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21 '동령길' & ‘중화(中華)’+‘교우(僑寓)’='군산(群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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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21 '동령길' & ‘중화(中華)’+‘교우(僑寓)’='군산(群山)'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1.05.26 11: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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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초반 중국인들 이주 …군산개항 전후 산동성 중심 집단 이주 본격
한때 한강 이남 최고 교육시설 자랑… 군산화교소학교 최고 학생수만 200여명
장미동 시절 → 중앙동 캠퍼스→ 명산동으로 화교학교… 성장과 화재 등 원인
화재가 나기 전 명산동 옛 화교 소학교
화재가 나기 전 명산동 옛 화교 소학교

 

군산에 ‘영(嶺)’이라니….

군산에서 사용되는 ‘영(嶺)’은 우리가 생각하는 대관령이니, 추풍령 등과 같은 엄청난 산맥이나 높은 산의 고개를 생각하면 오산이다.

하지만 우연하게도 군산에서 이런 ‘영(嶺)’을 뜻하는 단어적인 의미가 있는 곳이 해망령과 동령이다. 보통 같은 고개라도 ‘치(峙)’는 자그만 언덕을 뜻하고, ‘현(峴)’은 일반 고개(재)를 말하는 접미사이다.

‘영’은 대관령, 추풍령, 노령 등에서 알 수 있듯 높은 산, 높은 산맥 등에서 주로 많이 쓰인다.

옛 선조들은 육지에서 살았던, 섬과 해안가에 거주해서 그런지 몰라도 이런 고개를 구경하기 쉽지 않아서인지 나지막한 이곳에 그런 글자를 넣은 것은 다소 의외다.

이곳의 이름은 일반적으로 군산진을 기준으로 작명됐을 것이다. 지금의 군산과 달리 임피현과 옥구현이 중심역할을 했던 까닭에 군산진은 그들 지역과도 약간 성격이 다른 수군 주둔지라는 점에서 생경한 공간이었다.

동령이 군산역사에서 의미있게 알려진 때는 군산개항과 긴밀한 관련이 있는 듯하다.

지금의 동령길과 달리 야산의 형태를 지니고 있었던 만큼 이곳의 토석 등이 해안가와 낮은 지역을 매립하는데 사용돼 오늘에 이르렀단다.

거의 형태가 사라졌지만 군산초등학교의 위치 등을 고려할 때 주변지역과 상당한 높낮이가 존재했을 것이다.

 

중국인들의 군산 이주… 군산개항과 함께 본격

군산개항으로 조계지 중 35곳은 중국인(청나라)들이 소유했고 상점을 운영하는 화상들이 주류를 이뤘다.

그러면 중국인들은 언제 군산으로 이주했을까.

19세기 말 강화도 조약이후 제국주의세력간 다툼은 한동안 계속됐다.

청나라는 외세침략으로 고통받았고 이들 중 외세배척 운동에 나선 이들이 의화단운동(1899~ 1901)을 일으켰지만 실패했다. 의화단운동의 중심세력이 살았던 산동성 사람들은 신변위협과 자연재해와 경제적인 문제 등으로 어려움을 겪자 지리적으로 인접한 조선으로 본격 이주하게 된다.

앞서 중국인들은 1882년 임오군란 직후에는 서울과 인천지역으로 청나라 군대를 따라 들어왔다. 이들의 전북 이주는 기록상으로 볼 때 군산개항(1899년) 때부터라 할 수 있다.

이후 인천과 원산에 거주하던 청나라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전국 항구들을 중심으로 이주해왔고 일제강점기엔 중국~ 인천, 인천~ 군산 등의 국내외 정기여객선 항로가 개설돼 빈번해졌다. 지리적인 여건에 따라 산동반도 중국인들이 중심이 됐다. 이 시기는 산동성의 대기근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게 정설이다.

화교의 군산 진출은 그들의 먹고 사는 문제와 맞물리면서 늘어난 것으로 보여진다.

군산의 중국인들은 본향과 같은 곳은 영화동이겠지만 청나라 멸망 후에는 노동자와 농민들의 이주가 집중된 곳은 군산항과 가깝거나 노동 및 농사 등으로 연명할 수 있는 농촌지역이었으리라.

일제강점기 들어서도 화교 이주는 계속됐다.

이런 단적 자료가 1924년 인천주재 중국 영사의 협조를 받아 ‘인천상무 군산분회’가 설치될 정도로 화교들의 이주가 활발했다.

군산에는 1910년 약 500명에 달하는 중국인들이 거주했고 일제강점기에는 1,200여명까지 늘어났다.

이들 화교들은 1960년대 전국 4만여명에 달했고 군산 등 전북지역에도 수천 명에 이르렀다. 그 후 도내 거주 화교는 급감, 군산화교는 2002년 기준 170여명으로 줄어들었고 감소세는 더욱 커졌다.

화교 급감 원인은 경제 활동의 제한과 이중국적 및 화교학교 불인정 등 정부의 차별정책도 한 이유이지만 산업화 이후 전북의 낙후 등도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화교의 고단한 삶과 토착화… 군산의 왕서방 이야기

화교들의 결혼 사진
화교들의 결혼 사진

 

계속된 중국인들의 이주는 또 한편으로 그들의 활동영역을 넓히는 상황을 맞는다.

우리는 이들과 본토의 중국인과 구분하는 말로 ‘화교(華僑)’라 칭한다.

