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의도 답사일기(1)
이번 하의도 답사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출발 하루 전까지도 포기한 상태였다. "형님이 꼭 참석해야 한다"는 양현(‘후광사랑’카페 회원)님 전화에도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전화 끊으면서도 “내일 아침에 다시 전화하겠으니, 형수님과 한 번 더 상의해 보시라”는 한마디가 가슴을 아리게 했다. 약속 하나 지키지 못하는 나를 탓할 수밖에 없었다.
출발하는 날 아침, 잠자리에서 게으름 피우고 있는데 다시 양현님 전화가 걸려 왔다. 아무래도 가지 못할 것 같으니 잘 다녀오라는 인사 말고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형님이 가셨으면 좋겠는데, 못 가신다면 어쩔 수 없죠!”
안타까워하는 양현님 표정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두 번이나 걸려 온 전화에 미안했던지, 옆에서 듣고 있던 아내가 “못 갈 것도 없지 않으냐!”라고 했다. 예상치 못한 제의였다. 수화기 내려놓으려다가 “자~ 잠깐만, 오늘 갈 수 있겠네!”라고 하자, “그렇죠, 형님이 가셔야죠. 광주 ‘신삿갓’님에게도 연락하겠습니다. 목포로 내려온다고 했으니, 형님이 오신다면 기뻐할 겁니다.”라며 전화를 끊었다.
이틀에 걸친 권유 전화에 나와 아내가 참석한다고 하자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이후 스케줄은 핸드폰으로 연락하기로 했다.
오후 2시, 서툰 운전에 초행길이어서 서울 회원들보다 2시간쯤 먼저 출발했다. 초가을의 오후 햇살이 제법 따가웠고, 쪽빛 창공은 마음의 때를 말끔히 씻겨주는 것 같았다. 몸도 가볍고, 마음도 상쾌했다. 차가 출발하자, 저녁에 만날 회원들의 정겨운 모습이 하나둘 스쳐 갔다.
낙동대교 지나면서 내려다보니 태풍 ‘매미’ 후유증인지 강물은 황토색이었고, 하우스단지는 비닐이 바람에 찢기고 날아가 앙상한 철근만 방치되어 있었다. 내가 사는 아파트도 방충망이 날아가고, 수십 년생 가로수와 정원수가 뽑히는 등 적잖은 피해를 봤다. 하지만, 마음마저 찢겼을 농민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남해고속도로(부산-순천) 달릴 때마다 느끼는 게 있다. 부산-진주 구간은 도로가 자주 막히지만, 진주를 벗어나면 폐쇄된 활주로처럼 썰렁해진다. 대형 컨테이너도 눈에 띄게 줄어든다. 그러한 현상은 영호남 경제 규모의 그래프라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국민의 정부 시절, 영남 지역 공장을 모두 호남으로 옮겨간다며 지역감정 부추기던 못된 군상들과, 그 속에서도 IMF 외환위기를 단기간에 극복해 낸 DJ 모습이 떠올라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포기했던 하의도 답사를 하게 되어 상쾌하게 출발은 했지만, 가슴 한구석은 허전했다. 모임(디제이로드)에서 탈퇴하고 행사에 참석한다는 것도 좀 그랬기 때문이었다. 옵서버 자격으로 참여한다고 자위하며 DJ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도 아내에게 입고 가라 했다.
섬진강에 이르니 지역 화합의 상징인 화개장터, 섬진강 명물로 등장한 지난 7월에 개통된 남도대교 등이 떠올랐다. 달궁, 피아골, 화개골 등 유명한 산마을 계곡을 둘러싼 지리산의 우람한 산세들이 한 폭의 동양화처럼 다가왔다. 승용차 방향이 바뀔 때마다 자연 풍광도 새롭게 바뀌었다.
순천을 지나 ‘주먹 자랑하지 말라’는 벌교를 거쳐 보성, 강진, 영암이 가까워지니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쟁반에 쇳물 부어놓은 것처럼 이글거리는 태양이 기다랗게 엎드린 월출산 능선을 지르밟고 있었다.
