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안의 群山學 3강] 궁멀에서 서래장터까지(구암·내흥·조촌·경암동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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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안의 群山學 3강] 궁멀에서 서래장터까지(구암·내흥·조촌·경암동 일대)
  • 조종안 시민기자
  • 승인 2022.08.31 07:43
  • 기사수정 2022-09-02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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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신문물 도래지 '구암동'의 어제와 오늘

군산시 경포천 입구에서 바라본 구암동산(2007년 6월 촬영)/사진=조종안 기자 제공
군산시 경포천 입구에서 바라본 구암동산(2007년 6월 촬영)/사진=조종안 기자 제공

군산시 경포천 입구에서 바라본 구암산(구암동산) 전경이다.

천 리를 흘러온 금강이 잠시 숨을 고르는 위치에 자리한 구암동산은 1899년 12월 서양 선교사들이 개설한 군산선교스테이션 터다. 이곳은 호남 기독교의 메카이자 신문물 도래지이며 민족교육의 요람으로 알려진다. 2003년 현충 시설로 지정됐으며 '한강 이남 최초 3·1운동 발상지' 상징탑이 세워져 있다.

구암동산 성역화 사업이 시작되던 해(2007) 모습으로 오른쪽 아파트단지는 1902년 전킨 선교사가 설립한 영명학교(현 제일중·고)와 군산예수병원(구암병원) 자리이고, 하늘을 향해 뾰쪽하게 솟은 호남선교 기념예배당 건물 자리에 구암병원 숙소가 있었다. 왼쪽(해안가) 동산 아래에 설치된 수문은 구암천 입구이자 전도선(돛단배)이 정박하는 포구였다.

군산선교스테이션에는 궁멀교회(구암교회), 성경학교, 군산예수병원(원명은 '프랜시스 브리지 앳킨슨 기념병원'이나 '구암병원'으로 더 알려짐), 병원숙소, 영명학교, 멜볼딘여학교, 안락소학교, 기숙사, 도서관 그리고 선교사 사택도 여러 채 있었다. 금강이 굽어보이는 자리에 전킨 선교사 가족묘가 있었으며 축구와 야구가 가능한 운동장과 정구장을 갖추고 있었다.

군산선교스테이션 시설물, 1960년대까지 대부분 존재

1960년대 군산시 경암동·구암동 일대/사진=조종안 기자 제공
1960년대 군산시 경암동·구암동 일대/사진=조종안 기자 제공

1960년대, 군산시 경암동·구암동 일대 모습이다. 빛바랜 흑백사진이지만, 옛 선교스테이션 시설물 대부분을 확인할 수 있어 귀한 자료로 여겨진다. 좌우로 길게 이어진 야트막한 능선이 구암동산이다. 경암동(금강변)에 들어설 군산화력발전소(1965년 착공~1968년 준공) 부지 선정을 앞두고 찍은 사진으로 촬영 위치는 서래산(돌산) 중턱으로 추정된다.

사진 왼쪽 검게 그어진 곡선은 금강 범람을 막기 위해 쌓은 제방(장둑)이다. 긴 둑(堤)을 등지고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장둑마을과 외산마을이 시골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또한 구암병원을 비롯해 전킨 선교사 가족묘역, 전도선 선착장, 궁멀교회(구암교회), 구암병원 숙소, 멜볼딘여학교(1913년 완공), 영명학교(1911년 완공) 등이 확인된다.

이때만 해도 영명학교는 해마다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멜볼딘여학교 건물도 신교육의 상징물로 시민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구암동산 대부분 땅은 화력발전소와 세풍그룹 소유가 되고 우여곡절 속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그중 화력발전소 아파트는 소유자가 몇 차례 바뀌어 오다가 2015년경 철거되고 그 자리에 3·1운동 100주년 기념관이 들어섰다.

고향의 정취 느껴지는 100년 전 구암리

일제강점기 군산 외곽 구암리 모습(호남선교 예배당 전시관에서 찍음)/사진 출처=조종안 기자
일제강점기 군산 외곽 구암리 모습(호남선교 예배당 전시관에서 찍음)/사진 출처=조종안 기자

일제강점기 군산 외곽 구암리(구암동) 모습이다. 야트막한 동산 2~3개로 이뤄진 구암산(군산선교스테이션)을 배경으로 찍은 것으로 보인다. 중앙의 큰 한옥(팔작지붕) 뒤편으로 기다란 처마가 보이는데, 그곳이 성경학교 자리다. 카메라에 잡히진 않았지만, 성경학교 뒤편으로 군산예수병원, 병원숙소, 드루 의료선교사와 해리슨 선교사 사택이 있었다.

