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안의 群山學 4강] 서래장터에서 째보선창까지(중동, 금암동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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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안의 群山學 4강] 서래장터에서 째보선창까지(중동, 금암동 일대)
  • 조종안 시민기자
  • 승인 2022.09.03 18:12
  • 기사수정 2022-09-03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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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성포, 언제부터 째보선창이라 했을까

째보선창은 옥구군 죽성리에 속했던 죽성포의 별칭이다. 나지막한 석산(石山) 주위로 흐르는 금강의 지류(일명 세느강)와 대밭이 성(城)처럼 마을을 감싼 모습이어서 '죽성리(竹城里)' 혹은 '대재'라 불렸다 전한다. 이 지역은 봄 안개 자욱한 대나무숲 풍광이 그지없이 아름다워 '군산 팔경'에 들기도 하였다.

째보선창 유래도 사뭇 해학적이다. Y자로 살짝 째진 강안(江岸)에 석축을 쌓아 조성한 포구가 째보(언청이)처럼 생겼다고 해서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 또 하나는 이곳에 힘센 째보가 살았는데 부둣가에서 날품팔이나 노점을 차리려면 그에게 자릿세를 상납해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째보 객주가 사는 선창이라 하여 부르기 시작했다는 설도 있다.

# 째보선창 부근에 있었던 사업체와 기관

▲ 금암동에 있었던 동부어시장(1935)/사진=조종안 기자 제공
▲ 금암동에 있었던 동부어시장(1935)/사진=조종안 기자 제공

죽성포는 1932년 10월 군산부로 편입되면서 동빈정(東濱町)이라 하였다. 군산어업조합과 수산물 위판소(동부어시장)가 있어 '동빈'으로도 불렸다. 동빈정은 광복(1945) 후 왜식 동명 변경으로 금암동(錦岩洞)이 된다. 금암동 역시 바닷물이 드나드는 간석지였으나 매립공사로 육지가 됐다. 옥구군 경장리에 속했던 이 지역은 1932년 군산부로 편입되면서 일출정(日出町)이라 하였다. 일출정은 광복 후 일출동이 됐다가 금암동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른다.

1930년대, 당시 동빈정(1~3정목)에 있었던 주요 사업체 및 기관은 군산어업조합을 비롯해 전북어업조합 판매소, 신탄시장(숯, 장작 등을 파는 시장), 전라북도 수산시험소, 임경상점(林兼商店·군산냉장고), 수호제염소(水戶製鹽所), 중도인길(中島寅吉) 선구상, 황목조선소, 전북조선철공소분공장, 정목조선철공소, 대택조선철공소. 해안순사파출소, 경마장(헌병, 경찰기마대 훈련장) 등이었다.

국가기록원 자료에 따르면 해안순사파출소는 군산경찰서 직할로 1914년 설립됐다. 놀라운 것은 군산보다 개항이 2년 빠른 전남 목포경찰서 해안순사파출소와 같은 해 설립됐다는 것이다. 헌병과 경찰기마대 훈련장도 동빈정에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째보선창 일대가 일제 경찰의 요시찰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겠다.

▲ 째보선창 앞 민야암 등대/사진=조종안 기자 제공
▲ 째보선창 앞 민야암 등대/사진=조종안 기자 제공

째보선창은 군산지역에서 객주가 가장 많은 포구였다. 여객선 선착장이 있었고, 지금의 싸전거리 부근에 객주거리도 조성됐다. 어부들의 길잡이인 등대도 일찌감치 설치됐다. 지금도 금강 파수꾼처럼 우뚝 서 있는 민야암 등대가 그것이다. 등대 점등일은 1933년 10월 1일. 이는 일제강점기 금강은 전라·충청 지역을 연결하는 중요한 뱃길이자 수탈의 통로였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조일통어장정(1889) 이후 바다를 지배하기 시작한 일제는 군산 개항(1899) 전부터 경포와 고군산군도 각 섬에 일본인촌을 조성하였다. 1900년에는 후쿠오카 어민 30호를 지금의 해망동에 이주시킨다. 째보선창에서 가까운 가등정미소 골목에도 일본인 부자촌이 조성된다. 그곳 일본인 선주들이 보유한 고깃배는 대부분 동력선이었고, 어구·어법이 우수해 어획량이 조선 어민들보다 항상 많았다.