이 말의 연원은 어디에서 왔을까.

중국인들이 자신들 스스로를 높여서 표현한 ‘중화(中華)’란 말과 남의 집이나 타향에 임시로 머물러 사는 ‘교우(僑寓)’란 단어 의미에서 각각 따온 말이다.

화교들의 주요 직업군으로 상점을 운영하는 상인 화상(華商), 도시 인근에서 채소를 재배하는 농민 화농(華農), 육체노동을 하는 노동자 화공(華工) 등이었다.

이들은 생존을 위해 한국인 및 일본인과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했다. 특히 중국인 노동자로 불린 화공은 일명 쿨리(苦力)라 불리며 주로 부두 하역장 및 건설현장에서 한국인 노동자와 경쟁을 해야 했다. 이로 인한 두 민족의 갈등도 존재했지만 그들은 묵묵히 군산사회의 일원으로 자리잡았다.

일제강점기 화교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그 세력을 형성했는데 크게 두각을 나타낸 분야는 포목점 운영과 채소재배 분야였다. 이들 중 일부는 음식점을 차려 중화요리를 선보였고 지역의 유명세를 오늘에 이르게 하고 있다.

화상들은 영화동(과거 전주통) 인근에 도매 포목점을 운영했고 고품질의 비단과 옥양목 등으로 전국에 자리한 화교판매망을 통해 포목상권을 키워갔다.

화농들은 사정동, 개정동, 회현면, 삼학동 현 대우아파트 일대 등 도심 인근에서 밭을 경작했다. 과거 우리가 미국 등지로 이민, 하루종일 일만 하던 사람들로 보여졌던 것처럼, 이들도 일벌레 왕서방으로 기억됐었다는 게 그 당시 우리 선조들의 기억이다.

 

이웃사촌 화교문화… 유교에 바탕을 둔 같은 듯 다른 문화

화교들은 언어와 생활풍습이 다른 나라에 이주해 살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해왔을 뿐 아니라 2세들의 정체성 유지를 위해 학교를 세워 언어와 문화를 가르쳐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를 형성하게 된다.

우리와 중국은 수천 년 동안 교류하면서 비슷한 전통과 문화를 형성한 유교문화권이었다.

한국의 설에 해당하는 춘절과 추석에 해당하는 중추절이 있다. 춘절은 음력 1월 1일로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성묘와 제사를 지내며 집집마다 한해의 복을 기원하는 춘련(春聯)과 연화(年畵)를 붙인다.

중추절은 음력 8월15일로 제사를 지내고 소원을 빌며 가족들과 월병(月餠: 둥근 밀가루과자)을 나눠 먹는다.

결혼은 중매로 맺어지는데 신랑과 신부가 처음 만나 서로 마음에 들면 사진관에 가서 사진을 찍고 헤어진다. 이후 중매인을 통해 약혼식과 결혼식 날짜를 정한다.

결혼식 단상에는 주례외에도 신랑 및 신부측 중매인과 혼주들이 올라가 식을 진행하는 형태다.

장례의 경우 무덤 형태는 기본적으로 중국의 무덤형식을 따르고 있다. 부부의 경우 합장묘로 만들었으며 무덤 내부는 남녀의 공간을 구분하되, 영혼이 서로 이동하는 작은 통로를 만들었다.

화교의 본격 이주는 군산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특히 120년 화교 이주 역사 중에 가장 영향을 미친 것은 중국 음식의 유입이라 할 수 있다.

 

화교 교육도시 ‘군산’… 한강 이남 최초 교육시설 군산화교소학교 등장

군산은 한때 전북화교 중심지이자 교육의 중심지였다.

1941년 군산의 화교는 1,200여명이었는데 취학아동은 50여명에 달했다.

화교소학교는 서울과 인천에 각각 한곳씩만 있어 극소수만이 진학했을 뿐 대부분 진학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군산화교들은 모금 활동을 하며 학교설립을 추진, 장미동의 군산중화상무회 사무실을 개조해 1941년 10월 학교 문(중국어문강습소)을 열게 됐다. 개교 당시 군산과 김제, 전주 등 인근에서 유학왔는데 그 연령대는 8살부터 20세까지 남녀 60명이 공부했단다.

교육방식은 중화민국의 교육제도를 따랐으며 6년 과정으로 운영됐다. 8월에 새학기가 시작됐고 12월에 겨울방학, 이듬해 2월에 2학기가 시작되는 학제였다. 7월에 여름방학과 함께 졸업식을 치르는 구조였다.

수업은 매일 6시간씩 진행됐고 수업내용은 중국의 북경어를 중심으로 산술, 자연, 자연, 주산, 음악, 체육, 미술 등을 배웠다. 주 3회 일본어 등도 함께 배웠다.

광복 후 대전 이남의 많은 화교 학생들이 몰려들어 1947년에는 200여명에 달해 화교소학교로 개칭해 중앙동으로 확장 이전했지만 1949년 화재로 본관이 전소되는 아픔을 겪었다.

이후 명산동의 옛 일본인의 유곽건물로 이전했으나 이마저도 화재로 잃었고 힘을 모아 2002년 11월 교사를 신축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국전쟁은 전국에서 피난 온 화교들의 피난처가 됐지만 상당기간 피난민들의 숙소로 이용됐고 2층에서 수업하는 힘든 과정도 겪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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