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46] 군산의 근대교통 발달…자전거 시대 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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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46] 군산의 근대교통 발달…자전거 시대 개막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1.11.16 13:14
  • 기사수정 2022-01-17 09:5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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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군산서 첫선 1910년 전후 추정 … 1912년 전남 고흥지역 선교에 활용
도내 최고 도시 ‘군산’… 1920년대 말 자전거점 개업 등 자전거시대 선도
당시 ‘경제중심도시’ 군산, 자전거대회 적극 참여했다는 기록물 적지 않아

일제강점기 들어 군산에서 특징적인 변화가 교통의 발달이다.

군산의 근대교통시설은 개항 이후 큰 변화가 있었는데 이 중에서 핵심적인 흐름은 과거 가마와 수레 등과 전혀 교통수단의 등장이다. 이는 하드웨어적인 측면에서 엄청난 변화를 수반했다.

증기선 및 증기기관차, 자전거, 자동차 등의 등장에 이어 군산선 개통(1912년), 전군가도의 포장(1908년) 등 식민지 지배 근간을 이룬 SOC(사회간접자본)까지 갖춰졌다.

이런 변화는 교통수단의 대변혁을 초래했다 할 수 있다. 다만 오늘날에 비해 다소 원시적인 형태였지만 근대 조선인에게는 충격적인 상황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근대기를 넘어서서 자전거가 보급되면서 다양한 형태로 발전을 거듭했을 뿐 아니라 초기에는 교통수단과 짐수레용 등으로도 주로 이용됐다. 최근에는 운동과 레저, 선수용 자전거로 진화를 거급하고 있다.

특히 오늘날의 전군도로 원형 또는 전군가도는 1908년 완공된 도로로 전주와 군산을 이어주는 도로였다. 이 도로는 2002년 자동차전용도로 개통 이전만 해도 전주 ~ 김제 (익산) ~ 군산을 잇는 전북 최고로 중요한 도로였다.

일제강점기의 전북 거점도시 전주 ~ 곡창지대 익산‧김제 ~ 항구 군산을 이어 쌀을 수탈하기 위해 만들어진 우리나라 첫 아스팔트 포장도로.

이 도로 때문에 금강의 수운교통이 완전히 쇠퇴해버렸는데, 대표적으로 조선시대 최고 내륙도시 중 하나였던 강경읍이 크게 쇠퇴하는 상황으로 변했다.

일제강점기 후반에는 공항도 군산에서 개항됐다.

시기별로 우리나라에 가장 빠르게 등장한 것은 인력거였다.

 

인력거의 등장

인력거는 일본어 ‘人力車(jinrikisha)’의 한자음을 따서 불린 명칭이다.

일본에서는 서양의 마차 형태를 본 따 1869년부터 인력거를 만들기 시작하였고, 우리나라는 1882년께 일본에 다녀온 박영효가 한성부판윤으로 재직하면서 서둘러 보급했다고 전해진다.

인력거는 도입 당시에는 관용 교통수단으로 활용되었으나, 1890년대 중반부터는 지금의 서울 시내와 서울~ 인천 간을 운행하는 등 상업적 이용으로 확대됐다.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인력거는 바퀴 가운데에 ‘마에다(前田)’라는 회사명이 확인되는데, ‘마에다’는 1860년대부터 1989년까지 운영되었던 인력거 공방으로 알려져 있다.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인력거는 두 개의 바퀴 위에 한 사람 내지 두 사람이 앉을 자리를 만들고 비와 햇볕을 막을 수 있도록 덮개를 씌운 간단한 구조로 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때 열차 도착시간 때면 차방(車房)에서 대기하다 군산역으로 몰려가 손님을 태웠는가 하면 전화나 인편으로 부르면 달려가곤 했단다.

 

‘자전거 발명’ 교통수단 대변혁

‘프랑스 vs 독일’ 원조 논란 속 발달 촉매제

교통수단 등장 순서는 기차(1820년께)가 가장 빨랐고 자전거(1860~ 90년대), 자동차(1880년대), 비행기(1903년) 등이었다.

자전거 시원에 대한 논쟁은 뜨겁다.

역사가들은 1790년 프랑스의 귀족 콩트 드 시브락이 만든 ‘셀레리페르’를 자전거의 시초로 본다. 이것은 놀이공원의 목마에 바퀴를 단 형상이다. 셀레리페르는 자전거에 대한 최초의 아이디어가 ‘말 없는 마차’에서 나왔음을 보여준다.

독일의 명문가 귀족이던 바덴대공국의 카를 폰 드라이스는 1810년대에 ‘드라이지네’라는 2개의 나무바퀴 자전거를 공개하고 특허를 신청했을 때, 바덴 대공국 특허청 감독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걷기 외의 방식으로 인간의 동력을 활용하는 것은 적합지 않다’며 특허권 인정을 거부했다. 드라이지네는 페달이 없었기에 발로 땅을 찬 힘으로 굴러갔다(도보 속도의 2배로 달렸다 한다).