동력선(木船) 보유율에서도 일본 어민과 조선 어민의 경제력, 기술력 차이가 느껴진다. 군산부청이 조사한 통계에 따르면 1935년 4월 당시 군산부에 속한 동력선은 모두 73척(1천 톤 이하)이었다. 그중 조선총독부 소유 6척, 전라북도 소유 1척, 일본인 소유가 49척이었고, 조선인 소유는 14척에 불과했다. 동력선 전체의 80% 이상을 일본인들이 차지했던 것.

일제가 설립한 수산학교도 있었다. 1915년 군산공립농립학교 부설 간이실업학교로 개교했다가 1916년 째보선창 부근으로 옮기면서 '군산 간이수산학교'로 정식 개교하였다. 이 학교는 전라북도 보조금으로 교실, 기숙사 등을 갖췄다. 교사는 단층 목조건물이었고, 소형 실습선도 3척 있었다. 교과 과목은 일본어, 조선어, 산술, 수신(修身), 그물 짜기, 기관 설비, 항해 등이었다. 조선인 학생도 다녔던 수산학교는 1927년경 폐교된다.

# 1920년대 중반부터 '째보선창'이라 부르기 시작

▲일제강점기 군산 째보선창 모습/사진=조종안 기자 제공
▲일제강점기 군산 째보선창 모습/사진=조종안 기자 제공

군산 째보선창은 매립된 지 반세기 가까이 지났음에도 관광객과 문학도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소설을 비롯해 논문, 수필, 기행문, 수상록 등에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도 근대식 포구의 기본 시설인 물양장(物揚場)과 간만의 차를 극복할 수 있는 잔교설치 등의 공식기록은 볼 수 없었다.

모두가 궁금했던 기자는 째보선창 부근 갯벌 매축과 부두 시설물 설치시기 등을 확인하는데 단서가 되어줄 옛날신문 기사와 행정문서, 흑백사진, 지도 등 관련 자료를 수집하였다. 그중 죽성포가 표기된 지도(1898)와 동해안(째보선창) 매축공사 관련 신문기사(1926), 잔교 가설공사 서류(1929) 등을 소개한다.

1926년 11월 10일. 이날 군산 부청에서는 일본인 부윤이 주제하는 회의가 열렸다. 참석자는 전북수산인회 토목출장소장, 군산상업회의소 회두 등. 주요 의제는 군산 어항 설치문제였다. 이어 12일 오후에는 부청 회의실에서 군산부 협의회원 최종 회의가 열렸다. 이날 회의에서는 대정 15년도(1926) 추가경정예산 건을 이의 없이 가결하고, 차기 협의회에 인계할 주요과제 11건을 토의하였다.

토의 내용은 군산-제주도 직항로 개시, 군산 전기(電氣) 부영(府營) 실현, 제2기 하수구와 도로 개수. 조선인 공동묘지 확장, 전북-충남 도선(渡船) 잔교 신설 및 객선 대형화 추진, 군산공원 월명산까지 확장, 신사(神社) 이전, 어항(漁港) 설비 실현 촉진, 군산개항 30주년 기념 공진회 개최, 상수도 확장, 동해안 매축 상업회의소와 공동시행 등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동해안 매축공사 시작을 알리는 보도가 뒤따른다.

▲ 동해안 매축을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제공=조종안 기자
▲ 동해안 매축을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제공=조종안 기자

"군산 항만 수축에 반(伴)하야 동해안에 약 3천 평을 매축하고 신탄시장(薪炭市場)급 염건어(鹽乾魚) 공장 등을 신설하기 위하야 군산부와 군산상업회의소와 타협한 결과 부급의소(府及議所)에서 공동 경영하기로 출원 중이라 하며 우(右) 사업이 실현되는 때에는 상업회의소에서는 약 3만 원의 재원을 득케 되야 차(此)를 군산항 30주년 기념 공진회 개최시 비용 일부에 충용(充用)하리라 하며 공사는 명년(1927) 9, 10월 출곡왕성기(出穀旺盛期)에 완성됨을 따라 미곡(米穀) 적재하기에도 다대한 편의를 여(與)하리라더라."

