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극장 사장 지낸 육복술 남매 군산문화예술부흥 초석을 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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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극장 사장 지낸 육복술 남매 군산문화예술부흥 초석을 놓다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4.02.14 16:05
  • 기사수정 2024-02-15 09: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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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육복술· 영술 사장 형제… 지역 최초 신문사· 극장 운영
‘최승희의 제자’ 육정림… 군산과 전북 춤 발전 혁혁한 공헌
육정애… 무용전공· 夫君 임영서 바이얼리니스트와 활동
막내 ‘육기술’ …서울대 음대 졸업 후 재즈 피아니스트 개척자

1954년.

이 해는 군산문화예술발전의 실질적인 원년이라고 할만큼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70년의 세월이 지난 세월 중 엄청난 해였다.

영화 탁류(감독 이만흥)는 이때 군산에서 올로케한 두 번째 작품이 나온 해이기도 했다. 군산문화예술의 황금기를 연 토요동인회가 1953년 만들어졌다가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기 위한 몸부림 끝에 1954년 들어서 전국적인 문화예술단체로 명성을 얻으면서 지역문화예술사의 획기적인 장을 연 때였다.

이 시기에 여러 자료들에 뜻밖의 인물이 나오는데 그중에 ‘육정림과 육기술 선생 남매’가 간헐적으로 등장한다. 앞서 고 육복술 군산극장 사장과도 돌림자가 같아 궁금증과 함께 작은 내용이라도 모으고 모았다.

이들을 이어주는 끈(인연 또는 혈연)을 찾다 최근 한 지역 인사로부터 재미난 얘기를 들었다.

이런 핵심 내용을 잘 아는 인사를 우연히 만났다.

옥천 육씨 가문으로부터 소개받은 사람이 육복술 사장의 사위 진승완씨였다. 그의 얘기를 통해 육씨 가문의 예술문화활동 내용에 대해 정리했다.

# 옥천 육씨 가문 남매들의 군산문화예술 진작 앞장

극장· 언론· 무용· 재즈 피아니스트· 발레 등까지 활동

군산극장/군산민보- 삼남일보→ 3社 통폐합후 전북일보 탄생

옥천 육씨 중 군산과 관련 근현대기 언론문화예술계를 한 차원 끌어올린 핵심 인물이 ‘고 육복술(1981년 작고) 군산극장 사장’.

오래 전에 고인이 된 육 사장은 군산에서 대대로 살아온 이 가문의 장남인데 해방 직후 중국에서 탄광사업으로 엄청난 재산을 모았단다.

그의 형제 남매는 3남4녀였다.

육복술氏
육복술氏

이중 5남매가 수십년동안 군산문화예술 진흥을 시킨 중심적 역할을 톡톡히 했던 사람들이었다.

당시는 재력가 집안에서 예인이나 예술가가 나오기보다는 어려운 환경에 있던 인사들이 대부분이었던 때여서 더욱 이색적이었다. 당시 군산최고 재력가였던 육복술 사장은 해방 전후 군산민보(1946년 5월 창간)를 만들었고 몇 년 뒤에 익산에 본사를 둔 삼남일보를 창간했다.

이 뿐 아니다.

1950년대 말 군산극장까지 사들일 정도로 지역을 대표하는 재력가였다.

그는 자신의 재력을 바탕으로 서울로 사업무대를 넓혔을 뿐 아니라 동생들의 예술적인 재능과 끼를 살리는데 아낌없이 투자했다. 동생들이 맘껏 공부할 수 있도록 서울 곳곳의 대학들을 다닐 수 있도록 하숙집까지 마련했단다.

바로 밑 동생 영술씨는 일제강점기에 일본 육사를 졸업했다.

영술씨는 해방 후 형(복술)과 함께 삼남일보 경영에 나섰다. 후에 삼남일보는 도내 3사 통폐합으로 ‘1도(道)1사(社)’ 체제로 재편돼 전북일보로 통합,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영술씨는 서울에서 주로 가족들이 거주하는 바람에 이곳 생활이 마무리되면서 상경했다.

군산은 물론 전북 무용계 대모 역할을 한 육정림은 그의 여동생이다.

