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164] ‘충혼의 전설’ 품은 ‘성산면’에 얽힌 에피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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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164] ‘충혼의 전설’ 품은 ‘성산면’에 얽힌 에피소드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6.05.14 12:38
  • 기사수정 2026-05-14 12: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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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면 출신 사실상 모교 설립자로 인한 군산과의 인연
대학 캠퍼스의 추억 … 같은 학과 동기와의 오랜 우정
도내 일간지 J사 시절… 대학 선배 H 전 편집국장의 큰 도움
친우 및 부모님댁과 인연… 17년 2개월만의 ‘군산살이 6개월’

군산은 필자 인생에서 제2의 고향과 같은 공간이다.

군산에서의 시작은 조촌동소재 제일고교에서 비롯됐지만 어떤 의미에서 모교가 된 이곳을 그전에는 거의 알지도 못했던 학교였다.

심지어 이 학교의 위치조차 모르고 상급학교 진학을 노크했다. 익산에서 당시로선 생소한 스쿨버스를 타고 이곳을 찾은 것이다.

모교 입학 후 필자와 군산의 연은 긴 인생 여정에서 청‧장년기를 넘어 30년을 넘어 이어지고 있다. 한마디로 출발점요, 주요 삶터이자 귀착지처럼 말이다. 이 학교와의 만남으로부터 기나긴 군산과의 삶을 연결되는 우연, 아니 필연으로 향하는 인생열차라고 반추할 수밖에 없는 이유일지 모르지만.

1979~ 81년 말까지 총 3년간 고교시절이 군산과 그 이후로 이어질지는 당시로선 상상 밖의 영역이었다. 그것도 성산면 출신의 사실상 모교 설립자와 연계된 학연은 고교 졸업 후 ‘친구- 회사 선배- 긴 군산근무’ 등의 인연을 배태했다고 할 수 있다.

‘성산면 출신’ 고 고판남 세풍그룹 명예회장이 인수, 발전시킨 군산제일고에 다녔다는 것이 이같은 깊은 인연의 씨를 뿌렸는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인생 얘기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대학과 대학원을 마치고, 직장생활 중이던 어느 날 불현듯 제2의 고향인 군산으로 다시 돌아왔다.

고교 졸업한 후 17년 2개월만의 일이었다. 그때가 99년 5월 1일.

그날을 지나 벌써 28년째 항해 중이라니… 오랜 세월이다.

그러면 군산과의 인연 및 의미를 연대기로 풀어야 ‘군산을 걷다’ 시리즈 독자들에게 재미난 일이 아닐까 싶어 필자의 일화를 소개하는 장을 마련했다.

고교 졸업 후 대학캠퍼스에서 만나 순수한 우정(?)을 나누며 대학생활을 함께 한 동기가 있었다. 물론 이성적인 만남이라기보다는 청춘의 시절을 보낸 과(科) 동기였다. 우연한 일이지만 그의 고향이 군산이었단다.

처음에는 우정과 다른 마음들도 교차했었지만 4년 내내 같은 과의 친구로서, 나중에도 그 우정의 틀을 지켜온 동기였다. 직장생활 때도 드물게 만난 적이 있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의 고향이 성산면의 어느 동네였다.

40년 전의 세월만이 추억이란 이름으로 그를 기억할 뿐, 이젠 그의 연락처도 알지 못한 옛날 옛적의 친구로서 말이다. 그 시절은 그런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한 그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젠 중장년이 되었겠지…

우정, 순수한 만남, 추억들만 아로새겨진 그 시절의 아름다움과 청춘을 어떻게 노래해야 멋지고 함축적인 언어로 수놓아질지 모르지만.

또 다시 10여 년을 넘어 군산과의 인연은 언론인으로 첫발을 내딛는 과정에서 조우했다. 그게 우연인지, 필연인지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 시절의 세상은 참으로 혹독했다.

80년대 초반 이후는 군부독재와 싸움이 점점 거세지는 시기였다. 광주민주항쟁과 그에 따른 반독재투쟁 등등이 전국에서 계속됐다. 그땐 아니, 고문치사와 의문사, 공안통치 등의 언어들로 가득했던 암흑의 시대였다.

이 시기를 지났지만 나에게 작은 형극(?)이 찾아왔다. 다른 고통을 받는 이들의 그것과는 비할 바는 아니었겠지만.

구체제의 종언을 알리는 신호탄이 사회 각계로 퍼지면서 민주주의의 승리를 만끽하기 직전의 시기였다.

문제는 여전히 당시의 사회상이었다. 낡은 시스템과 그 잔재들이 어설프게 작동되면서 여전히 우리와 같은 젊은이들의 앞길을 가로막았고 여러 사슬로 우리를 옥죄였다.

수많은 불법과 편법이 횡행하던 시기였다.