1926년 11월 24일 치 <동아일보> 기사이다. 기사에 나타나듯 당시 군산부는 조선총독부 재가를 받아 동해안(째보선창) 갯벌 3000평을 매축하고 강기슭에 콘크리트 축조물과 잔교를 설치하는 등 근대식 부두 조성작업에 착수한다.

1933년에는 운영권을 일본인이 거머쥔 군산어업조합(조합장 군산 부윤)이 출범한다. 그리고 일제는 째보선창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조선 객주들의 해산물 위탁 판매권을 통제한다. 일찍이 설립됐던 객주조합도 문옥조합(問屋組合)으로 바뀐다. 따라서 1930년대 군산에는 곡물 문옥조합과 해물 문옥조합이 존재하였다. 이 모두가 조선 어민들의 어업권과 객주들 상권을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함이었다.

경술국치(1910) 이후 일제는 지금의 해망동에 서부어시장을, 금암동에 동부어시장을 개설한다. 당시 해망동은 군산의 중심지로 일본인 거주 지역이었고, 금암동은 외곽지역이었다. 그런데도 서부어시장 거래 규모가 동부어시장보다 현저히 작았다. 이는 개량된 선박과 근대화된 어구를 갖춘 일본 어민 대부분이 동부어시장을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 1929년 군산 부청이 조선총독부로 보낸 잔교 평면도(오른쪽)와 서류(왼쪽)/조종안 기자 제공
▲ 1929년 군산 부청이 조선총독부로 보낸 잔교 평면도(오른쪽)와 서류(왼쪽)/조종안 기자 제공

국가기록원 자료(조선총독부)에 따르면 1918년 서부어시장, 1923년 동부어시장(군산 부영수산 동빈시장)이 들어선다. 그리고 1928년에는 동해안(째보선창)~항만, 항만~도선장까지 수면매립 공사가 완공된다. 이어 1929년 동해안에 잔교(길이 49m, 폭 4m)가 설치되면서 어항으로서 제반 시설을 모두 갖추게 된다. 째보선창은 이처럼 일제의 필요에 의해 일제의 주도로 탄생하였다.

따라서 째보선창이란 지명은 동부어시장이 건립되는 1923년에서 매축공사가 끝나고 포구에 근대식 어항 시설이 갖춰지는 1929년 사이, 즉 1920년대 중반부터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소설 <탁류> 주인공 정주사가 강 건너 용댕이(서천)에서 식솔들을 데리고 째보선창 부두에 첫발을 내디딘 시기도 그때쯤이어서 흥미를 더한다.

# 입하 앞둔 째보선창 나가면 조기가 지천

▲오색기를 나부끼며 째보선창에 정박한 고깃배들(1960년대)/사진=조종안 기자
▲오색기를 나부끼며 째보선창에 정박한 고깃배들(1960년대)/사진=조종안 기자

"선창은 분주하다. 크고 작은 목선들이 저마다 높고 낮은 돛대를 옹긋중긋 떠받고 물이 안보이게 선창가로 빡빡이 들이밀렸다. 칠산 바다에서 잡아가지고 들어온 젓조기가 한창이다. 은빛인 듯 싱싱하게 번쩍이는 준치도 푼다. 배마다 셈 세는 소리가 아니면 닻 감는 소리로 사공들이 아우성을 친다. 지게 진 짐꾼들과 광주리를 인 아낙네들이 장속같이 분주하다.

강안(江岸)으로 뻗친 찻길에서는 꽁지 빠진 참새같이 방정맞게 생긴 기관차가 경망스럽게 달려다니면서, 빽빽 성급한 소리를 지른다. 그럴라치면 멀찍이 강심에서는 커다랗게 드러누운 기선이, 가끔가다가 우웅 하고 내숭스럽게 대답을 한다. 준설선이 저보다도 큰 크레인을 무겁게 들먹거리면서 시커먼 개흙을 파 올린다. 마도로스의 정취는 없어도 항구는 분주하다."

군산을 배경으로 1930년대 식민지 사회상을 날카롭게 풍자한 채만식 소설 <탁류>의 앞부분이다. 해마다 5월 초순이면 조기 파시가 섰던 째보선창 풍경을 그리고 있다. 특히 "지게 진 짐꾼들과 광주리를 인 아낙네들이 장속같이 분주하다"는 대목과 "준설선이 저보다도 큰 크레인을 무겁게 들먹거리면서 시커먼 개흙을 퍼 올린다."는 대목은 더욱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놀라운 것은 50~60년대 선창 분위기와 너무도 흡사하다는 것이다.

