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안 記者의 '군산 야구 100년사'] 불안하게 맞은 해방…식민지제도 답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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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안 記者의 '군산 야구 100년사'] 불안하게 맞은 해방…식민지제도 답습
  • 조종안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 승인 2020.05.01 11:51
  • 기사수정 2022-01-14 10: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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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두에서 귀국선 기다리는 일본인들(1945)/출처=군산야구 100년사
부두에서 귀국선 기다리는 일본인들(1945)/출처=군산야구 100년사

 

1945년 8월 15일. 중대 뉴스 발표 예고에 식민지 백성들은 숨죽이고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심한 잡음과 함께 들려오는 떨리는 목소리, 그것은 뜻밖에도 일본 히로히토 천황의 무조건 항복 선언이었다.

치욕의 식민치하에서 사무치도록 그리던 광복은 머리가 띵할 정도로 갑자기 찾아왔다.

‘광복’은 글자 그대로 ‘빛을 되찾는다’는 뜻으로 ‘새 출발’을 의미하기도 한다.

개항(1899) 이후 일제가 근대화시킨 군산도 ‘수탈의 도시’란 치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는다.

그러나 거리에서 감격의 만세 시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일본 군대(수호부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일본인 거주자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해방정국에서 군산이 다른 도시보다 불안정했던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1944년 5월 당시 군산(옥구군 포함)에는 지역 경제력을 장악하고 주인 노릇을 하는 일본인이 3000여 가구에 1만 1100여 명이 살고 있었으며, 그들의 가구 수와 비슷한 적산가옥의 소유, 입주, 매각 문제 등으로 갈등이 증폭됐기 때문이었다.

일본인을 대신해 행정을 처리할 사람이 없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설상가상으로 그해 9월 8일 한반도에 점령군으로 들어온 미군은 북위 38도선 이남에서 군정(軍政)을 실시한다는 미군사령부 명령 제1호를 선포한다.

그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음은 물론, 자생적인 국내 치안 조직도 해산시키고, 일제 식민 통치기구를 대부분 계승하였다.

특히 독립지사들을 고문하고 압박했던 경찰들의 복귀는 많은 사람의 우려를 자아냈다.

군산의 행정은 일제강점기 제도를 그대로 답습했으며, 치안도 일본식 경찰 기구를 활용하였다.

이처럼 관리 구조는 대부분 식민지 관치주의적 특성을 유지한 채 미군정 시기까지 이어졌다.

해방 정국에서 혼란이 진정될 때까지는 일본 관료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미군사령부 하지 중장은 일본인 관리들을 행정 요직에 남아 있게 하였다.

군산도 미군이 들어와 행정기관을 접수하여 기구를 개편할 때까지 일본인 관리들이 완장을 두르고 자리를 지켰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한국인의 불만이 높아지자 군정은 한국인을 등용하기 시작한다.

군산은 10월 5일 군정이 시작된다. 초대 군정관은 마우츠 소령이었다.

그는 일본인 관리 잔류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이 커지자 조선인 부윤(시장)을 물색한다.

당시 강력한 행정조직이었던 동장 연합회에서 김용철(金容喆)을 추천하고, 마우츠 군정관은 도의 승인을 받아 임명한다.

김용철은 충남 서천 출신으로 1년 6개월 동안 군산 부윤을 지냈다.

아무 준비도 없이 갑자기 찾아온 광복.

혼란스런 격변기임에도 군산은 체육의 도시로 거듭나기 위한 첫발을 내디딘다.

그해(1945) 가을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된 ‘자유해방경축 전국종합경기대회(제26회 전국체육대회)’에 육상, 야구, 축구, 농구 남자 일반부가 전라북도 명예를 걸고 출전한 것.

이후 군산의 체육은 각종 전국규모 대회에 참가하는 등 성장과 발전을 거듭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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