산마루에 걸터앉은 태양이 주변 봉우리들의 호위를 받으며 빛을 발하는 광경은 장관이었다. 고개를 푸~욱 숙이고 있는 벼들도 노을에 반사되어 들녘이 온통 붉은 물결이었다. 신령스러운 월출산 봉우리들 사이를 감돌며 빛을 반사하는 구름과 강줄기를 따라 이어지는 계곡의 석양은 한 점의 실루엣 사진을 감상하는 듯했다.
# 하의도 답사일기(2)
날이 어둑해서야 목포 시내로 들어섰다. 7년 전 유달산 조각공원에서 열린 사진 촬영대회 때 다녀간 기억들이 떠올라 사뭇 반가웠다. 도시 야경도 전과는 많이 변해있었다. 네온들이 춤추기 시작한 거리를 지나 건널목을 건너자, 갯내음이 코를 자극했다. 선창가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유의 비린내는 바다가 멀지 않았음을 암시해 주었다.
여객선 터미널에 도착, 차에서 내리니 짭조름한 바닷바람이 피부를 자극했다. 정박해 있는 어선들 갑판에는 수백의 백열등 불빛이 꽃밭을 이루고 있었다. 배 밑바닥을 때리는 철썩이는 파도 소리도 들려왔다. 바닷물에 반사되어 춤추듯 출렁이는 불빛은 밤하늘의 은하수를 연상시켰다. 오랜만에 대하는 선창가 밤 풍경이었다.
주차장에 주차하고 여관을 찾아 나섰다. 모텔 위치를 알면서도 이곳저곳 몇 집을 덧묻고 다녔다. 부산에서 왔다고 하자 사람들은 멀리서 왔다며 친절히 안내해 줬다. 방 계약할 때도 DJ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단체 회원들이 생가 답사 왔음을 강조했다. 대전과 서울 회원들도 곧 도착할 거라고 하자 주인이 환하게 웃으며 1만 원 깎아 주었다.
조금 있으니 서울 회원들이 도착했다. 임진각에서 6·15 남북정상회담 3주년 기념행사 치르고, 석 달 남짓 됐는데도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서로 악수하며 반가워했다. 이왕 늦은 저녁이니 바닷바람도 쐴 겸, 선창가 밤풍경 감상에 나섰다. 서울 회원들 도착 시간에 맞출 요량으로 마음에 드는 횟집을 찾아다녔다.
한참 후 달뜨는곳님 부부와 크리스님 도착했다. 세 회원 인사가 끝나자, 분위기는 더욱 무르익었다. 경비를 아끼기 위해 주인과 타협, 우럭 2kg 주문했다. 회는 여성 회원들에게 양보하고, 대가리(머리) 빼면 먹을 게 없다는 우럭 머리와 내장, 뼈는 찌개를 끓여 술안주로 했다. 양현, 달뜨는곳, 신삿갓님은 세 번째, 크리스님과 기쁨두배님 등은 두 번째 만남이었다.
식사 끝나고 아내(필명: 제자리)와 달뜨는곳님 옆지기, 해피장, 산소, 크리스, 고도리님은 선창가 구경하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사람은 만나는 횟수에 따라 이야깃거리도 많아진다. 만날수록 화제도 풍부해지고 새롭게 마련이다. 그래서 부부도 평생을 같이하는가 보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동안 쌓였던 정담 나눴다. 안주가 떨어져 세발낙지 한 접시 추가했다. 이후 소주를 몇 병 더 마셨는지 모르겠다. 식당을 나오면서 찌개 끓였던 냄비를 보니 국물 한 방울 남아있지 않았다.
