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화요일 오전 6시 36분 군산역을 출발한 열차가 영등포에 도착한 시각은 예정보다 10분쯤 늦은 오전 9시 45분. 김대중 대통령 묘소까지 가는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지하철을 잘못 갈아타는 바람에 얼마나 애가 탔는지 모른다.
김대중 대통령 묘역에 도착하니 숨이 찼다. 숨을 고른 뒤 둘러보니 참배객들 사이로 의자에 앉아 묘역 주위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이희호 여사가 눈에 들어왔다. 외롭고 애처롭게 보였으나, 김대중·이희호 두 부부의 사랑과 믿음이 얼마나 깊었는지 확인시켜 주는 모습이기도 했다.
잘 단장된 봉분에 시선이 멈춘 이 여사 표정은 "나는 아내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아내 없이는 지금 내가 있기 어려웠지만, 현재도 살기 힘들 것 같다. 둘이 건강하게 오래 살도록 매일매일 하느님께 같이 기도한다"는 김대중 대통령의 <마지막 일기> 한 대목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문득 <김대중 옥중서신>에 담긴 스물아홉 통의 편지 제목들이 떠올랐다. 옥중의 남편(김대중)이 쓴 편지는 항상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내에게'로 시작했다. 그런데 아내(이희호)가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도 같아 누가 누구를 더 존경하고 사랑하는지 헷갈렸기 때문이었다. 2005년 어버이날 동교동 자택 방문했을 때도 말했더니 두 분 모두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이 여사가 분향 마치고 쉬는 동안 둘째인 김홍업 전 의원은 꽃을 새것으로 갈아놓고 향로에 향나무 가루를 넣는 등 묘역 이곳저곳을 둘러봤고, 김대중 평화센터 윤철구 사무총장과 여비서는 묘석과 비석을 닦았다.
윤 사무총장은 "이희호 여사께서 매주 묘소를 방문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주변 사람도 함께하게 되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면서 "이 여사를 비롯한 가족들은 매주 토요일 오전에도 묘소를 찾는다"라고 전했다.
강신복(전직 국어교사 51세) 씨가 이희호 여사 앞으로 나오더니 김대중 대통령과의 인연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헌시를 낭독했다. 낭독이 끝나고 박수가 터지자, 누군가가 "대통령님 묘소에서 박수가 나오기는 처음이다"며 농을 건네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이날 참배는 오전 11시 조금 넘어 이희호 여사가 보좌진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를 뜨는 것으로 끝났다. 권노갑, 김옥두, 설훈, 남궁진, 이협, 설훈, 장성민 등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전·현직 국회의원이 여럿 보였으나, 추모시 낭독한 강신복 씨를 만나 그의 얘기를 들어보았다.
-헌시 낭독 감동적이었습니다. 언제 쓴 시(詩)인가요?
"50년 만에 여·야 간 평화적 정권교체에 성공한 김대중 당선자를 위한 축시로 1997년 12월 25일에 썼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어둠 헤친 위대한 승리>라고 붙였습니다. 소제목은 '새날이 동트는 길목에서'이지요."
-이곳(DJ 묘역)에 가끔 들르시나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화요일마다 찾습니다. 여러분이 같이 오시는데, 올 때마다 다짐합니다. '행동하는 양심',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자유가 들꽃처럼 만발하고, 통일의 희망이 무지개처럼 피어오르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김대중 대통령 정신을 이어가겠다고요."
-열정이 대단하십니다. DJ와의 인연은 언제 시작되었는지요?
"국어교사로 재직하던 1987년 10월 25일 전대협 주최 '양 김 대통령 후보 단일화 국민대회(고려대)'에 참석했을 때입니다. 수많은 군중과 함께 '독재타도' 외치면서 종각까지 걸었지요. 그날 김대중 대통령 관련 책자에 이희호 여사가 사인도 해주셨는데, 감동적이어서 지금도 보관하고 있습니다."
-살벌하던 시절에 인연이 시작됐군요. 지금도 기억하는 사건이나 에피소드 있는지요?
"13대(1987년) 대선 개표 때 선거 참관인으로 영등포여고 정문 지키고 있었는데 새벽 2~3시경 트럭을 타고 온 수십 명의 괴청년에게 테러를 당하기도 했고, 다음날 부정 투표함 사수대를 결성하고 구로구청 정문을 밤새도록 지키다 새벽 6시경 최루가스와 함께 백골단에 의해 무차별 진압을 당했던 일 등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돌아가신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과 지금의 이명박 대통령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드는지요?
"이명박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 사돈의 팔촌까지 조사를 벌이면서 도덕적 양심까지 짓밟아 죽음의 길로 내몰았습니다. 김대중 대통령도 노무현 대통령 서거에 충격을 받아 울화병으로 돌아가시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참으로 슬픕니다. 충격도 말할 수 없이 크고요."
강신복 씨는 20년 넘게 간직해 오던 80년~90년대 민주화운동 관련 유인물들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기증하고, 그 자료들을 토대로 책 <6·10 민주항쟁 통일의 그날까지>(비매품)을 냈는데, 이희호 여사에게도 한 권 드리려고 가져왔다고 부연했다. 순간, 김대중 대통령 묘소 참배하러 왔다가 진정한 '행동하는 양심'을 한 분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