궁멀교회, 안락소학교, 멜본딘여학교 등은 구암산 등성이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전도선 정박지 역시 외산마을 금강변(구암천 입구)에 있었으므로 보이지 않는다. 전시관 안내문은 '초기 궁멀(현재 구암동)'이라 적었는데, 서양식 건물인 영명학교와 도서관(기와 건물)이 보이는 것으로 미뤄 1911년 이후 모습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일상적으로 풍기는 시골의 한적함보다 생기가 감도는 풍경이다. 고향의 정취와 평온함도 함께 느껴진다. 가을이면 빨갛게 익은 감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감나무와 박넝쿨이 흙벽을 타고 올라가던 외가를 떠오르게 한다. 길을 따라 촘촘히 들어선 초가들과 도포 차림에 갓을 쓴 남자, 큰 항아리를 지게에 지고 가는 지게꾼 뒷모습 등이 시간여행을 떠나게 한다.

오른쪽 첫 번째 초가집은 쪽마루와 토방, 디딤돌 등이 보이는 것으로 미뤄 보부상과 장꾼들이 쉬면서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였던 주막으로 보인다. 금강, 만경강 등으로 유입되는 하천과 고개(峙)가 곳곳에 있었던 군산은 주막도 많았다고 전한다. 나포, 서포, 궁포(구암리), 경포, 죽성포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포구와 고개 언저리에 주막이 있었던 것.

사진을 찍은 장소는 구암리 길목으로 왼쪽으로 살짝 굽은 길이 정감을 더한다. 볏짚으로 엮은 이엉과 흙돌담이 시골 정취를 더욱 짙게 풍긴다. 해안가 주변에 습지와 갯벌이 발달했던 군산은 예로부터 개흙을 이용한 흙돌담이 많았다. 집을 지을 때 해안가 주민들은 작두로 볏짚을 썰어 개흙과 반죽, 벽에 발랐으며 내륙 지역은 주로 황토를 사용하였다.

새끼로 단단하게 매준 초가지붕도 눈길을 끈다. 보릿고개 시절(1960년대) 이엉 올리기 작업은 흔한 풍경이었다. 가을 추수 끝나면 이엉 올리기가 시작됐던 것. 그러나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는 1970년대 이후 대부분 사라졌다. 군산은(섬 지역 포함)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고 바람이 많은 지역으로 이엉이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새끼줄로 지붕 전체를 눌러 매줬다.

# '구암동'으로 떠나는 시간여행

일제강점기 군산 외곽 구암리 최근 모습/사진=조종안 기자
일제강점기 군산 외곽 구암리 최근 모습/사진=조종안 기자

최근에 촬영한 구암동(구암리) 모습이다. 구암동산(군산선교스테이션)은 '군산 3·1운동 역사공원'으로 새롭게 단장되었고, 영명학교 자리에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그중 101동~102동은 운동장, 103동은 본관 건물, 105동~106동은 구암병원 자리였음을 군산선교스테이션 지적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구암동의 옛 지명은 '궁포(弓浦)'였으며 구머리(구멀)·구암(귀암)·궁멀(궁말)·구암포 등 다양하게 불렸다. 고깃배가 수시로 드나들었고 자그만 조선소가 있는 포구였던 것. 구암산 지형이 거북이가 금강으로 들어가는 형상이라 해서 '거북 龜(구)'를 써 '거북이 마을'이란 뜻의 '구멀'이라 하였으나 발음이 변이되어 '궁멀(궁말)'이 됐다고 전한다.

궁멀(弓乙里)은 '구암리'와 함께 불렸던 지명으로 구암산을 끼고 흐르는 두 줄기(구암천, 둔덕천)의 금강지류가 활처럼 휘어져 흐른다고 해서 '활 궁(弓)'을 썼단다. '멀'은 리(里)를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전라우도 군산진 지도(1875)'에도 '궁을리'로 표기되어 있다. 궁포 모퉁이로 돌아오는 돛단배들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궁포귀범'은 '군산 8경' 중 하나로 꼽힌다.