1차로 끝날 친구들이 아니었다. 신삿갓님 제의로 모텔 부근 노래방으로 향했다. 맥주로 목을 축이며 각자 숨은 가창력을 발휘했다. 세 곡을 연이어 열창했더니 사흘이 지난, 지금도 목이 컬컬하다. 아침 6시 40분 객선을 타야 함에도 새벽 2시 넘도록 즐기다 신삿갓님은 광주로 돌아갔다. 의미 있는 만남이었고 즐거운 시간이었으며 아쉬운 이별이었다.
# 하의도 답사일기(3)
다음날 일어난 시각은 6시 5분, 오전 6시 40분 출발하는 배였으니, 아침밥은 생각지도 못했다. 허둥지둥 짐 챙겨 여객선터미널로 향했다. 물안개 낮게 깔린 새벽 선창가는 활기가 넘쳐났다. 여객선 터미널은 선창가 옆에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가 이용할 조양페리호는 차량을 10여 대 선적할 수 있는 큰 배였다. 배에 오르는 트럭의 방향을 잡아주느라 선원들의 고성이 오갔다.
배에 올라 객실로 향했다. 첫배여서 그런지 객실은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썰렁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선원에게 물어보니 혀를 끌끌 차면서 애증이 교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DJ가 대통령에 당선되던 해에는 하루 300명 넘는 날도 있었는데, 작년부터 줄기 시작했다는 것. 그는 방문객이 줄어드는 현상을 보며 세월과 권력의 무상함을 실감했다고 덧붙였다.
배는 정시에 출발했다. 오랜만에 찾아온 바다, 드넓은 풍광에 푸~욱 젖고 싶었다. 설레는 가슴을 가누며 3층 선상으로 올라갔다. 2층 통로 지나는데 객실 사이 좁은 공간에서 새어 나오는 구수한 냄새가 발을 멈추게 했다. 손님 서넛이 컵라면 먹고 있었다. 붉은 티 걸친 아주머니 손목이 바쁘게 움직였다. 배도 고팠지만, 대화하고 싶은 마음에 들어가 컵라면 하나 주문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요즘 하의도 찾는 여행객이 얼마나 되는지 물었다. 아주머니는 예전보다 많이 줄었다고 짧게 답하며 한숨 내쉬었다.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는데 50대와 60대로 보이는 건장한 체구 아저씨 세 분이 들어왔다. 아주머니와의 대화에서 선원들임을 알 수 있었다. 배가 항로를 잡자, 아침 먹으러 온 모양이었다.
소나무 껍질처럼 갈라진 손등과 꺼칠꺼칠한 손가락, 니코틴에 찌든 두터운 손톱 등이 밧줄과 싸워온 그들의 승선 경력을 말해주고 있었다.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간단한 인사 주고받은 뒤 질문을 던졌다.
“부산에 사는데 7년 만에 목포를 찾았습니다. 어젯밤 시내 거닐었는데 예전보다 아주 좋아졌더군요. 이곳 분들은 DJ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큰 업적을 쌓아놓고도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그분을 존경하기에 하의도를 찾아가게 되었죠.“
내 고향이 전라도라는 말을 왜, 뺐을까. 경상도에서 왔으니, 대접해 달라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알리기가 싫었다.
“그래도 그 양반이 대통령 되기 전까지는 경기가 그런대로 괜찮었지라... 대통령이 되고 나닝께, 머를 하나 헐라도 넘들 눈치를 봤어야 혔으니, 뭣을 혔것소... 지금 생각허믄 눈치 볼 것도 없었는디... 거기다 아이엠에프다 뭐다 하는 바람에 이렇게 돼부렀잖소.. 석 달, 넉 달씩 월급이 밀리기도 허고, 그 양반 대통령 허는 동안에 회사도 두 번이나 부도가 나부렀소...”
대통령 당선 후에는 지역 차별한다는 눈치 때문에, 오히려 발전이 더뎠다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그는 대통령 임기 동안 회사가 두 번이나 부도났던 정황도 해명했다. 아저씨의 말과 표정에서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소나무 그루터기 같은 거친 손등에는 시련을 견디며 살아온 생의 고단함이 배어있었다. 옆에서 열심히 수저질(젓가락질) 하던 선원이 거들었다.