연구 시발은 인도네시아의 화산 대폭발로 초래된 말의 먹이인 귀리 생산이 어렵게 되자 말을 이용한 업무수행이 쉽지 않아 그 대체 운송수단의 필요성 제기된 것이다. 산림감독책임자인 그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드라이지네라는 발명품을 만들어냈다.

여기에 1861년 ‘역사적인’ 페달을 달아 본격 자전거 ‘벨로시페드’(‘빠른 발’이란 뜻)의 시대를 연 사람이 파리의 대장장이 피에르 미쇼다.

독일이 몸체를 만들고, 프랑스가 ‘화룡점정’ 격인 페달을 다는 바람에 그러잖아도 사이가 좋지 않던 독일과 프랑스는 또 하나의 분란 거리를 갖게 됐다.

전 유럽에 자전거 붐이 일어난 1890년대 초, 독일의 라이더들이 드라이스를 ‘자전거의 아버지’로 추대하자, 프랑스인들은 ‘자전거 창안자’ 대장장이 미쇼의 동상을 세우는 것으로 응수했다. 독일과 프랑스의 자전거 ‘원조’ 경쟁은 자전거 문화를 여행과 경주로 분화, 다양화하고 자전거의 기술적 발전에도 큰 도움을 줬다.

벤츠, 미쉐린, 던롭 등의 오늘날 자동차 관련 산업의 모체가 자전거를 만들거나 부품을 조달해주던 업체로 시작된 것은 우연한 일은 아니었다.

 

국내 최초 자전거는

우리나라에 자전거가 선보인 것이 구한말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이지만, 처음 자전거를 타고 다닌 사람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윤치호라는 설도 있고 예조시랑 고희성이 탔다는 말도 있지만, 그보다 앞선 1884년에 미국공사관 무관인 해군장교 포크가 제물포에서 서울까지 자전거를 타고 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종 황제가 의사 올리버 애비슨의 자전거를 보고 “어떤 원리로 바퀴가 넘어지지 않는지” 묻는 등 큰 관심을 보였다는 기록도 있다.

아무튼 전국의 알려진 것은 미국인 선교사들도 한몫을 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신문물 유입의 창구였던 군산은 자전거의 출현도 도내 다른 곳보다 빨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조선인에게 자전거는 낯선 교통수단이었다.

개화기 초 선교사들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그들의 다리에 이상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빠르게 자전거가 보급돼 1930년대 들어 군산의 자전거포(일종의 대리점)만 3~ 4곳에 달했다. 우리나라에서 자전거경주대회는 인천과 서울 중구 신흥동 등에서 본격화됐다.

빨리 등장했던 인천 등지에서는 자연스럽게 자전거경주대회도 빈번하게 열렸다.

우리나라에서는 최초의 자전거 소유자에 대한 관심보다 ‘자전거 영웅’ 엄복동(1892~1951)이 더 역사적인 의미를 더해준다. 10대에 평택의 자전거포 ‘일미상회’에서 일한 엄복동은 자전거 행상팀을 따라 서울과 평택을 자전거로 오가며 아마추어로 ‘훈련’을 쌓았다. 그는 1913년 ‘전조선자전차경기대회’에 중고 자전거를 몰고 출전, 우승하면서 조선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1925년 10월에 열린 전조선자전거경기대회에는 경성에서 손꼽히는 십여 명의 기생 선수들이 참가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또한, 우편배달부와 양조장 혹은 냉면집 배달원들은 '인천자전거점원구락부'라는 일종의 동호회를 조직하고 전조선남녀자전거경주대회를 주최하기도 했다.

배달원과 선수의 구분이 모호했던 시절에는 자전거급 종별경기대회가 종종 열렸다. 코스 달리기 외에 물건을 싣고 달리는 실용 운반 경주, 장애물을 피해 달리는 실용차 장애물 경주 등의 종목이 포함되었다.

광복 후 자전거경주대회의 열기는 여전했다.

1946년 경향신문 주최 제1회 전국지역대항자전거경기대회가 열려 인천과 서울을 비롯해 수원, 군산, 목포 등이 참가했다.

군산이 전국 몇 안되는 도시 중 자전거경기대회에 참여했다는 점은 도시 규모를 고려할 땐 당연한 흐름이었지만 오늘의 눈으로 볼 땐 다소 의아한 내용이기도 하다.