구암산(구암동산) 역시 궁멀산, 서양산, 미국산, 청년산 등 별칭이 많았다. 옛날 구암리 주민들은 선교사 사택이 여러 채 들어선 북쪽 지역(금강 변)을 '서양산' 혹은 '미국산'이라 했으며, 영명학교가 자리한 남쪽 동산을 '청년산'이라 했단다. '청년산'이란 지명은 외지에서 유학 온 청소년들이 모여 놀았던 것에서 유래하지 않았나 싶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서양 선교사들이 남긴 기록물(보고서, 편지 등)에 지역 사투리가 자주 등장한다는 거다. 지명도 '군산'보다 별칭인 '군창'을 즐겨 사용하였고, '구암리'나 '궁을리'보다 '궁멀(궁말)'이 더 많이 발견된다. 전킨 선교사가 남긴 유언("저를 궁멀에 묻어주세요. 저는 '궁멀 전씨 전위렴'입니다!")에서도 진정 한국인이 되고자 했던 그들의 진정성이 느껴진다.

험난했던 식민지 역사 고스란히 느껴지는 ‘경포리’

군산 지역 평야는 20세기 이전부터 농사를 짓던 숙답(묵은 논)과 일제강점기 대규모 간척사업으로 조성된 신개척답(새 논)으로 나뉜다. 그중 십자뜰, 대야뜰, 수산이곡뜰, 미성뜰, 옥구간척지(어은리, 옥봉리, 선연리) 등은 신개척답 평야이다. 이처럼 일제가 쌀 수탈을 위해 대대적으로 벌인 간척사업으로 군산 지역 해안선은 큰 변화를 겪는다.

 

1899년경 군산 구암동, 경암동, 중동 해안가 모습/사진=전킨 기념사업회
1899년경 군산 구암동, 경암동, 중동 해안가 모습/사진=전킨 기념사업회

군산 개항(1899) 전후 지금의 구암동산에서 서쪽을 바라보며 찍은 사진이다. 전킨 선교사가 찍은 것으로 120년 전 군산 동부지역(구암동, 경암동, 중동, 금암동 등) 모습이라서 귀한 자료로 여겨진다. 길게 누운 월명산 능선과 검은 점으로 나타나는 죽성포(째보선창) 주변 석산, 그리고 해안선이 요즘과 비슷하게 포물선으로 그어져 있어 흥미를 돋운다.

구암동산은 천 리를 흘러온 금강이 잠시 숨을 고르는 위치에 자리한다. 고즈넉한 초가집이 무척 여유롭게 느껴진다. 눈길을 끄는 것은 조선 숙종 27년(1701) 제작된 '전라우도 군산진지도'에 구암동산 지역이 섬으로 표시되고 있다는 거다. 중동, 경암동, 구암동 지역은 100여 년 전에도 간석지였으니 그리 놀랄 일도 아니지만.

1920년경 지도에서 만나는 군산은 지금의 모습과 크게 다름을 알 수 있다. 이렇듯 100년의 시간 속에서 해안선 변화가 놀라울 정도인데 그 전 모습은 어땠을까, 상상이 가지 않는다. 1915년 발행된 <군산안내>에 따르면 당시 군산은 서쪽 및 남쪽은 산지로 이뤄져 있고, 지금의 중동, 금암동, 경암동 일대는 갯벌과 갈대밭 지대로 나타난다.

# 광복 후 크게 달라진 '경포리' 모습

드론으로 찍은 경포천 입구(2020년 촬영)/사진 제공=조종안 기자
드론으로 찍은 경포천 입구(2020년 촬영)/사진 제공=조종안 기자

군산시 중동과 경암동 경계를 이루는 경포천 입구의 최근 모습이다. 1960년대만 해도 멀리 보이는 고층 아파트단지 아래까지 고깃배가 드나들었는데, 좌우를 가로지르는 연안도로(서래교)가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행정구역 지도로 구분하면 서래교(경포천) 중심으로 왼쪽은 경암동, 오른쪽 지역에서 연안도로 강변 쪽은 금암동, 내륙 쪽은 중동이다.

조선 시대 서래장터(경포)와 경장시(경장시장)는 경포천을 끼고 열렸다. 두 장시는 400년 역사를 지닌 오일장으로 경포천은 군산의 해상운송 루트였다. 경포(京浦)는 호남지방 물화를 서울로 올려보낸 데서 유래한다. 옥구·임피(군산) 지역의 10여 개 포구 중 서울, 충청, 전라 지역 배들이 가장 많이 드나드는 민간인 포구였던 것.