“죽도록 고생만 헌 그 양반한티 우리가 무슨 욕을 허것소. 말허자믄 여기 사람들은 사랑허는 자식이 미운 짓 혔을 때 나무라는 심정인게라요...ㅠ”
DJ의 업적에 존경과 칭찬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별로 달갑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참으며 살아온 고향 사람들의 한 서린 답변이었다. 30분 정도의 짧은 대화였지만, 외환위기 후유증이 아직도 남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선원 아저씨와 인사하고 3층으로 올라갔다. 회원들은 섬과 바다를 배경으로 기념사진 찍으며 수시로 바뀌는 바다 풍광에 취해있었다. 소녀 같은 해피장님은 수학여행 온 학생처럼 선상 좌우를 오가며 탄성을 질러댔다. 따가운 햇볕을 피해 벽에 의자를 붙이고 앉았다. 시선은 바다를 향했지만, 조금 전 선원들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 하의도 답사일기(4)
바다에는 아직도 아침 안개가 낮게 깔려있었다. 갑판 위에서 맛보는 바다 공기는 맑고 상쾌했다.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따라가다가 선장실 입구 기둥 사이에 매달린 망둥이(망둑어) 무리가 눈에 띄었다. 줄줄이 엮인 망둥이들은 바람의 방향에 따라 춤추고 있었다. 선원들이 낚시로 잡아 해풍에 말리려고 매달아 놓은 모양이었다. 달뜨는곳님은 어젯밤 그렇게 마시고도 술 생각이 나는 모양이었다,
“야! 저것, 망둥어 보니까, 맥주 생각난다!”
애주가다운 한마디였다. 바닷바람에 꾸덕꾸덕 말린 생선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맛을 모른다. 예전 고향동네(군산 째보선창)에서는 “9월 망둥어는 농어하고도 바꾸지 않는다.”, “9월 망둥어는 작은 각시도 모르게 먹는다.”는 말이 유행했을 정도였다. 고급 어종이 흔한 봄이나 여름에는 생선 축에 끼지도 못하지만, 9월에 잡히는 망둥이의 맛이 그만큼 좋다는 뜻이었을 게다.
우리가 탄 배는 자그만 섬과 섬 사이를 잘도 빠져나갔다. 꼭 방문하고 싶은 섬이었고, 몇 년 만에 타보는 배였다. 기관실에서 들려오는 육중한 파열음도, 장중한 오케스트라 연주를 감상하는 기분이었다. 어려서부터 귀에 익은 소리여서 그런지 정겹게 다가왔다. 배 꽁무니에서는 힘차게 돌아가는 스크루에 잔잔했던 바닷물이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흩어졌다, 금방 평온을 되찾았다.
청명한 하늘에는 새털구름이 실개천처럼 기다랗게 깔렸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초가을의 아침 하늘은 비취색으로 변해갔다. 암벽과 해송이 어우러진 무인도들이 나타났다가 수줍은 듯 뒤로 꽁무니를 빼며 사라졌다. 따가운 햇살 아래 시원한 바닷바람 쐬며 선상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그만이었다. 기관실에서 들리는 연주에 박자를 맞추다가 잠시 눈을 감았다.
부족한 잠을 메우려는데, 양현님이, 경치가 그만이라며 감탄하는 바람에 놀라 눈을 떴다. 멀어져 가는 크고 작은 섬들과 간간이 스치고 지나가는 어선들, 먹이를 찾느라 배 주위를 맴돌다 지치는지, 선상 꼭대기에서 휴식 취하고 있는 갈매기들이 파스텔 물감을 뿌려놓은 수채화처럼 보였다.
두 시간쯤 지났을까. 하의도 전경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연화부수(蓮花浮水)라 부르기도 한다는 하의도, DJ 생가는 어떤 모습일까. 누가 어떻게 관리하고 있을까. 주민들은 뭘 하면서 살아갈까. 객지 생활 30년 만에 설레는 마음으로 고향 찾아온 사람처럼 모두가 궁금했다.
