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구서수농민항쟁 上] 일제식민지 수탈 맞선 전국최대 ‘소작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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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구서수농민항쟁 上] 일제식민지 수탈 맞선 전국최대 ‘소작 투쟁’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3.11.30 10:08
  • 기사수정 2023-11-30 10: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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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건영주식’ 이엽사 농장의 악명높은 소작료 수탈로 농민반발 고조
이용휴 선생과 김영준 및 영현 형제· 박상호· 장태성 등 핵심인물 앞장
3.1운동에 이은 지역 ‘항일운동’ 우뚝… 1920년대 대표하는 농민항쟁
임피중 교정에 있는 옥구농민항쟁기념비. / 사진=군산시 제공

군산을 대표하는 일제강점기의 지역항일운동은 3.1만세운동(1919년 3.5만세운동))과 옥구서수농민항쟁(1927년· 이하 옥구농민항쟁).

군산3.1만세운동이 한강이남 최초의 만세운동이란 타이틀을 지녔다면 약 8년만에 일어난 옥구농민항쟁은 항일운동의 규모면 등에서 1920년대를 대표하는 농민들의 소작쟁의로서 의미가 남다를 뿐 아니라 군산정신의 근간이기도 하다.

얼마 전(18일)에 ‘100년의 기억, 새롭게 보는 옥구농민항쟁’ 이란 정책세미나(군산근대역사박물관 및 군산역사문화연구소 공동주최)가 열렸지만 참석하지 못해 아쉬웠는데 최근 관련 책자를 수소문 끝에 얻었다.

‘농민항쟁 96년’을 맞아 정리한 이 책자에는 우둔한 필자에게는 재미난 자료들이 가득했다.

이에 오랫동안 군산에서 활동해온 필자의 무지함에 발표자(구희진 군산대 교수) 여러분들에게 지면을 통해 양해를 구하고 이 자료들을 세차례(상, 중. 하)에 걸쳐 요약, 정리하는 장을 마련했다.

이에 본란에선 △ 옥구농민항쟁의 발단이 된 이엽사 농장의 악독한 수탈행위와 이엽사 농장의 성격을 먼저 다루는 한편 △ 옥구농민항쟁의 중심 인물들과 농민항쟁 역할(또는 활동) △ 이념적인 토대가 됐던 농민야학을 했던 안채 등 주요 유적지 현황 및 향후 과제 등의 순으로 언급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대한제국은 근대자주국가로서 세계 만방에 천명했지만 일제의 집요하고 악랄한 침략정책의 일환으로 추진하는 국권침탈이란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조선은 일제강점기 지배라는 최악의 역사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었고 타의에 의한 식민지배란 암흑 세상에 들어갔다.

당시 전근대적인 농업사회의 조선 백성들이 일제의 직접적인 표적이 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다. 최고의 평양지대인 군산의 수탈과 그에 따른 희생은 어느 지역보다 극심했다.

# 식민지 지배 모순 심화… 일제, 토지조사사업 통해 대부분 농토 차지

침략정책의 첫 대상은 개항과 함께 군산 등의 조계지를 중심으로 토지수탈정책을 노골화했고 미곡의 주산지인 전북과 군산 등 전국에 집중됐다.

그 방식이 토지조사사업과 소작제도란 틀을 새로 만들어 식량의 약탈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강화한 것이다.

일제는 자료 미비나 애매한 내용의 토지들을 대상으로 합법을 가장한 수탈정책을 추진하면서 일본 농장주들의 한반도 진출이 본격화됐고 극심한 소작제도의 부작용을 초래했다.

이에 따른 대부분의 토지를 차지한 일인 농장주와 소작농간 소작료 문제를 놓고 첨예한 대립과 분쟁 격화는 예고된 사태였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인 농장주들의 경쟁적인 전북 진출은 일제침탈이 본격화된 이후 10년간 60개소에 달했고 전남이나 경북, 충남 등 다른 지역과 비교도 안될 정도였다. 무거운 소작료 부담에 이어 착취를 위한 제도 정비 등은 물론 신사참배와 같은 정신적 통제까지 강화했다.

다른 일인의 농장들도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지만 가장 노골적이고 수탈이 심한 곳은 이엽사농장이었다.

왜 이엽사 농장에서 소작쟁의가 촉발됐을까.

# 이엽사 농장의 소작쟁의 발단과 원인

일제는 초기엔 식량수탈의 전초기지로 삼으려는 옥구지역에 가와사키 농장을 조성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했을 뿐 아니라 농장주가 불법 매입했던 토지를 인계받을 수 있수 있도록 주선한 것으로 보인다,

가와사키는 독농가로서의 부와 명성을 이룬 후에 강압적인 방식을 동원하며 농장 규모를 키워나갔다. 그의 사후에 가족들은 자신의 고향출신들이 운영하는 이엽사에 이 농장을 판 것.

이엽사농장은 기존 농장운영방식과 달리 소작농들에게 고율의 소작료를 수탈하기 위해서 농장 사무원들에게 막강한 권한을 준 뒤 직접적으로 소작인들을 통제하는 체제를 구축했다. 일종의 봉건적인 영주와 같이 군림했던 곳으로 악명이 높았다.

이 과정에서 이엽사 농장의 지배인과 사무원들의 탈법적인 행위와 전횡이 도를 넘었다. 가혹한 수탈 속에서 생존권을 지키려고 맞선 농민 투쟁의 서막이 이미 잉태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엽사 농장은 1927년 11월 중순 조선인 소작인들에게 75%의 소작료를 현물로 납부하라고 통고했다. 이는 지역소작농들에게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926년 당시 도내의 경우 ‘대’가 46.7%였고, ‘소’가 42,4%였다.

이에 지역농민조직인 옥구농민조합 장공욱(장태성) 등 간부들은 농장사무소를 방문, 소작료 45%로 감면해줄 것을 요구했다. 옥구농민조합은 1926년 옥구지역 일본인 농장지대에서 소작농을 하는 농민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이는 일본인 지주들의 폭압에 조직적으로 대항하고자 하는 소작인들의 열망 때문에 만들어진 것.

이에 수차례에 걸쳐 교섭에도 농장측은 철저하게 불응했고 소작인들은 감면이 있을 때까지 납부거부를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농장측의 강경대응으로 소작농들은 소작료 감하운동 등을 결의한 뒤 회의를 마치고 이엽사농장까지 시위행진에 나서면서 본격적인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한편 이엽사 농장은 1911년 7월 가와사키가 니가타현 자산가인 시라세 등 니가타현 출신들이 함께 당시 전주군 삼례에 핵심지점을 개설한 농업회사다.

처음에는 합명회사로 출발, 1920년 주식회사로 조직을 개편했다. 일본에 본점을 두고 전주에 핵심 지점을 둔 뒤 삼례(전주군)와 서수(옥구군), 황등(익산군)에 예하 사무소를 뒀다.

이엽사는 도내에서 구마모토 농장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농장이었고, 세 번째가 시마타니 농장이었다. 이 시기에 전국의 농장주 중에는 1,000정보 이상 소유한 지주는 총 34명이었는데 전북에만 9명에 달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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