1917년에 제작된 '군산지형도'에 경암동은 용지리(龍池里), 중동·금암동은 경포리(京浦里)로 나온다. 이후 경포리는 경장리(京場里)에 속했다가 1932년 일제에 의해 일출정, 동빈정, 중정, 천조정 등으로 나뉜다. 이때 용지리 일부는 경포정으로 개편된다. 광복 후 일출정과 동빈정은 금암동, 중정과 천조정은 중동에 병합되고, 경포정은 경암동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른다.

경포천 주변 지역(금암동, 중동, 경암동 등)은 바닷물이 드나드는 간석지였다. 일제는 1920년 이후 매축공사를 벌여 경마장(헌병·기마경찰 훈련장), 조선소, 목재소, 제염소, 성냥공장 등을 짓고 잔교와 물양장을 갖춘 근대식 어항(째보선창)을 조성한다. 1930년대 초에는 공설운동장(일출운동장)이 개장되고 맞은편에 호남에서 제일 큰 가등정미소가 들어선다.

# 일본 기마경찰 훈련장, 광복 후 밭으로 개간

광복 후, 황목조선소 자리에는 신흥목재(선경목재, 대교합판)가 들어온다. 천조정의 서해조선소는 연안도로 공사 때 폐쇄된다. 성냥공장 자리에는 화력발전소(현 LNG발전소)가 건설된다. 공설운동장은 1980년대 초 주택단지로 변모했으며, 가등정미소는 한국주정, 우풍화학, 한국플라스틱, 한양화학 등 변천을 거듭하다가 지금은 보행공원 조성을 앞두고 있다.

군산경찰서 기마경찰 훈련장이었던 경마장은 광복 후에도 '경마장'으로 불렸으며 주민들의 손으로 각종 농작물을 일궈 먹는 밭으로 개간된다. 중동 샘터경로당 앞에서 만난 배씨 할머니는 "질(길)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경로당 앞에서부터 전부 밭이었다"며 추억담을 들려줬다.

"왜놈들 있을 때는 여기를 '경마장'이라고 혔어. 그러다가 해방 후 사람들이 전부 다 밭으로 맹글었지. 여기 경로당 앞에서 저기 장뚝(강둑)까지 전부 밭이었응게. 여름에는 참외랑 수박이랑 갈아먹고, 가을에는 무, 배차 등을 심어서 시장에 내다 팔기도 허고 집에서 김장도 담가 먹고 그렸지. 그때는 여기저기 원두막도 많았고, 똥통(인분 거름통)도 많았지..."

중동에서 80년 가까이 살면서 구시장(공설시장)에서 생선 장사도 하고 채소 장사도 했었다는 배씨 할머니. 그는 "중동은 땅이 얼매나 질퍽거렸는지 장화 없이는 못 사는 동네였다"며 "옛날에는 고기가 많이 잡혀 방 하나 부엌 하나 있는 집에서 옹색하게 살았어도 재미가 있었는디, 어느 날부터 고기가 잡히지 않으니께 모두 떠나버렸다"고 덧붙였다.

# 지명(地名) 유래에서 고단한 역사 느껴져

1950년대, 경포천 입구는 민물과 짠물이 만나는 기수지역으로 봄이면 뱅어, 우어(우여) 등의 어장이 형성됐다. 연안도로 주변 갯벌에는 농게와 참게 구멍이 은하수만큼 많았으며 삼각주에는 '아사리(어른 엄지손톱 크기의 모시조개 새끼)'가 지천이었다. 주민들은 썰물 때 함지박에 가득 잡아 수제비 끓일 때 넣어 먹거나, 삶아서 배고파하는 아이들 허기를 달래줬다.