외갓집이 섬(전북 부안군 계화도)이어서 그런지 물체 하나하나가 계회도와 비교되면서 상상의 나래에 빠졌다. 특히 문맹률이 80%를 웃돌던 일제강점기(1930년대) 하의도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다가 목포로 이사해 상급학교에 진학한 DJ와 섬에서 유식자로 대접받고 살았다는 외삼촌을 비교해 보기도 했다.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중 두 분이 섬 출신으로 알려진다. 그것도 한 분(김영삼)은 경상도, 한 분(김대중)은 전라도라니 우연치고는 너무 절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다에서 보는 하의도는 만수산에 구름 뫼이듯 수많은 섬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물 위에 연꽃이 떠 있는 모습이라 하여 하의도(荷衣島)라 부르게 됐다고 전한다. 자료에 따르면, 인구는 2천 명 조금 넘고, 섬 지형이 ‘연화만개’ 형태이므로 ‘연꽃 荷’에 구릉들이 낮고 평탄하다 하여 ‘옷 依’를 써 ‘하의도’라 부르게 됐단다. 용곡포구(선착장)에 닻을 내리자, 갈매기들이 날아오더니 원을 그리며 공중 비행을 했다.
# 하의도 답사일기(5)
하선하기 전부터 눈에 띄는 게 있었다. 한자 ‘하의도’가 예서체로 음각된 거북 형상 바위였다. 뽕잎 먹는 누에머리와 기러기 날개 꼬리 닮았다 하여, 물결을 연상시킨다는 ‘잠두안미(蠶頭雁尾)’ 필법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멀리했던 지필묵이 생각나 바위 앞으로 다가갔다. 획의 조화에서 부드러움과 강인함을 느낄 수 있었다.
생가는 DJ가 어린 시절 살았던 가옥 구조물을 재료로 사용했다고 한다. 전언에 따르면 어은리 마을에 살던 주민에게 집을 사들여 후광리에 여섯 칸 가옥(대지 746평, 건평 18평)을 복원했다는 것. 생가 복원에 종친들이 성금을 모았으며, 대구 노인복지대학 노인회에서 120만 원을 모금해 보내오기도 했단다.
선착장에는 우리 일행이 이용할 마을버스 한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버스 기사 아저씨는 운전하면서도 하의도 내력과 DJ에 관해 내려오는 옛이야기를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드넓은 논밭이 섬에 왔다는 생각을 지웠다가도 갑자기 나타나는 바둑판 모양의 염전과 허름한 소금 창고들이 바닷가임을 확인해 주었다.
특이한 것은 바닷가에서 풍기는 특유의 갯내나 비린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문대로 섬에 온 느낌도 들지 않았다. 처음 방문인데도 어색하지도 않았다. 방목해 놓은 소들이 한가롭게 풀 뜯는 목가적인 풍경과 납작 엎드린 형태의 나지막한 구릉들, 그리고 넓게 펼쳐진 들녘이 아늑한 시골 마을을 연상시켰다.
버려진 염전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염전에서는 지금도 재래식으로 천일염을 생산하는 모양이었다. 여름에 왔더라면 수차 돌리는 풍경을 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기사 아저씨는 하의도는 바람과 일조량이 좋아 이 지역 소금(화염) 맛은 전국에서 으뜸으로 친다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의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간장도 맛이 여러 가지이듯, 소금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외식이 흔하고 가공식품을 많이 섭취하는 요즘은 소금의 중요함을 인식하는 사람이 드물다. 갖은양념이 들어간 갈비찜도 소금이 빠진다면 무슨 맛으로 먹겠는가.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일정 부분 소금 역할을 해온 DJ. 그럼에도 사실을 왜곡하고 헐뜯는 무리가 상당수에 이른다. 심지어 왜곡 보도를 일삼는 언론사가 민족지로 평가받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렇게 안타까운 현실을 구경만 할 수 없기에 모인 우리들 아닌가. DJ의 정당한 평가를 정치인이나 언론에만 맡길 게 아니라 우리가 나서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생가 입구에 도착하니 경기도와 경북, 대구의 평화통일 및 사회복지단체, 환경단체 회원들이 노벨평화상 수상을 축하하고, 생가 방문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기념비가 눈에 들어왔다. 먼 곳까지 방문하여 흔적을 남긴, 얼굴도 모르는 분들의 따뜻한 정성이 고맙게 느껴졌다.