우리나라 현대춤과 발레 등을 새로운 차원으로 이끈 최승희(1911~ 1967)와 그의 제자 김미화(본명 김옥순: 1922~ 1984)로 사사한 육정림(1928~ 1987).

세종대 전신격인 수도사대에서 현대무용을 했지만 한국무용으로 바꿔 고향에서 제자 육성에 앞장섰다.

육정림은 명무(名舞) 장추하 선생의 문하생으로 해방 후부터 송범, 김진걸, 조광, 주리 등과 동문수학했다.

김진걸은 특히 백부의 뜻으로 재무부에 취업하기도 했지만 장추하 무용발표회의 ‘창조의 여신’이라는 남방춤을 보고는 장추하 문하생이 된다.

육정림은 기업은행 군산지점 앞 건물에 육정림 무용연구소를 열고 이영희 전 경상대 교수, 이길주 전 원대교수, 김덕임(고흥길 전 의원의 부인), 송미숙(진주교대 교수), 김정숙(전 군산시지부장), 이한녀 전국립국악원무용단, 이주미, 육혜숙(조카) 등을 제자로 뒀다.

그녀는 무용 교육을 통한 저변 확대와 창작 활동으로 1965년 한국교육 무용총연합회에서 준 대한민국 교육문화상을 수상했다. 또한, 1967년 서울무용 최우수상, 1970년 예술 문화 창작 작품상, 1971년 전라북도 문화상 등을 받았다.

이밖에 육정림은 군산여상 총동창회장을 약 20년간 역임했고 군산부녀의용소방대장, 군산예총 부지부장, 군산무용협회 지부장 등 사회활동에도 힘을 쏟았다.

한편 육정림의 동문인 송범은 발레리노에서 현대무용가로 그리고 다시 한국무용가로 한국무용예술에 큰 업적을 남긴 무용가다. 1961년 한국발레단을 창설하여 한국 발레계에 지대한 발전을 가져왔다. 국립무용단과 한국무용협회를 설립하며 국립무용단에서 30년간 단장을 맡으며 한국적 정서가 녹아든 한국무용극 정립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전통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의 조화 속에서 자신 만의 무대를 선보이며 한국의 무용 예술을 발전시킨 무용가로 기억되고 있다.

이중에 빼놓을 수 없는 이가 막내 육기술.

서울대 음대를 졸업한 그는 고 강근호 전군산시장의 고교동창생으로 당시에 매우 드문 재즈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날렸다. 우리나라 재즈 피아니스트의 원조라 할 수 있다. 개인사로 기술씨는 도미했다가 나중에 귀국해 오늘날까지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육정림의 여동생 정애씨도 중앙대 졸업(발레 전공)한 뒤 옥서면 출신인 바이얼리니스트 임영서씨와 결혼한 부부 예술인이었다.

이후 육복술 사장은 2남4녀를 뒀고 자녀 중 육해숙씨가 무용 등으로 군산에서 활동했다.

한편 예술가집안 분위기와 달리 육복술 사장의 장남인 정치씨는 군산수전 1회 출신으로 동양고속 부산~ 제주카페리호 선장과 남북을 연결한 금강유람선 선장 등으로 활동했고 군산하구둑 건설 등에 앞장선 정덕씨는 현대중공업(옛 현대조선) 등에서 고 정주영 회장을 보필한 탁월한 토목인이었다.

이밖에 고 육완순 이대교수는 육복술 사장과 가까운 집안 사람이고 오래전 육복술 사장은 집안뻘이어서 고 육영수 여사(박정희 전 대통령영부인)와 육인수 등 육여사의 오빠들과 교류했단다.

삼남일보는 어떤 회사?

삼남일보는 익산시에서는 처음으로 발간된 일간신문이다.

삼남일보는 원래 1946년 5월 1일에 군산시 금동에서 육복술이 창간한 군산민보로 출발하였다. 1949년 3월 1일 지금의 익산시 중앙동에 해당하는 이리시 호남동으로 사옥을 이전, 속간하면서 제호가 삼남일보로 바뀌었다.

이곳의 사장은 육복술의 바로 밑 동생인 육영술로 바뀌었다. 1953년에는 전주시로 사옥을 이전했고 1973년 6월 1일에 전북일보와 통합된 신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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