출어했던 배들이 만선을 알리는 오색기를 펄럭이며 들어오는 날이면 째보선창은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선주와 어부 가족들, 만선을 축하해주러 나온 친구들 그리고 볏짚으로 조기를 엮는 아낙들, 짐꾼들, 구경꾼들, 행상들까지 모여들었다. 아랫녘(전남) 사투리와 충청도 사투리가 뒤섞인 아낙들의 걸쭉한 수다는 어부들이 배에서 내지르는 고함소리와 어우러지면서 흥을 돋우는 추임새가 되어 주었다.

고깃배 대부분이 무동력선이던 시절, 입하(立夏)를 앞두고 째보선창에 나가면 조기가 지천이었다. 이때가 되면 소금배, 상고선, 화목선(장작배) 등도 바쁘게 드나들었다. 고깃배가 들어오는 조금을 전후해서는 어부들 씀씀이도 푼푼했다. 철도와 어판장 주변에 설치된 건조대에 줄줄이 매달려 파시를 노래하는 오통통한 굴비들은 풍요 그 자체였다. '째보선창에 가면 강아지도 100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말도 이때 나왔다.

부둣가는 인심도 후했다. 선주나 중매인들은 길에서 우연히 만난 지인이나 구경나온 동네 이웃에게 "금방 잡아 온 것잉게 물(선도) 좋을 때 맛이나 보라고!"라면서 팔뚝만 한 황금빛 조기 몇 마리를 포대에 담아주는 게 인사였다.

▲ 위판을 기다리는 어류들(1960년대)/사진=조종안 기자
▲ 위판을 기다리는 어류들(1960년대)/사진=조종안 기자

어부들이 잡아 온 조기는 어판장 바닥에 무더기로 쌓아놓거나 대광주리에 담아 경매했다. 그러한 방식은 어상자가 등장하는 1970년대 초까지 이뤄졌다. 경매가 끝나면 중매인과 대매인(중매인에게 수수료를 주고 구매하는 중간상) 등을 통해 기차나 트럭, 생선 장수 아낙들의 다라이(함지박)로 옮겨져 각지로 팔려나갔다. 생선과 소금을 짐자전거에 싣고 농촌을 찾아다니며 곡식과 맞바꾸는 물물거래 방식을 병행하는 행상도 많았다.

모두가 배고프고 가난했던 시절. 군산에는 '째보선창 갈매기'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도 많았다. 부둣가에서 '생선 도둑'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밑바닥 인생들이었다. 그들은 어판장 바닥에 쌓아놓은 생선 무더기 주위를 맴돌며 눈치를 살피다가 경비가 눈을 돌리는 사이 재빨리 다가가 허리춤에 감추고 있던 갈고리로 생선 몇 마리를 게 눈 감추듯 찍어 달아났다.

지역 사투리를 섞어 '갈마구 행님들'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별명은 선주(船主)들이 지어준 것으로 추정된다. 어부들이 험한 파도와 싸우며 잡아 온 생선을 훔쳤다고 하지만, 생계형 좀도둑에게 '도둑'이란 딱지를 붙이기에는 너무 야박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망망대해에서 작업하는 어부들에게 친구도 되어주고 '어군탐지기' 역할도 해줬던 갈매기에 빗대 불러서다. 안타까운 별명이긴 하지만 풍자와 해학, 여유가 느껴진다.

충청·전라 경계를 이루며 흐르는 금강(錦江)은 지역 문물이 왕래하면서 다양한 역사를 만들어낸 시대의 젖줄이었다. 출퇴근길이자 학업의 길이기도 하였다. 충남 부여, 논산, 강경, 한산, 화양, 서천, 대천 등지 학생들이 군산으로 유학을 왔다. 도선장(군산-장항)은 직장인과 통학생으로 매일 붐볐고, 주말이나 방학 시즌이면 군산~강경, 군산~화양 여객선 승객의 절반 이상이 학생이었던 것에서 잘 나타난다.

