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3.1만세운동 재조명 上] 노춘만 등 ‘대야 천도교인들’의 항일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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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3.1만세운동 재조명 上] 노춘만 등 ‘대야 천도교인들’의 항일 투쟁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4.02.28 10:41
  • 기사수정 2024-02-28 10: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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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야항일투쟁… 노춘만 지사 등 지역 천도교인 중심 만세운동 참여
대야지역 천도교인들 상해임정 지지결사· 헌금운동 등 항일운동 전개
영명학교 교사· 학생 등 기독교 중심의 군산만세운동과 별개의 흐름
군산 3.1운동 100주년 기념관앞에서 한강 이남 최초의 독립만세운동인 군산 3.5만세운동을 떠올리며./사진=전세환
군산 3.1운동 100주년 기념관앞에서 한강 이남 최초의 독립만세운동인 군산 3.5만세운동을 떠올리며./사진=전세환

올해로 105주년 맞은 군산3.1만세운동.

군산만세운동은 한강이남 최초로 일어난 의거란 점에서 매우 비중있게 각종 논의와 언론보도의 중심에 섰다. 이런 맥락에서 그동안 기독교계열 학교의 학생 및 교사 등을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다뤄져 왔다.

이런 흐름 때문이었을까.

군산만세운동은 오랜동안 상대적으로 소외됐거나 아쉽게도 논의에서 다소 벗어난 또다른 주체세력을 재조명해야 할 때라는 세간의 여론도 적지 않았다.

이에 105주년을 맞은 군산만세운동은 더 늦기전에 과거와 다른 새로운 접근이나 소외된 주체들을 재발굴, 재조명을 서둘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바로 그것이다.

하나의 지역만세운동이지만 그동안 시내권과 달리 대야와 임피지역의 항일운동은 주도적으로 다뤄지기보다는 제대로 언급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곁가지처럼 접근되어온 것도 사실이다.

오랫동안 소외된 세력 중 하나가 천도교인들이다.

이에 <투데이군산>은 대야의 항일운동과 임피장날의 만세운동을 두 차례(상,하)에 걸쳐 다루고자 한다.(2000년 제작된 군산시사· 오마이뉴스에 게재된 ‘잘 알려지지 않았던 군산의 삼일만세운동(조종안 기자)’ 기사 등 참조)

# 한강이남 최초의 도화선 ‘군산3.1만세운동’

군산 3.1만세운동의 핵심내용은 이렇다.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입소문을 통해 전국으로 급격하게 퍼져 나갔다. 군산의 3·5만세운동은 당시 궁멀(구암동)에 있던 기독교 계열의 학교인 영명학교 졸업생으로 세브란스 의학전문 학생이었던 김병수가 2월 28일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인 이갑성 선생에게서 독립선언서 200장을 영명학교 교사 이두열, 박연세, 송현호, 고석주, 김수영 등에게 전했다.

영명학교 교사와 학생들은 학교 기숙사에서 독립선언서를 복사하고 태극기를 그리며 거사를 준비했다가 거사 직전에 발각, 핵심 교사들이 일경에 붙잡혀가면서 도화선이 된 것이 3.5만세 운동의 핵심내용.

이후 군산은 3월에서 5월까지 시위 28회, 참여인원 3만1,500명, 사망 53명, 부상 72명, 투옥 195명의 희생을 치르면서 전북만세운동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군산의 3·1운동은 3월5일 시내권에서 시작된 뒤 외곽인 대야(지경), 임피, 옥구 등지로 점차 확산됐다. 이런 흐름의 밑거름은 과거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활동 전통과 동학농민운동이었다 할 수 있다.

# ‘군산동학세 중심’ 대야항일운동…천도교인들 중심

대야는 익산과 김제지역을 연결하는 지역적 특성상 다른 지역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 독립만세운동 등 항일운동에 직간접적으로 뛰어든 이들이 적지 않다. 일부는 기독교계열과 다른 종교 지도자들의 민족과 국가에 헌신한 인사들의 수가 만만치 않다.

대야만세운동의 구체적인 날짜는 나와있지 않다. 세를 형성하기에 앞서 일경의 감시 때문에 규모가 큰 만세운동으로 확산하는데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대야출신 기독교 계열 항일투사들의 활약도 엄청났지만 과거 여러차례에 걸친 일반적인 독립운동의 흐름에서 논의된 만큼 제외됐음을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대야에서는 노춘만(盧春滿) 애국지사가 천도교 교인들과 함께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독립사상을 고취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4월 17일 대구 복심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물법 위반으로 징역 8개월 실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사통팔달의 대야는 당시 군산지역의 천도교 중심지였다.

장경화(張景化)가 1893년 동학 대접주로 활약했고 동학농민운동(1894) 시기에 허공집· 김현창 등이 천도교(동학)에 입교, 핵심역할을 했다.

또, 이후 많은 주민이 입교하여 교세 확장에 나섰다. 천도교 옥구지구가 1917년 지경리 우덕실(우덕마을)에 설치됐고, 노춘만· 김유종· 최공훈· 양문옥 등 천도교인들이 독립운동을 전개했었다.

노춘만 지사는 조선독립사상을 고취시켰을 뿐 아니라 상해임정 가맹 및 지지와 상해임정 헌금운동 등을 적극 전개했다. 1919년 4월 대구복심법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의 실형을 받았다.

이에 노 지사는 1919년 3·1 독립운동 당시 박영진· 이중열· 정대원 등의 천도교인들과 함께 익산군의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만세 시위를 익산군(현 익산시) 전체 지역으로 확산시키는데 기여했다. 

1919년 4월에는 옥구군(현 군산시) 내에서 이유상·강성원 등과 함께 지경면· 회현면· 대야면 등 여러 곳에서 선언서를 배포하고 독립 사상을 고취하면서 활동하다가 1919년 4월 17일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고 투옥됐다.

1921년 음력 3월 하순에는 임정 요원 신정산의 권유로 임시 정부에 가맹자금 100원을 출자하였으며 김유중을 권유하여 가입시킨 후 자금 40원을 받아 신정산에게 전달했다. 또한 1921년 11월에서 12월 사이에는 전령준 외에 23명을 임시 정부에 가입시키고 운동 자금 2,410원을 조달했다.

한편 노춘만 지사는 대통령 표창(1977), 건국훈장 애족장(1990년)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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