예전에는 강둑 주변으로 갈대가 무성한 갯벌이 운동장처럼 펼쳐졌다. 사람들은 그 갯벌을 갈대밭, 깔밭, 깔바탕, 뻘탕, 뻘바탕 등으로 불렀다. 일제가 째보선창을 조성하면서 서래장터가 쇠락하자 경포천을 '깨꼬랑(갯고랑)'이라 하였다. 천조정을 '큰동네'라 하였고, 강둑을 따라 조성된 마을을 '짱뚝(장둑)' 혹은 '강가시'라 하였다. 그 외에 안스래, 바깥스래, 시암거리, 밭가운데, 산동네, 피난민촌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향토사를 정리할 때 자료가 빈약할수록 지명 의존도는 높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지명은 땅의 기원과 의미, 변천사 등을 단순화해 보여주는 척도'라는 말이 전해진다. 지명은 곧 역사의 일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터, '경포리' 지역의 복잡하고 지난한 지명 유래와 행정구역 개편에서 고되고 험난했던 일제강점기 역사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 철길마을(페이퍼코리아선)

구 군산역에서 조촌동(구암동)에 위치한 신문용지 제조회사 '페이퍼코리아'까지 선로는 집과 집 사이로 기차가 다녔던 철길이다. 사람들은 '페이퍼 코리아선', '경암선'이라고 부른다. 하나는 회사 이름을, 하나는 철길이 지나는 동네 이름을 붙여 부르게 된 것 같다.

이 선로는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마지막 발악을 하던 1944년 신문용지 재료를 실어 나르기 위해 준공한 것으로 전해진다. 1950년대 중반까지는 회사 이름을 따 ‘북선제지 철도’, 70년대 초까지는 ‘고려제지 철도’, 그 이후에는 ‘세대제지철도’, ‘세풍제지 철도’ 등으로 불리다가 세풍그룹이 부도나면서 새로 인수한 업체 이름을 따 ‘페이퍼 코리아선’로 불리고 있다.

고려제지 김원전 사장은 이승만 시절(1950년대) 자유당 후보로 출마, ‘먹고 보자 김원전, 찍고 보자 김판술’이란 유행어를 남기면서 당선됐고, 세풍 고판남 회장도 전두환 시절 국회의원을 지냈다.

선로는 총 길이가 2.5km에 불과한 단선이지만, 크고 작은 건널목이 10여 개나 되었고, 교량도 경암동과 구암동에 하나씩 있었다. 기차가 다니지 않는 지금은 건널목 차단기가 무용지물이 되어버렸고, 교량도 복개공사로 우거진 잡초 속에서 흔적만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기차가 신문용지 재료를 실어 나르던 시절에도 주민들은 철길 주변에 평상을 내놓거나 종이를 깔고 밭에서 금방 따온 잡곡이나 고추, 나물 등을 말려 먹었다. 기차가 다니지 않을 때도 주민들은 창고나 뒷마당처럼 사용했다. 그러나 요즘은 전국 각지에서 찾아오는 관광객으로 주말이면 발 디딜 틈도 없이 붐비는 지역 명소로 거듭 태어났다.

무역 루트였던 경포천은 어쩌다 쇠락했을까

1909년 군산 조선인 마을 모습(현 중앙로 2가, 평화동, 대명동, 신영동, 금암동, 중동 일대)/사진 제공=조종안 기자
1909년 군산 조선인 마을 모습(현 중앙로 2가, 평화동, 대명동, 신영동, 금암동, 중동 일대)/사진 제공=조종안 기자

위는 1909년 5월 군산 ‘천엽상점’이 발행한 <군산 부근 풍경사진첩>에 실린 사진이다. 군산 개항 10주년을 기념해 일본인이 만든 사진첩이다. 사진 원본에는 옥구관아(옥구부청), 군산재무서, 구 재판소, 군산보통학교(중앙초등학교) 등이 담겨 있으나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조선인 마을, 군산 진입로, 서래산, 서래장터 부분만 트리밍하였다.

사진 찍은 위치는 군산보통학교 부근으로 추정된다. 이 학교는 월명산 줄기 끝자락을 깎아내고 교사를 신축하였다. 이곳에서 서래산까지 거리는 한 마장 남짓. 초가집이 오밀조밀 엎드려있는 서래포구마을(경포마을)도 희미하게나마 나타나 상상력을 부추긴다. 지금의 중동 지역으로 훗날 인근(현 공설시장 뒤)에 내항선 철도가 가설되고 공설운동장이 들어선다.

군산 진입로 위쪽 하천(현 세느강)은 죽성포로 유입되는 금강 지류이고, 그 너머 구릉지가 서래산이다. 산자락에 가려 보이지 않는데, 소나무 숲 아래 지역이 서래장터(오일장)다. 이 장터는 '경장시장'으로도 불렸으며 경포천 물길을 따라 조성되어 있었다. 지금의 '구암 3·1로(서래장터~구암리 군산영명학교 구간)' 도로가 가는 선으로 그어져 있어 흥미를 더한다.