충청도는 물론 전북 서해안 도서(島嶼) 지역을 오가는 여객선 선착장도 째보선창에 있었다. 그래서인지 여인숙 골목도 진즉 생겨났다. 여인숙은 해안파출소와 신영동 구시장 부근에 많았다. 재미있는 것은 고군산여인숙, 한산여인숙, 충남여인숙, 강경여인숙, 선유도여인숙 등 지명이 들어간 간판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이다. 하숙을 하거나 자취하는 학생도 째보선창과 가까운 중동, 금암동 등에 많이 살았다.

# 조정래의 <아리랑> 고은의 <만인보>에도 등장

▲ 하늘에서 본 째보선창(위쪽 동그라미 표시) 아래 큰 건물은 한국주정(우풍화학)/사진=조종안 기자
▲ 하늘에서 본 째보선창(위쪽 동그라미 표시) 아래 큰 건물은 한국주정(우풍화학)/사진=조종안 기자

째보선창은 망둥이낚시로도 이름이 높았다. 수심이 꽤 깊어 농어, 민어 등 고급어종도 잡혔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사정이 달라진다. 기록에 따르면 1975년 당시 째보선창 부근 공장들은 유독성 폐수를 바다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런데도 당국은 아무런 공해측정 기구도 없이 1년에 한 번씩 눈으로 보고 다니며 공해 여부를 조사할 뿐이었다. 째보선창 매립은 종합어시장 신축과 산업도로(해망로) 확장공사가 원인이었으나 강물 오염도 한몫을 했다는 게 주민들의 지적이다.

"군산시 수협은 올부터 79년까지 총사업비 4억 4천여만 원을 들여 시내 금암동에 있는 서부위판장의 판매장과 접안장을 확장하는 등 대단위 종합어시장을 세울 계획이다. 군산시 수협조합(전 군산어업조합)에 의하면 군산시가 준공예정인 속칭 '째보선창' 매립지 1천 500평을 2억 2천만 원에 매입, 이곳에 2억 1천여만 원을 들여 500평의 위판장을 확보한다는 것이다."- 1978년 12월 5일 치 <매일경제>

위에서 말하듯 째보선창은 1978년 매립된다. 군산시수협조합 위판장 부지를 제외한 매립지가 지금의 공용주차장이다. 복개 전에는 소설 <탁류> 기념 빗돌이 세워진 곳까지 바닷물이 드나들었다. 기념 빗돌 옆에는 다리(금암교)가 있었다. <탁류> 주인공 정주사가 용댕이(장항)에서 똑딱선을 타고 군산에 처음 발을 내디딘 곳이자 신세를 한탄하며 자살을 생각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조정래의 <아리랑>에서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보름이가 서무룡의 도움으로 떡장수를 하는 곳으로 나온다.

"역시 떡장사는 째보선창이 가장 잘된다는 것이었다. "자리야 걱정 말고 아무 때고 나오라등마." 손판석이 보름이와 부안댁에게 전해 준 서무룡의 말이었다. 보름이가 떡함지를 이고 나가는 날 서무룡은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그의 부하 둘이 보름이를 맞이해서 자리를 잡아주었다. 그 자리가 제일 좋은 길목이라는 것을 보름이는 나중에야 알았다. 주먹패들은 보름이한테서는 자릿세를 받아가지 않았다."- 조정래 소설 <아리랑>에서

째보선창은 고은 시인의 대하시집 <만인보>에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쌍욕을 육자배기처럼 질펀하게 내뱉는 '째보선창 주모(酒母)'와 뱅어잡이 나간 후 돌아오지 않는 '째보선창 천씨' 실컷 얻어맞고도 낄낄 웃는 '째보선창 갑술이' 등이다. 실제로 1·4후퇴 때(1951년 1월) 중학교 4학년이던 고은이 아버지를 따라 돛이 둘 달린 목선을 빌려 타고 피난길에 올랐던 곳이 째보선창이었다.

