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대표항일운동 우뚝… 3.5만세운동과 버금가는 농민투쟁’
중세 영주와 같은 농장 운영하는 이엽사농장과 맞선 농민항거
서수지역의 자랑이자, 군산정신 및 민족정신의 근간은 누구뭐래도 옥구농민항쟁이다.
옥구농민항쟁은 1927년 8월부터 11월까지 총 7차례에 걸쳐 360만평의 논밭과 1,700여 소작인을 두고 한 해에 1만2,000석을 거둔 이엽사농장에 맞선 옥구소작쟁의를 의미한다.
이 농민항쟁은 3.5만세운동이 한강 이남 최초의 만세운동이란 타이틀을 지녔다면 약 8년 후에 일어났고 항일운동의 규모면 등에서 1920년대를 대표하는 농민들의 소작쟁의로서 의미가 남달랐다.
이는 자타가 공인하는 지역항일민족정신의 근간이라 할 수 있다.[관련 내용 참조는 ‘100년의 기억, 새롭게 보는 옥구농민항쟁’ 이란 2023년 11월 정책세미나(군산근대역사박물관 및 군산역사문화연구소 공동주최), 옥구농민항쟁 유족회의 자료 제공]
당시 조선은 쇠락한 국운을 극복하기 위해 대한제국으로 세계만방에 천명했지만 일제의 집요하고 악랄한 침략정책 때문에 국권침탈이란 나락에 빠졌다.
우리민족은 일제강점기 지배라는 최악의 역사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었고 타의에 의한 식민지배란 암흑 세상에 들어갔다.
당시 전근대적인 농업사회의 조선 백성들이 일제의 직접적인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다. 최고의 곡창지대인 군산의 수탈과 그에 따른 농민들의 어려움은 어느 지역보다 심각했다.
# 식민지사회 모순 심화… 일제, 토지수탈정책로 농촌사회 붕괴
침략정책의 첫 대상은 개항과 함께 군산 등의 조계지를 중심으로 토지수탈정책을 노골화했고 미곡의 주산지인 전북과 군산 등에 집중됐다.
그 방식이 토지조사사업과 소작제도란 틀을 새롭게 짜 조선의 식량 약탈을 위한 수탈구조를 강화한 것이다.
침탈에 나선 일제는 자료 미비나 유휴 토지(농토 등)에 이르기까지 노골적이고 강압적인 수탈정책을 추진했을 뿐 아니라 일본 농민들을 대거 한반도로 이주시켰다.
이에 수탈을 통해 대부분의 토지를 차지한 일인 농장주와 소작농으로 전락한 당시 조선 농민들간의 대립은 격화일로에 놓여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인들의 경쟁적인 전북 진출은 일제침탈이 본격화된 이후 10년간 60개소에 달했고 전남이나 경북, 충남 등 차원이 달랐다.
무거운 소작료 부담에 이어 착취 구조 강화 등은 물론 신사참배와 같은 정신적 통제까지 병행했다.
다른 일인의 농장 대부분도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지만 가장 노골적이고 수탈이 심한 곳은 단연 서수면의 이엽사농장이었다.
식민지 농민사회의 동요와 반발은 시한폭탄과 같은 폭발을 예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옥구농민항쟁의 불꽃… 이엽사농장의 소작쟁의 발단
일제는 초기엔 식량수탈의 전초기지로 삼으려는 옥구지역에 가와사키 농장을 조성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했을 뿐 아니라 농장주가 불법 매입했던 토지를 인계받을 수 있도록 주선한 것으로 보인다,
일인 가와사키는 독농가로서의 부와 명성을 이룬 후에 새롭게 대규모 농장 개간이라는 방식을 통해 키워나갔다. 그의 사후에 가족들은 자신의 고향출신들이 운영하는 이엽사에 그의 농장을 매각했다.
이엽사농장은 기존 농장운영방식과 달리 소작농들에게 고율의 소작료를 수탈하기 위해서 농장 사무원들에게 막강한 권한을 준 뒤 직접적으로 소작인들을 통제하는 체제를 구축했다. 이곳은 일종의 봉건적인 영주처럼 군림했던 농장으로 악명이 높았다.
이 과정에서 이엽사 농장의 지배인과 사무원들의 탈법적인 행위와 전횡이 도를 넘었다. 가혹한 수탈 속에서 생존권을 지키려고 맞선 농민투쟁이 이미 잉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엽사 농장은 1927년 11월 중순 조선인 소작인들에게 75%의 소작료를 현물로 납부하라고 통고했다. 이는 지역소작농들에게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926년 당시 도내 소작료의 경우 ‘대(大)’가 46.7%였고, ‘소(小)’가 42,4%였단다.
이에 지역농민조직인 옥구농민조합 장공욱(장태성) 등 간부들은 농장사무소를 방문, 소작료 45%로 감면해줄 것을 요구했다.
옥구농민조합은 1926년 옥구지역 일본인 농장지대에서 소작농을 하는 농민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이 조합은 일본인 지주들의 폭압에 조직적으로 대항하고자 하는 소작인들의 열망 때문에 만들어진 것.
이에 수차례에 걸쳐 교섭에도 농장측은 철저하게 불응했고 소작인들은 감면이 있을 때까지 납부거부를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일인 농장측의 강경대응으로 소작농들은 소작료 감하운동 등을 결의한 뒤 회의를 마치고 이엽사농장까지 시위행진에 나서면서 본격적인 투쟁의 서막이 열렸다.
*이엽사농장은
1911년 7월 가와사키가 니가타현 자산가인 시라세 등 니가타현 출신들과 함께 당시 전주군 삼례에 핵심지점을 개설한 농업회사다.
처음에는 합명회사로 출발, 1920년 주식회사로 조직을 개편했다. 일본에 본점을 두고 전주에 핵심지점을 둔 뒤 삼례(전주군)와 서수(옥구군), 황등(익산군)에 예하 사무소를 뒀다.
이엽사는 도내에서 구마모토 농장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농장이었고, 세 번째가 시마타니 농장이었다. 이 시기에 전국의 농장주 중에는 1,000정보 이상 소유한 지주는 총 34명이었는데 전북에만 9명에 달했단다. 그만큼 전북의 수탈구조가 극심했다는 얘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