1917년 제작된 '군산지형도'는 서래산(35m) 높이와 수문(물문다리), 경포마을, 군산역(1912년 완공) 등의 위치를 정확히 표기해 놓았다. 경포천 입구에 삼각주가 형성되어 있었고, 지금의 '구암 3·1로(6차선)' 도로가 둑길로 나타난다. 서래포구 지세(地勢)와 경포천 물줄기도 그동안 알려진 것과 사뭇 다른 형세임을 확인할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군산 동해안 지역(금암동, 중동, 경암동 등) 매축공사는 1920년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래서 그런지 서래장터 주변은 물론 경암동, 금암동, 신영동, 경암동 지역도 갈대밭으로 나온다. 특히 철도가 내항 깊숙이까지 뻗어 있고, 경포마을 면적이 '죽성포 촌락'보다 몇 배 넓으며, 경포 주민들이 식수로 사용했을 우물이 표기되어 놀라웠다.

# 군산에서 가장 번성했던 민간인 포구

서래포구(경포)는 일제강점기 옥구군 경포리(경장리)에 속했으나 1932년 나까마치(仲町)라는 일본식 지명을 얻으면서 군산부에 편입된다. 광복 후 중동(仲洞)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른다. 과거 서래포구는 충청, 전라 각지 주민과 보부상이 몰려들었으며, 금강 건너 용당진(용댕이 나루) 오가는 선착장도 존재하였다.

바닷길이 지금의 고속도로 기능을 했던 1900년대 초, 금강 하구(군산~강경)의 어촌(나루) 10여 곳은 일일생활권에 포함돼 있었다. 그중 군산포~장암포, 경포~용당진, 입포(갓개)~제성나루, 웅포(곰개)~신성리나루, 강경~황산나루 순으로 이용객이 많았다고 전한다. 금강 하구에 위치한 나루의 특징은 포구와 함께 운영됐으며 객주가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

군산은 예로부터 어족자원이 풍부했다. 따라서 객주가 상주하는 포구도 많았다. 군산포(관용 포구), 죽성포(째보선창), 경포(서래포구), 궁포(구암포), 월포(달개나루), 서포(서시포), 나포(나리포) 등이 대표적이다. 그중 가장 번성했던 민간인 포구가 경포였다. 이는 경포리 어민들의 왕성한 출어와 상무역이 폭넓게 이뤄졌던 오일장 영향이 컸을 것으로 풀이된다.

19세기 초 발행된 <韓國水産誌·한국수산지>(1권)에 따르면 군산·옥구 근해에 도미, 준치, 민어, 가자미, 조기, 갈치, 삼치, 농어 등의 각종 어장이 철따라 형성됐다. 또한, 경포마을 주민 400여 명은 봄·여름에 칠산 앞바다(위도 근해)와 충남 죽도에 출어, 조기·준치 등을 어획하였다. 당시 경포는 일본 어민 이주지로 거류민 사무소가 있었다고 전한다.

# 무역 루트였던 '경포천', 째보선창 조성 이후 쇠락

경포천 입구 모습(2007년 촬영). 옛 노인들은 왼쪽(중동)을 ‘안스래’ 오른쪽(경암동)을 ‘바깥스래’라 하였다./사진=조종안 기자
경포천 입구 모습(2007년 촬영). 옛 노인들은 왼쪽(중동)을 ‘안스래’ 오른쪽(경암동)을 ‘바깥스래’라 하였다./사진=조종안 기자

군산의 시장(市場) 역사는 500년 역사를 지닌 서래장터에서 출발한다. 조선 시대 서래장터는 충청·전라도 각지에서 생산되는 곡물과 농산물, 건어물, 직물 등의 집산지였다. 지도에 나타나듯 이 지역은 초가집이 빽빽한 어촌으로 고깃배와 장삿배가 뻔질나게 드나들던 포구였다. 광복 후에도 경포교(물문다리) 부근에 군산어업조합 관할 어판장이 있었다.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전라우도 군산진지도'를 보면 옥구군 경포리에 큰 하천이 흐르고 여기에 긴 다리 하나가 표시되어 있다. 지금의 '아흔아홉 다리' 부근이다. 이곳과 서래산 아래에 큰 장이 섰다. 조선 시대부터 오일장이 섰던 '설애장터(경장시장)'이다. 경포(京浦)는 호남지방 물화를 이곳에서 서울로 올려보낸 데서 유래한다.