"나는 자드락종이 한 다발과 옥편(玉篇) 그리고 지리부도와 이태준의 <문장독본>과 잉크와 철필을 챙겨 짐 속에 꾸려 넣었다. 화가가 되리라는 내 꿈은 이런 전란으로 사라져갔다. 그대신 시인이 될 꿈이 더 크게 익어간 것이다. 아침나절에 군산 내항의 어선 부두인 째보선창에 도착했다. 돛대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그때 나는 '임립(林立)'이라는 말을 처음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일중선(안강망) 쌍돛대, 세 돛대의 배들이 거의 항구 밖으로 빠져나갈 수 없도록 그 4백 평 정도의 선창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고은 시인의 <나의 山河 나의 삶>에서

광복 후 째보선창은 군산어업조함(동부어판장)을 비롯해 해안파출소, 장작 거리, 여인숙 골목 등을 끼고 있었다. 선구점, 철공소, 용접소, 젖당꼬 등이 즐비했다. 쌀장수, 물장수, 떡장수, 팥죽장수, 모주 장수 등 노점상들이 길목 대부분을 차지해 조금 때는 장속을 이뤘다. 선창가 열두냥짜리 인생들인 지게꾼과 구루마꾼들은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른 아낙이 가득 퍼주는 팥죽 한 그릇 아니면 새콤달콤한 모주 한 대접으로 허기를 달랬다.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쇠머리찰떡은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로 맛이 좋았다.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더하는 검정콩이 결을 따라 줄줄이 박혀 있어 '기름 바른 콩떡'으로도 불리었다. 떡을 마름모꼴 모양으로 썰어 떡판에 쌓아놓으면 반짝반짝 빛나서 침을 꼴깍 넘어가게 했다. 재료가 찹쌀이어서 식감이 쫄깃하고 입안에 착착 감겨 가장 인기 좋은 먹을거리로 대우받았다.

선창에 가면 철공소가 많았고, 부근에 용접소도 있었다. 용접소에서 사용하는 암모니아 가스찌꺼기는 아이들 놀이의 재료가 되었다. 가스통에 남은 찌꺼기(가스)를 길가에 버리면 가져다 가스불놀이를 했다. 비오는 날 진흙을 모아 무덤처럼 만들어 그 속에 넣고 구멍을 내면 활화산의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는 게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또 그곳에 성냥불을 가까이 하면 불꽃이 솟았는데 신기해서 탄성을 지르곤 하였다.

# 죽성포, 어제와 오늘

▲ 죽성포(왼쪽 동그라미 표시)가 표시된 그림지도(1898)/조종안 기자
▲ 죽성포(왼쪽 동그라미 표시)가 표시된 그림지도(1898)/조종안 기자

위는 군산 개항(1899) 1년 전, 당시 옥구 감리가 그린 지금의 원도심권 지도이다. 왼쪽 하단 산(石山) 표시와 초가 다섯 채가 그려진 촌락(동그라미 표시)이 죽성포이다. 조선 시대 편찬된 <옥구군지>에서도 죽성포와 대밭이 발견된다. 그 대밭이 성(城)처럼 마을을 감싼 모습이어서 '죽성리(竹城里)' 혹은 '대재'라 했다고 전한다.

촌락 왼쪽 검은색으로 표시된 지류가 일명 세느강이다. 세느강을 거슬러 조금 올라가면 철교(내항선)를 만난다. 이곳 역시 오래전 메워졌지만, 침목이 10개 남짓 되는 철교였다. 철교 왼쪽에는 가등정미소가 있었다. 맞은편에는 명월관이 자리했다. 부근에 향나무가 200여 주 심어진 농원도 있었다. 조금 더 올라가면 구시장과 옹기전골목(돼지국밥집 골목)이 나온다. 이곳에 목교(木橋)가 설치되어 있었다.

가등정미소는 일제강점기 호남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정미소였다. 광복 후에는 술(酒) 원료인 주정을 만드는 한국주정군산공장이 됐다가 1969년 국내 최대의 한국플라스틱 공장, 우풍화학, 한양화학, 삼양화학 등으로 바뀌었다. 전두환 신군부가 등장하는 1980년대부터는 최루탄 원료를 만드는 공장이 재미를 보다가 정권교체(1998) 이후 가동을 중단했다.

▲ 석산을 깎아내고 건축한 군산 안강망수협(1970년대)/사진=조종안 기자 제공
▲ 석산을 깎아내고 건축한 군산 안강망수협(1970년대)/사진=조종안 기자 제공

석산은 군산 개항 1년 전 제작된 각국조계지도에 '공원예정지'로 표기되어 호기심을 자극한다. 개항 후 공원으로 지정은 안 됐지만, 면적이 꽤 넓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또한, 이곳은 각국조계지 동쪽 경계가 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70~80년대에는 안강망수협 군산지소 건물이, 철길 옆에는 해안파출소가 있었으나 상가가 들어서면서 철거됐다.

