949년에는 이화 가사과 창설자의 한 사람이었던 미스 모리스의 초청으로 미국 캔사스 주립대학에 1년간 유학, 그 비용은 미스 모리스가 미국으로 돌아간후 한국의 방신영에게서 배운 한국요리중 미국인에게 맞는 요리를 골라 ‘조선 요리(The Art of Korea Cooking)’라는 책을 출간하여 얻은 수익금으로 충당해줬다. 또한, 방신영 외에 이 장학금의 혜택으로 다른 이들도 미국 유학에 다녀왔다.

따라서 방신영과 그의 어머니의 요리솜씨는 미스 모리스의 책을 통해 세계 여러 나라 가정의 식탁에 소개된 셈이다. 이 책은 1943년에 초판을 낸후 1981년까지 14판을 내는등 출판 수익금을 적립하여 가정대학 교수와 졸업생의 미국유학 장학금으로 사용되었다.

그는 이화의 가정교육에 힘썼을 뿐 아니라 이화여전에서 정년퇴직한 후에도 요리에 관한 저서를 출간했으며 또한 교회에서 권사로 일하면서 기도와 봉사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1977년 1월 5일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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