신원조회란 이름이 사회의 음습한 굴레로서 작용했고 알지 못하는 이유로 이들의 삶을 가로막던 시기였다.

필자도 진로를 고민하던 시절, 사회 진출을 준비하느라 힘을 쏟아야 했다. 그것도 친구들보다 2년가량 늦어진 바람에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아니 그 집안의 장남으로 미지의 세계를 노크하던 시기였다.

애써 어느 회사에 합격했는데 그곳에서 시위전력을 가늠하는 신원조회를 한다는 것이었다.

다만 문제는 없었지만 시위전력은 넘어야 할 산이었다.

80년 중후반 민주화 투쟁기, 대대적인 학생시위에 필자 역시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87년 연말 대선을 앞두고 그해 말 시위 도중, 경찰에 붙잡혀 조사를 받았다. 최종적으로 기소유예처분을 받았는데 이로 인해 입사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이 사실은 일반에 알려지지 않았으나 대학을 함께 다닌 모기관의 직원(?)이 이를 문제삼았다는 것. 그가 필자를 학창시절부터 아는 것이 문제였다.

이를 회사측에 알려지자 그 회사의 선배 두 분이 두 팔을 걷어붙였다. 당시 은사 한분이 필자의 딱한 사정을 알고 자신의 제자였던 그들에게 부탁했던 것이었다.

오늘날과 같으면 아무런 문제가 될 일은 아니었지만 그 시절은 그렇지 않았다.

다행히 문제는 되지 않았다. 그분들의 노력 덕분에…그런 신원조회도 없었다.

그분들이 J사의 대선배였던 H 전 편집국장이었고, 다른 분은 회사 선배는 A였다. A 선배는 필자가 퇴사할 때까지 아껴주신 그런 분이었다.

성산면이 고향인 H 전 국장은 남자다운 분인데다 과묵했지만 언론민주화에 앞장선 언론인이었고 지역언론발전을 위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노력하던 멋진 선배였다.

그는 회사에서 그만둔 뒤 과감히 다른 길에 뛰어들었는데 정계진출이었다.

정치분야에 도전자들이 많은 도내 대학 정외과 출신이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군산시장 선거에 뛰어들었고 그의 도전은 아쉽게 끝났다.

언론노조 위원장 시절에 고 노무현 대통령(당시 국회의원 낙선)을 노조수련회가 열린 옛 무주리조트로 초청할 정도로 정치적인 식견은 물론 한국정치와 지역발전에 온힘을 쏟은 그런 선배였다.

그의 도전은 과감했고 실패 이후 결단력을 보이면서 다시는 이 분야에 관심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리를 뒀던 분이다.

그 이후 같은 아파트 단지에 지주 뵙기는 했으나 그분의 호의를 갚지 못해 죄송할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분은 큰 형님과도 같았다.

군산에서 근무를 시작할 때, 공직 퇴직 후에 유명을 달리한 M 전 국장에게 인우보증을 할 정도로 멋진 인생의 선배였다.

그는 성산면 대명리 출신이었고 그분의 형님이 현직 근무할 때 만날 정도로 가깝게 지냈다. 하지만 세월이 먼바다로 흘러 오늘에 이르고 있음을 탓할 수밖에 없을 뿐이다.

성산면에는 만줄마을이란 동네가 있는데 시내권에 인접해 있다.

고교 동기이자 대학시절에도 매우 절친이었던 J란 친구가 있다. 그는 장남이었고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 우애가 좋은 친구였다.

그의 부친과 모친은 부지런한 농부였고 맘씨 좋은 부모님이셨다.

처음 그를 제대로 알 땐 고교 시절이 아닌 대학원 시절이었는데 그의 소개로 인생의 도전에 많은 도움을 받았을 뿐 아니라 좋은 사람도 소개해준 그런 벗이었다.

친구 J는 우정도 우정이었지만 늘 노력하는 사람이었고 훌륭한 아내를 뒀다. 게다가 착한 그의 부인 덕에 자녀들도 잘 키운 아버지여서 보통사람에겐 부러운 친구다.

99년 5월 초 친구에게 부탁했더니 기꺼이 그의 집 널찍한 2층 방으로 안내했고 이곳에서 6개월이나 그의 부모님에게 의탁하고 살았다.

아침이나 저녁을 먹을 때도 항상 알뜰살뜰 챙겨주셨고 친절하신 부모님이셨다.

그분들의 고마움을 갚지 못해 염치가 없을 뿐 이다.

이런 인연들이 군산제일고라는 인연에서 비롯됐지만 필자의 삶을 군산과의 인연의 끈으로 이끈 것은 분명하다.

고교를 졸업한 지 어언, 44년의 세월이 지났다. 이제 뭘 남기고 어떤 길을 걸을 것인지만 남았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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