시골에 가면 마을에서 농지를 가장 많이 보유했거나 가문이 좋은 부잣집 뒤편은 대부분 대나무밭이 펼쳐진다. DJ 생가 역시 그러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마당과 생가를 에워싼 흙돌담 뒤로 대나무 숲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마당에 들어서니 잔디는 잘 관리되고 있었으나 초라한 화장실과 오래도록 방치된 것으로 보이는 우물이 마음을 언짢게 했다. 가까이 다가가 우물을 내려다보니 내 얼굴과 청명한 가을하늘이 비쳐야 함에도 기름만 둥둥 떠다녔다. 순간, 아쉬움을 넘어 허탈감이 밀려오면서 소중한 보물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우두거니가 되었다.
방을 들여다보니 장판과 벽, 천정의 도배 등이 엉성했다. 요모조모 정성이 담기지 않은 게 느껴졌다. 색 바랜 벽걸이 전자시계가 대통령 친필 휘호에 담긴 의미를 벌레처럼 깎아 먹고 있었다. 작품 대부분 영인본을 표구해 놓은 것이어서 더했는지 모른다. 그나마, 남북 정상이 손을 맞잡은 모습과 세계 정상들과 함께 촬영한 옆방의 사진들이 불만을 감해주었다.
댓돌 위에 올라서니, 앞이 시원하게 펼쳐지면서 답답했던 가슴이 트이는 것 같았다. 멀리, 영글기 시작하는 벼들과 염전의 좁은 둑길 사이로, 모자를 눌러쓴 아저씨 한 분이 걸어가고 있었다. 한가롭고 평화로운 섬마을 정경이었다.
바싹 마른 싸리나무를 묶어 마루기둥에 세워놓아 50~60년대 시골집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부엌으로 통하는 문 옆에는 방방이 없는 다듬잇돌이 외롭게 마루를 지키고 있었다. 퇴색된 마룻바닥은 물기가 말라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흔적을 남기고 싶은 마음에 손때 묻은 방명록에 사인을 했다. 골목 가게 장부만도 못한 낡은 방명록이 가슴을 아프게 했다.
앞마당은 잘 다듬어져 있는데, 사람의 발길이 뜸한 앵두나무 우물가와 장독대 주변은 잡초들이 무릎까지 자라고 있었다. 화장실 역시 바닥에 휴지가 나뒹굴고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마루와 방, 헛간 등은 나름대로 정돈되어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특히 낡아빠진 방명록을 보며 느꼈던 허탈감은 지금도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빡빡한 스케줄에 사진 찍으랴, 생가 들러보랴, 바쁘게 움직였다. 산소님은 기록으로 남길 추억의 영상을 제작하려는지 이곳저곳 다니며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었다. 달뜨는곳님은 선생님의 고향 흙을 담아가야겠다며 봉지를 찾으러 다녔고, 해피장님, 옆자리님, 크리스님은 옛 향수를 불러일으킨다며 장독대, 마구간, 디딜방아 등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회원들은 밖으로 나가고 잠시 마당에 섰다. 고요가 흐르는 생가에서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한(恨)이 흐르는 것 같았고, 자원봉사로 집을 관리한다는 아저씨도 마음을 무겁게 했다. 네모난 돌 두 개만 덩그러니 놓인 화장실 역시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나름대로 가꾸고 단장했다고는 하나 눈요기할 소품이 부족하고, 관리도 허술해 아쉬움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 하의도 답사일기(6)
하루 스케줄을 페리호 출항 시각(오후 1시 30분)에 맞추다 보니 다른 명소는 들르지 못했다. 생가 대문을 나서는 회원들 역시 아쉬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전직 대통령 생가 시설들이 친일 작가의 문학 기념관만도 못하다니, 정확히는 모르지만, 어딘가 잘못된 것만은 분명했다.
