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3.1 만세운동 재조명 下] 임피, 지역항일운동 중심지 역할
상태바
[군산 3.1 만세운동 재조명 下] 임피, 지역항일운동 중심지 역할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4.02.29 16:04
  • 기사수정 2024-02-29 16: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항일의 고장’ 임피만세 앞장… 진창권· 황봉규· 김홍렬· 김석종· 최한풍
독립선언서 전북지역 배포 루트…기독교 김병수 vs 천도교 계열 전파
경성고보 진장권- 천도교인 김홍렬 지사 등 핵심라인 만세운동 전개
임피 만세운동일은 내용별 다소 차이 있어 혼란 초래
군산 3.1운동 100주년 기념관
군산 3.1운동 100주년 기념관

1997년 군산문화원이 발행한 <일제하 군산·옥구지역의 민족·사회운동사>에 따르면 1919년 3월 4일 임피 장터에서 읍내가 들썩할 정도로 큰 시위가 있었다.

옥구 주민들은 일제가 조선 강제병합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일한병합기념비’에 쇠똥을 바르고 길바닥에 ‘독립만세’를 크게 새기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저항하였다.

임피지역 3.1만세운동의 흐름은 오늘날의 시내권 중심 3.5만세운동과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일제하 군산·옥구지역의 민족·사회운동사> 제2부의 ‘임피시장(임피장터) 만세시위’ 대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이다.(군산시사와 조종안 기자의 오마이뉴스에 게재된 ‘잘 알려지지 않았던 군산의 삼일만세운동’ 기사 참조)

천도교의 인종익과 기독교의 이갑성이 지역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면서 전북지역의 3·1운동이 본격화된다.

그동안 중심적인 군산만세운동의 흐름은 기독교적인 측면에서 주로 다뤄졌다.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 김병수 선생이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갑성(李甲成)으로부터 독립선언서 200장을 건네받은 것이었다. 그는 군산으로 내려와 영명학교 은사인 이두열, 박연세, 김수영, 고석주, 김윤실 등을 만나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인쇄해서 도내 만세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이다.

하지만 이 못지 않게 엄청난 역할을 한 것은 천도교였다.

동학의 고장답게 전북지역에서 천도교는 만세운동에 많은 영향력을 미친다.

경성부 천도교구의 보성사 인쇄소 사무원이었던 인종익(印宗益)이 그해 2월 28일 서울 보성사에서 인쇄된 독립선언서 약 2,000장을 가지고 내려와 익산(당시 이리)에서 이중달(李仲達)에게 일부를 전했고 나머지는 천도교 조직망을 통해 전주, 김제, 이리, 금마, 용안, 여산, 함열 등으로 나눠줬다.

임피만세운동은 천도교 조직망에 의해 들여온 독립선언서라는 점에서 시내권과 다소 흐름이라는 얘기다.

3월5일 군산, 3월6일 김제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어 도내에 일제히 파급됐다는 것이다.

임피읍내(임피장터) 제1차 만세 시위는 주민과 주동자 숫자가 적어 큰 규모로 발전할 수 없었지만, 읍내가 들썩할 정도의 운동이었다.

임피 장터 시위는 여러 문헌과 자료, 언론 보도 등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3월29일(3월 4일설, 또는 3월6일설 등)이 비교적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그전에 움직임은 있었을 수 있지만 표면된 것은 군산의 핵심만세운동인 구암동산과 서래장터의 3월5일이여서 그 이전으로 특정한다는 것은 다소 무리가 따른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임피장터 만세시위는 진장권(陳壯權), 황봉규(黃琫奎), 김홍렬(金洪烈), 김석종(金錫宗), 최한풍(崔翰豊) 등 다섯 사람이 주도했다.

당시 진장권은 경성고보 재학 중이었고, 김홍열은 천도교 지도자 의암 손병희 선생의 지시를 받아 2월 28일 독립선언문 3,000매를 평안도에 전달하는 중책을 완수하고 고향에 내려와 있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다섯 사람은 태극기와 선언문을 가지고 김석종 집에 집결하여 29일 정오를 기해 의거할 준비를 하다가 정보가 누설되어 경찰들에게 체포됐다.

