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안 記者의 '군산 야구 100년사'] ‘뚝심의 사나이’ 이성일 ①
상태바
[조종안 記者의 '군산 야구 100년사'] ‘뚝심의 사나이’ 이성일 ①
  • 조종안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 승인 2020.12.04 07:55
  • 기사수정 2022-01-14 10: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동국사 가는 길에 내걸린 안내판./사진=군산야구 100년사
동국사 가는 길에 내걸린 안내판./사진=군산야구 100년사

 

전북 군산시 명산동 사거리.

이곳에서 월명산 오르는 길로 접어들면 폐허로 변해가던 골목길을 예술이 숨쉬는 아름다운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동국사 가는 길’이 시작된다.

2012 대한민국 공간문화대상 최우수상을 받으면서 군산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른 공간.

야구의 도시답게 ‘역전의 명수’군산상고를 소개하는 안내판이 걸려 있어 보는 이들에게 추억여행을 떠나게 한다.

 

“1972년 7월 19일 밤"

"제26회 황금사자기 쟁탈 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전이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렸습니다."

"결승 진출팀은 부산고와 군산상고"

"창단 4년의 군산상고는 1회 말 선취점을 뽑았지만,3회 초 1점,8회 초 3점을 내주어 9회 초까지 4-1로 끌려다녔습니다."

"부산고는 마지막 9회 말에서 3점 이상을 허용하지 않으면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패색이 짙던 군산상고는 9회 말 마지막 공격에서 4점을 뽑아 기적과 같은 역전승을 거두었습니다.” 

(아래 줄임)

 

안내문 앞부분이다.

그럼에도 사진은 1986년 4월 27일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제20회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 결승전(군산상고-경남고) 연장 11회 말 군산상고가 극적인 역전승(2-1)을 거두고 감격의 포옹을 하는 장면이어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아무튼,반가운 얼굴들로 ‘역전의 명수’명성을 재현한 뒤 마운드에서 부둥켜안고 있는 등번호 22번 선수가 이성일 포수이고, 이성일 포수를 끌어안고 있는 선수가 조규제 투수이다.

군산상고 시절 초특급 좌완 투수였던 조규제는 연세대와 국가대표를 거쳐 한국프로야구 쌍방울 레이더스, 현대 유니콘스, SK 와이번스, KIA 타이거즈 투수였으며, 현재는 LG 트윈스 투수코치다.

조규제와 배터리를 이루면서 팀의 소금 역할을 했던 포수 이성일(군산상고 야구부 17기).

그는 고교 졸업 후 곧바로 은퇴, 군산대를 졸업하고 (영어법인) 궁전꽃게장 대표이사, 군산시 4대, 5대 시의원을 지냈다.

제9대 도의원을 역임했고,(2014년)지난 6·4지방선거에서 재선에 성공, 제10대 전라북도 도의원(문화관광 건설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오늘은 야구선수 출신으로 드물게 정치인이 된 이성일(47) 도의원을 만났다.

 

곰보빵 마음껏 먹는 재미로 야구에 빠져

인터뷰하는 이성일 도의원./사진 출처=군산야구 100년사
인터뷰하는 이성일 도의원./사진 출처=군산야구 100년사

필승의 신념과 투지가 가장 큰 무기라는 ‘뚝심의 사나이’ 이성일(李成日).

그는 1967년 전북 군산시 고군산군도에 속한 야미도(夜味島)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만 해도 야미도는 망망대해와 돛단배만 보이는 외로운 섬이었다.

할머니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랐고,다섯 살 때 부모를 따라 뭍으로 나왔다.

군산시 신흥동(산동네)에서 자란 그는 1974년 군산초등학교에 입학한다.

 

꼬마 이성일의 꿈은 고교체육교사.

동네 어른들이 ‘커서 뭐가 되고 싶으냐?’고 물으면 거침없이 ‘체육 선생님요!’라고 대답했다.

운동장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군산여상 체육선생의 멋진 트레이닝복 차림에 반했던 것.

급우들이 ‘섬 놈’이라고 놀려 댔으나 뚝심으로 굳세게 버티었다.

그리고 방학 때마다 야미도를 찾았다. 항상 푸근하게 느껴지는 고향집과 친척들,따뜻하게 맞아주는 할머니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야구는 군산초등학교 야구부 김용태 감독님의 권유로 시작했죠."

"옆집에서 셋방을 사시던 김 감독님이,제가 골목에서 친구들과 야구 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아버지에게 ‘공을 던지는 성일이 폼에서 대성할 가능성이 엿보이니 야구를 시켜보시라’고 권해서 4학년 때 글러브를 착용하기 시작했죠."

"아버지는 군산상고를 12회로 졸업하셨고, 야구에도 관심이 많으셨거든요."

"그러니 따지고 보면 저에게 30년 선배가 됩니다." (웃음)

"막상 야구를 시작해서도 매력을 느끼지 못했는데, 지루한 수업도 4시간만 하면 운동장에 나가 놀아도 괜찮았고, 연습을 열심히 하면 먹고 싶었던 곰보빵도 주고···."

"곰보빵 먹는 재미로 야구에 빠지기 시작했죠."

"그때 조화당과 이성당에서 만든 곰보빵, 팥빵 인기가 최고였거든요." (웃음)

"야구에 묘미를 조금씩 터득하면서 연습에 몰두한 결과 전국대회에서 4강에 들기도 했는데요. 그때는 ‘개선장군’이 된 기분이 들더군요.”

초등학교 여름방학 때 고향 야미도에서 동생들과./사진=군산야구 100년사
초등학교 여름방학 때 고향 야미도에서 동생들과./사진=군산야구 100년사

 

이성일 선수의 본래 포지션은 3루수.

그런데 어느 지역대회 경기에서 포수가 상대 팀 선수들에게 자꾸 도루를 허락하자 김용태 감독이 부르더니 ‘안 되겠다' 성일이 네가 한 번 해봐라!’라고 하는 바람에 교체해서 들어간다.

그 후 이성일은 군산상고 졸업 때까지 포수(catcher) 마스크를 쓰게 된다.

 

“제가 다닐 때는 뺑뺑이를 돌려서 중학교에 입학했죠."

"조규제는 군산중학교에 진학해서 만났습니다. 공에 위력이 있고 컨트롤이 정확했죠."

"군산상고 졸업 때까지 배터리를 했는데요, 글러브를 좌우상하 어디로든 움직일 때마다 볼이 정확히 들어왔지요. 구위도 무척 빨랐고요."

"명성이 널리 알려져 브랜드만으로도 다른 팀 타자들이 자신감을 잃었습니다. 미리 겁을 먹고 자신의 평소 스윙을 못 했던 것이죠. 정말이지 당대의 거물 투수였습니다.”

(계속)

※ 등장 인물의 나이와 소속은 2014년 6월 기준임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