경포는 '서울 京'에 '浦'는 '개'이므로 우리말 발음으로 '서울개'라 했던 것. 이후 설개→설애(슬애)→서래 등으로 어원이 변이되어 오늘에 이른다. 소설 <탁류>에서는 '스래'로 나온다. 옛 노인들은 경포천 서쪽(중동)은 '안스래', 동쪽(경암동)은 '바깥스래'라 하였다. 지금의 중동로터리 부근까지 고깃배가 드나들었으나 1960년대 후반 매립된다.

기록에 따르면 경포는 서울을 비롯해 강경, 전주, 태인 등 전국 각지로 물화가 오갈 정도로 큰 포구였다. 군산 개항 이후에도 활기를 띠었다. 그러나 일제가 효율적인 식민통치를 위해 1915년 장재동에 상설시장을 개설하고 1920년대 중반 째보선창을 조성하면서 쇠락하였다. '무역 루트'로 어선과 장삿배가 꼬리를 물었던 경포천 역시 '깨꼬랑(갯고랑)'으로 전락한다.

지역별 키워드

ㆍ구암동: 호남최초 선교스테이션, 영명학교, 멜볼딘여학교, 안락소학교, 구암병원(프랜시스 브리지 앳킨슨 기념병원, 야소병원), 전도선 선착장, 삼일운동 100주년 기념관, 김기창 화백, 채금석 선생(오토바이), 양기준 선생(군산 최초 야구인), 김 훈(세계적 가극가수), 양경호 대서소(1927), 구암소비조합(1928), 구암천(구암교), 둔덕천. 장둑마을, 외산마을

※구암동의 옛 지명은 궁을리(弓乙里) 혹은 구암리(龜岩里)였으며, 궁포(弓浦)·구머리(구멀)·귀암·궁멀(궁말)·구암포 등 다양하게 불렸다.

ㆍ내흥동: 군산역(유적전시관), 금강시민공원(진포대첩 기념비), 채만식 문학관, 진포시비공원, 사옥개(선돌, 조개무덤)

ㆍ조촌동: 군산시청, 전주지방법원 군산지원(전주지검 군산지청), 북선제지(페이퍼코리아), 호남매일신문(1991년 창간), 시내버스터미널, 변전소(조촌초등학교), 농아학교(70년대), 제2정수장(수원지), 창부견직공장(倉敷絹織工場), 종방공장(鍾紡工場)

ㆍ경암동: 한국합판(현 이마트), 배달성냥공장, 풍국제지, 화력발전소(L·N·G군산복합화력발전소, 군산대교기공식), 철길마을(페이퍼코리아선). 송진공장(군산경찰서 자리). 구암초등학교(안락소학교 후신), 고속버스 터미널, 시외버스 터미널

<조종안 기자의 군산학 강좌 안내>

▲1강(08/23) 군산의 도시 형성과정①-일본인 거리를 중심으로

▲2강(08/25) 군산의 도시 형성과정②-조선인 거리를 중심으로

▲3강(08/30) 우리 동네 톺아보기-궁멀에서 철길마을까지(구암동, 조촌동, 경암동 일대)

▲4강(09/01) 우리 동네 톺아보기-경포에서 째보선창까지(중동, 금암동 일대)

▲5강(09/06) 우리 동네 톺아보기-옛 군산역에서 중앙로 2가까지①(죽성동, 신영동, 영화동, 평화동, 영동, 중앙로2가)

▲6강(09/15) 우리 동네 톺아보기-옛 군산역에서 중앙로 2가까지①(죽성동, 신영동, 영화동, 평화동, 영동, 중앙로2가)

▲7강(09/17) 군산 사람들의 삶과 애환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시간여행①(현장탐방)

▲8강(09/20) 우리 동네 톺아보기-옛 구복동에서 창성동까지(개복동, 창성동 일대)

▲9강(09/22) 우리 동네 톺아보기-선양동에서 둔배미까지(선양동, 오룡동, 둔율동 일대)

▲10강(09/27) 우리 동네 톺아보기-흙구데기에서 미원동까지(삼학동, 미원동 일대)

▲11강(09/29) 우리 동네 톺아보기-옛 경성고무 주식회사에서 팔마재까지(흥남동, 문화동, 경장동, 미장동 일대)

▲12강(10/08) 군산 사람들의 삶과 애환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시간여행②(현장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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