 

군산, 자전거 누가 처음 탔을까

선교사들, 자전거 활용 호남선교

찌르릉 찌르릉 빗켜나세요/자전거가 갑니다 찌르르르릉/저기가는 저영감 꼬부랑영감/어물어물 하다가는 큰일납니다/

찌르릉 찌르릉 빗켜나세요/자전거가 갑니다 찌르르르릉/오불랑 꼬불랑 고개를넘어/비탈길을 스스륵 지나갑니다/

찌르릉 찌르릉 이 자전거는/울아버지 사오신 자전거라오/머나먼 시골길을 돌아오실제/간들간들 타고오는 자전거라오/

<동요 ‘자전거’ 1932년 ‘아이생활’>

 

동요작가였던 목일신(1913~ 1986)은 전남 고흥 흥양보통학교(현 고흥동초교) 5학년 때 ‘자전거’라는 동요 가사를 작사했다.

그리고 1932년 기독교 어린이잡지 ‘아이생활’에 발표했다.

군산의 경우 이 작품의 배경으로 볼 때 이곳보다 훨씬 빠른 선교 역사가 있었던 지역이었던 만큼 적어도 이 시기(1912년)보다 좀 더 이른 때에는 자전거를 선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자전거 타는 법을 알려주거나 도로 여건이 좋았던 군산에서 먼저 자전거를 탔을 것은 분명하다.

 

1930년대 옛 군산역사 주변에 놓여 있는 수많은 자전거들. 당시 역주변에 정차된 자전거들로 미뤄 군산의 자전거시대가 본격 개막됐음을 보여주고 있다. / 사진= 군산시제공
1930년대 옛 군산역사 주변에 놓여 있는 수많은 자전거들. 당시 역주변에 정차된 자전거들로 미뤄 군산의 자전거시대가 본격 개막됐음을 보여주고 있다. / 사진= 군산시제공

 

이 작품의 목일신의 증언에 따른 자전거를 활용한 서양인 선교사들의 활동을 기억한 것으로 볼 때 더욱 그렇다.

1894년 3월 미국 선교사 레이놀즈는 드루 선교사와 함께 호남선교를 위한 답사에 나선다.

인천항에서 증기선을 타고 군산항에 도착해 육로 이동했다. 전주‧ 김제‧ 고창‧ 영광‧ 무안‧ 목포, 그리고 목포에서 다시 배편을 이용해 진도 완도 거금도(현 고흥군) 흥양(현 고흥읍)에 이르렀다. 여기서 육로로 낙안‧ 순천‧ 여수까지 갔다.

고흥에 도착한 선교사 일행은 ‘양반촌에서 대접을 받았다’고 답사일기를 남겼다.

향토사학자들은 그 양반촌이 당시 고흥 세력가이자 고흥 최초의 기독교인이 된 독립운동가 신우구(1854~1927) 가문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2차 답사는 1897년 전남 해안을 중심으로 유진 벨과 오웬 선교사에 의해 이뤄졌다. 레이놀즈, 드루, 오웬 등이 의· 약학 전공자들이었으므로 한의사인 신씨 가문과 호흡이 맞아 의료선교를 방편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들의 답사 경로 중 군산‧ 전주‧ 목포‧ 광주‧ 순천은 호남선교의 거점이 됐다. -- 중략---

1912년 무렵 미국남장로회 순천선교부가 본격 활동했다. 선교회 측이 순회 목회용 자전거를 목일순의 아버지 목치숙에게 기증한 것으로 보인다. 요즘 시세를 고려할 때 비싼 자동차 한 대 값이었다는 것. <국민일보 2018년 1월19일자 보도>

목일신 집안 이외에도 1945년 전후 전주예수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한 마리엘라(1923~ )씨 집안도 호남 각지에서 자전거를 타고 선교했다는 증언이 있다. 초청을 받고 광주를 방문한 그는 2005년 11월 초 노컷뉴스와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선교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그의 아버지와 오빠 등도 군산 등지에서 선교활동을 했었다고.

 

1930년대 자전거시대 진입

군산의 자전거점 잇따라 개업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군산 평화동의 '호남 자전차'/사진 제공=김만기 씨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군산 평화동의 '호남 자전차'/사진 제공=김만기 씨
군산의 자전거포/사진 제공=김만기 씨
군산의 자전거포/사진 제공=김만기 씨

 

군산이 대중에 알려지면서 1920년 말 이후 자전거점 또는 자전거포가 하나둘씩 생겨났다.

처음에는 일본인에 의해 도입됐다가 당시 군산사람들도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자전거점을 운영하는 상황으로 발전했다. 일제강점기에는 3~ 4곳의 자전거점이 군산에 운영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자전거점은 장미동과 월명공원, 옛 영동파출소 등에서 영업하고 있었다는 게 일반적인 기억이다.

이런 기억들은 본보 군산야구 100년사를 기고했던 조종안 기자의 보도 내용도 참조할 만 하다(그가 직접 취재한 이규철옹과 인터뷰했던 것). 이규철옹은 1932년 지금의 장미동 일종의 '정미소 거리'에 '전북자전차점'을 냈다.