그들이 끌려가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주변 사람들이 일제히 동참했다. 당황한 일본 경찰은 공중에 총을 난사하고 그들을 구타하여 꼼짝 못하게 했다.

사전 연락을 받고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대기하고 있던 청년들은 일시 흩어졌지만, 재집결하여 만세시위를 계속하였다. 이때 장터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합세, 한 덩어리가 되어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다섯 사람은 임피에서 군산경찰서로 이송되었고, 심한 고문에 시달린 후 기소됐다.

그해 4월 28일 광주지법 군산지원에서 진장권은 징역 1년, 김홍렬· 김석종은 징역 8개월, 황봉규· 최한풍은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이들은 항소하여 1919년 6월 2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진장권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나머지 네 명은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다섯 사람 중 진장권과 김홍렬 항일지사는 1990년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어 애국장을 받았고 나중에 최한풍 지사는 2021년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임피만세운동의 주역들

진장권은 1919년 3월 1일 경성고등 보통학교 1학년 재학중 서울 탑골 공원에서 독립 만세 시위에 참가했고, 옥구로 귀향하여 김홍렬· 최한풍· 김석종 등과 함께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태극기 200본을 제작하는 등 시위 운동을 준비하였으나 일본 경찰에게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됐다. 그후 1924년 9월 23일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산하 인성학교의 교사로 초빙되어 교민 자녀의 교육과 독립운동에 진력했고, 1933년 3월에는 중국 군관 학교 간부로 항일 투쟁에 힘썼다.

김홍렬은 일제강점기 옥구군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1919년 3 · 1운동 당시 천도교 중앙연락요원으로 독립선언서를 평안도 일대에 배포하는 책임을 맡았다. 서울 만세시위에 참가한 뒤, 고향인 옥구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4년 비밀결사 삼성구락부를 결성하여 항일운동을 계속하다가 체포된 뒤, 고문의 후유증으로 순국했다.

최한풍 지사는 2021년 11월 18일 제82회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정부는 유족들에게 포상을 전수했다. 옛 옥구군에서 태어난 최 지사는 1919년 3월 25일 진장권 등과 함께 임피시장에서 조선독립만세 시위를 하기로 결의하고 동월 28일 태극기를 만드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체포돼 고초를 겪었다.

천도교 보성사는… 3·1운동 때 발포된 독립선언서의 인쇄

당시 천도교에서는 중앙교당에 창신사(彰新社)를 설립하고 천도교관계 서적 및 교회기관지인 천도교월보(天道敎月報)를 간행했다. 1910년 말 천도교에서 보성학원(普成學院)의 경영권을 일체 인수하면서 따라 동교(同校)에 속해 있던 보성사인쇄소를 창신사와 병합하고 그 명칭을 그대로 ‘보성사’라 했다.

이 보성사는 최남선(崔南善)이 설립한 광문회(光文會)의 신문관(新文館)과 더불어 당시 인쇄계를 주도했다. 보성사는 비단 천도교월보나 교회서적 및 학교교과서의 인쇄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한국출판문화 향상에도 크게 공헌했다. 그러나 한때 보성사의 적자가 누적되자 친도교 교회간부는 의암 손병희(孫秉熙) 선생에게 보성사의 폐쇄를 건의한 적도 있었다.

보성사의 업적 중 가장 큰 것은 1919년 3·1운동 때 발포된 독립선언서의 인쇄였다.

1919년 2월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가 신문관에서 조판된 뒤 보성사로 넘겨졌다. 그달 27일 사장 이종일(李鍾一)은 공장감독 김홍규(金弘奎), 총무 장효근(張孝根)과 같이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 극비리에 인쇄를 완료했다.

총 2만 1,000매의 선언서를 성공적으로 인쇄한 후 이종일의 집에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이 선언서를 28일 각지에 보냄으로써 3월 1일 독립선언식을 거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