집에 와서야, 자원봉사로 집을 지키고 있는 아저씨에게 막걸릿값을 주었다는 말을 아내에게 들었다. DJ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인정이 어디로 가겠는가.
누군가가 선생님이 다니던 초등학교는 들러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제의했고, 다들 그렇게 하자고 동의했다. 우리를 태우고 갈 마을버스 기다리는데 해피장님이 걸어가자고 했다. 회원들은 그 제의를 받아들여 배고픈 것도 잊고 한참을 걸었다.
건너편 논밭 사이로 자그만 농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농가들 뒤로는 야트막한 산등성이들이 기다랗게 어깨동무하고 있어 한적한 시골 마을로 나들이 나온 기분이 들었다.
고향 찾아온 귀성객이 과거를 회상하듯 잠시 추억에 잠겼다. DJ 철부지 시절을 상상하며 걷고 있는데 버스가 도착했다. DJ가 3학년까지 다녔다는 하의초등학교는 섬에 있는 학교로 믿어지지 않게 잔디운동장과 건물이 깔끔했고 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빼앗긴 농토를 되찾기 위한 농민 항쟁이 이어지던 일제강점기 학교에 다니셨다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묘했다. 도시에서도 고무신 신은 학생을 보기 어렵던 시절이었으니, 머리는 까까머리였을 것이고, 무명옷에 고무신이나 신고 다녔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교문 입구의 파란 철판에 ‘제목: 인동초 정신’ 옳은 일을 위해 진취적 기상과 불굴의 신념으로 어떠한 고난도 끈질기게 극복해 가는 정신이라 쓰여 있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선배의 삶과 정신을 배우고 실천해 가는 어린 후배들의 해맑은 모습이 그려졌다.
교문 안으로 들어섰다. 일요일이라서 그런지 교정이 무척 한적했다. 본관 건물 주변은 적막이 감돌았다. 해마다 입학생 숫자가 줄어드는 것은 여느 시골 학교나 다를 게 없었다. 한가롭게 휴식 취하는 사람 하나 없는 등나무 그늘과 잔디운동장이 외롭고 쓸쓸하게 보였다.
11시 넘어서야 기사가 안내하는 식당으로 이동했다. 좁은 계단을 올라 안으로 들어서니 할머니 한 분이 금방 잡아 온 중하(중간크기 새우)를 다듬고 있었다. 컵라면 먹어서인지 허기는 느껴지지 않았으나 새콤달콤한 양념 냄새가 입맛을 유혹했다. 주방에서 새어 나오는 구수한 미역 향기는 침샘을 자극했다.
중하를 넣고 끓인 미역 국물은 담백하고 시원했다. 풍성한 밑반찬 중 깻잎장아찌가 가장 개운했고, 인기도 제일 좋았다. 얼마 전 태풍 ‘매미’로 얼마나 피해봤는지 궁금했는데, 할머니는 주위에 크고 작은 섬들이 둘러싸고 있어 원만한 태풍에는 끄떡없다고 했다. 고향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이 느껴지는 대답이었다.
페리호 출항 시각이 한참 남아있었다. 지긋이 눈 감고 있는 해피장님, 선착장을 둘러보러 나간 기쁨님, 부부 둘이만 사이좋게 산책하러 나간 달님과 옆자리님, 피곤했는지 편한 자세로 쉬고 있는 산소님과 크리스님···, 시계는 12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루함을 달래야 할 것 같기에 시골 장터 약장수처럼 이왈저왈 ‘썰(story)’을 풀어댔다.