싸전거리와 째보선창 중간에 남아있는 대한통운 쌀창고 부근에는 철공소와 여관이 많았다. 포구가 가까웠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대밭이 울창했던 동네라서 그런지 죽세공품 업소도 20여 곳 있었다. 광주리, 채반, 소쿠리, 찬합, 죽부인, 죽관(竹棺) 등을 만드는 가내 수공업으로 1950년대까지 호황을 누리다가 플라스틱 제품이 유행하는 1960년대 중반 이후 문을 닫았다.

석산은 1910년대 내항선 철도 공사와 1920년대 중반 동해안 매축공사 때 대부분 깎여나간다. 1934년대 제작된 군산부 지도를 보면 본정 2정목이 석산에 막혀 더 뻗어 나가지 못하고 오른쪽으로 휘어져 동영정 도로와 연결된 것을 볼 수 있다. 석산은 광복 후에도 일부가 남아 있었으나 1960년대 후반 산업도로(해망로) 확장공사 때 형체도 없이 사라진다.

오늘도 군산 째보선창을 찾는 사람들은 채만식 소설 <탁류>를 떠올린다. 그들은 소설의 한 대목을 인용하며 풍성했던 옛 모습을 그린다. 그러나 정작 소설에는 '째보'라는 명사가 등장하지 않는다. 눈을 크게 뜨고 훑어봐도 '선창'만 있을 뿐 '째보'는 보이지 않는다. 그저 행간으로 느낄 뿐이다. 필자 역시 진즉 복개된, 그래서 지금은 보이지 않는 옛 째보선창을 그리워 할 따름이다.

지역별 키워드

ㆍ중 동: 경포(서래장터, 당산제, 주막거리, 삼일만세운동), 중동경마장, 장둑(짱둑), 큰동네(천조정), 시암거리, 엉떡(언덕), 독보공장(활석분), 유리공장(병공장), 아흔아홉골목. 군산조선소(서해조선소)

ㆍ금암동: 죽성포(째보선창), 동빈어시장(어업조합, 수협), 째보선창선, 신탄시장(장작거리), 황석어젓, 해안파수막(해안파출소), 임겸냉장고(원양제빙), 가등정미소(한국주정, 우풍화학, 한국플라스틱, 삼양화학, 한양화학, 우풍화학선), 가등정미소 미선공파업, 월남선생 영결식, 공설운동장(부민체육대회, 전국규모 대회, 선거유세, 난장, 풍물패공연, 서커스단, 야외영화관), 채석장(서래산), 피난민촌, 서해캬바레, 뱃공장(신진조선소), 신흥목재(선경목재, 대교합판)

 

<조종안 기자의 군산학 강좌 안내>

▲1강(08/23) 군산의 도시 형성과정①-일본인 거리를 중심으로

▲2강(08/25) 군산의 도시 형성과정②-조선인 거리를 중심으로

▲3강(08/30) 우리 동네 톺아보기-궁멀에서 철길마을까지(구암동, 조촌동, 경암동 일대)

▲4강(09/01) 우리 동네 톺아보기-경포에서 째보선창까지(중동, 금암동 일대)

▲5강(09/06) 우리 동네 톺아보기-옛 군산역에서 중앙로 2가까지①(죽성동, 신영동, 영화동, 평화동, 영동, 중앙로2가)

▲6강(09/15) 우리 동네 톺아보기-옛 군산역에서 중앙로 2가까지①(죽성동, 신영동, 영화동, 평화동, 영동, 중앙로2가)

▲7강(09/17) 군산 사람들의 삶과 애환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시간여행①(현장탐방)

▲8강(09/20) 우리 동네 톺아보기-옛 구복동에서 창성동까지(개복동, 창성동 일대)

▲9강(09/22) 우리 동네 톺아보기-선양동에서 둔배미까지(선양동, 오룡동, 둔율동 일대)

▲10강(09/27) 우리 동네 톺아보기-흙구데기에서 미원동까지(삼학동, 미원동 일대)

▲11강(09/29) 우리 동네 톺아보기-옛 경성고무 주식회사에서 팔마재까지(흥남동, 문화동, 경장동, 미장동 일대)

▲12강(10/08) 군산 사람들의 삶과 애환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시간여행①(현장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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