그는 착실히 돈을 모아 1944년 소화통 건물로 확장 이전하였다. 그때 상호도 '아라이 자전차점'으로 바꾼다. 상호 변경에서도 식민지 백성의 아픔이 묻어난다. 총독부 명령으로 '전북'을 '아라이'로 바꾼 것.

이런 기억물은 다른 이에게도 있다.

김만기(73) 전 호남매일신문 업무부국장의 부친(김석엽(작고))도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평화동에서 호남자전거점이란 이름으로 개업, 운영했단다.

1930~1940년대 국내에서 유통되는 자전거와 관련 부품은 모두 수입품이었다. 가격도 엄청나게 비쌌다. 군산의 양조장과 전기회사, 우체국, 대형 방앗간들이 주요 고객이었고 일부는 고가(지금의 외제 승용차에 버금가는 대접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여서 직접 사는 경우도 있었지만 보통은 짐자전거를 대여하기도 했단다.

김 전 부국장과 그의 친누나 등 그 가족들에 따르면 선친은 일본으로 건너가 선진 자전거 기술을 직접 배워서 군산에 자전거점을 열었고 무역회사까지 운영하며 관련 부품들을 직접 수입, 군산은 물론 전주와 익산 등 도내에 대부분 공급했단다.

이곳의 종업원만도 7~10명에 달할 정도였다. 자전거 수리(타이어 펑크 등), 자전거 대여, 거래처 주문배달, 부품 판매, 도내 자전거점 부품 배달 등에 이르기 담당했다.

이런 규모로 볼 때 호남자전거점은 군산에서 가장 큰 곳 중 하나였고 도내에서도 따를 곳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 시절 군산의 인구는 전주와 비견될 정도였고 경제적인 면에서도 앞섰다는 게 통설이다.

그의 선친은 사업에 성공 옛 군산세무서가 있었던 중앙초 주변에 타이어 공장을 운영했고 해망동에 주물공장까지 사업을 확장했단다. 이 여세로 누이들이 다니던 인근 초등학교에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한다.

한국전쟁 후 어려운 사업을 접고 제재소를 운영하며 재기에 성공, 군산에서 몇 번째 안되는 오토바이를 탔던 지역인사였단다.

군산 기네스 자전거점

삼천리자전거 평화동대리점 고광오 사장

군산에서 가장 오래된 자전거점을 운영하는 고광오 사장(삼천리자전거 평화동대리점)이 고객들의 상담을 받고 있다. / 사진= 투데이군산
군산에서 가장 오래된 자전거점을 운영하는 고광오 사장(삼천리자전거 평화동대리점)이 고객들의 상담을 받고 있다. / 사진= 투데이군산

 

군산은 긴 자전거 역사의 고장답게 50년 이상 원도심을 지켜온 자전거점 대표가 있다.

그 주인공이 삼천리자전거 평화동대리점 고광오(79) 사장.

고 사장은 군 제대 후 1967년 기술을 연마해서 당시 사람들이 수없이 오가는 곳에 양키시장 앞에 자전거점을 내고 지킴이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 기간만도 54년째.

자전거 기술로 자녀들을 잘 교육했을 뿐 아니라 주변에서 자전거 전문가로도 호평을 받고 있다.

그 당시 도심 풍경은 새벽 통금이 막 해제되면 커다란 막걸리통을 싣고 바쁘게 오가는 짐자전거의 행렬이 눈길을 끌었다. 그 다음이 쌀가마 3~4개씩을 실은 짐자전거들이 팔마 쌀가게들이 집중된 곳으로 향하는 것도 늘 상 있었던 광경 중 하나였다.

얼마 전 이곳을 취재차 방문했을 때도 고 사장님과 연배가 비슷한 노인층들의 방문이 이어졌다. 어느 부분이 고장났는데 고쳐달라느니, 점검 후 관련 조언과 기술적인 진단으로 쉴없이 답변을 하고 있었다.

요즘 자전거 기술자는 젊은이들보다는 노년 기술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상황이어서 조만간 기술 전수도 끊길 형편이다. 한때 자전거 기술자라면 장가가기에도 좋았던 호시절이 있었다는 게 그 시절의 추억물인데…

고 사장은 “오늘날은 기술을 중시하지 않아 자녀는 물론 다른 이들에게 기술전수도 못하게 돼 안타깝다”고 새삼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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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누스 2022-02-01 22:29:48
인물 좋으신 고사장님 얼굴과 가게 매장에 가득한자전거들이 보이지않아 아쉽지만 이렇게나마 뵙게되니 무지 반갑습니다! 급히 변하는 세월의 수상함따위에 흔들리지 않고 우직하게 그자리 지켜오신 고집에 박수를 보냅니다. . 언제든 그곳에서 고사장님 볼 수 있도록 건강하시길. .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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