오후 1시 30분, 페리호는 목포를 향해 출발했다. 승객들과 차량수가 적어 들어올 때보다 한산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해피장님이 배가 하의도로 회항하고 있다고 소리쳤다. 다들 농담으로 알고 웃었는데 사실이었다. 출항 시각을 착각했는지 승객들을 태우러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늦으면 늦었지 정시보다 빨리 출발하는 배나 기차를 타 본 경험이 없었던 터라, 대통령님을 조금 더 생각할 기회를 내려주는 하늘의 계시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 재미있어하는 표정들이었다. 멀미 잘하는 아내도 배에서 더 즐길 수 있으니 좋다며 웃고 즐겼다.
한 시간 가까이 배를 더 탔지만 지루함을 느끼지 못했다. 멀미난다는 사람도 없었다. 가보고 싶은 곳들을 둘러보지 못한 아쉬움을 주고받다 보니 목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크리스님이 기념으로 배표를 가져가고 싶다고 했다. 그의 말을 흘려들을 수 없어, 검표원 아저씨와 실경이 끝에 아내와 내 표를 가져와 한 장은 크리스님에게 건네줬다.
육지에 발을 내려놓자 시원섭섭했다. 모두 아쉬움이 컸는지, 한 번 더 와보고 싶다고 했다. 모텔로 돌아가 짐을 챙겨 목포상고(현 목상고등학교)로 방향을 잡았다. 목포상고는 DJ 모교로 물어물어 어렵게 도착했다. 정문에서부터 대통령님 온기가 느껴졌다. 교문 옆 바위에 새겨진 ‘대통령 출신 고교’ 문구가 마음을 숙연하게 했다.
운동장에 들어서니 탁 트인 잔디운동장이 눈에 들어왔다. 넓은 잔디운동장이 내려다보이는 본관 건물은 아늑하면서도 위용이 있어 보였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을 해서체로 음각해 놓은 DJ 기념석이 건물을 호위대장처럼 지키고 있었다.
테니스코트에서는 학생들로 보이는 청년들이 족구를, 농구장에서는 농구를 하고 있었다. 반공교육과 교련으로 시간을 허비하던 학창 시절이 떠오르면서 휴일을 마음껏 즐기는 DJ의 어린 후배들이 부러웠다.
자그만 잔디공원처럼 느껴지는 운동장. 한 아낙이 잔디공원 한편에서 아이들과 함께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옆에 도시락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가족 나들이 나온 모양이었다.
강당 건물 벽에는, 전남 초중고생들의 서예 휘호대회 알리는 현수막이 내걸려있었다. 예도(藝道)와 예술(藝術)의 도시 속에 자리한 학교임을 상징하는 현수막이었다.
DJ의 흔적 느껴지는 교정 둘러본 뒤 시내로 나왔다. 저녁은 불고기와 매운탕으로 해결했다. 식사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땅거미가 깔리고 있었다. 하룻밤, 한나절을 함께 했던 우리는 다음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기쁨과 실망이 교차했으나 의미 있는 답사였다. 특히 페리호 선원들과 섬 주민들과의 대화는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목포와 부산은 서해와 동해를 가르는 동서의 끝이며 400km가 넘는 거리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으나 두 지역의 섬 출신 정치인들이 차례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차에 오르자, 오래전부터 마음에 담아 온 화이부동(和而不同) 정신이 떠오르면서 언제 기회 되면 경남 거제도에 있는 김영삼 전 대통령 생가도 방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발 때부터 계획했던 영광 방문은 다음으로 미루고 시내를 빠져나오는데, 색색의 네온 불빛이 거리에 수를 놓기 시작했다. 부산으로 방향을 잡는 순간, ‘동서화합’ 네 글자가 떠오르면서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은 야경이 아내의 안전 운행을 기원하는 불꽃쇼처럼 느껴졌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