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45] 중동과 서래포구, 그리고 주변의 새로운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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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45] 중동과 서래포구, 그리고 주변의 새로운 변신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1.11.08 11:06
  • 기사수정 2022-01-17 09: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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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기 직전까지 중심항구… 중동당제 오랜 역사로 그 역할 짐작할 뿐
주민의 안녕과 복 축원…풍년‧ 풍어 기원 지역특성상 ‘용왕제적 성격’
일제강점기 이후 배후 산업단지로 변모… 상권 중심지에서 쇠락한 항구

중동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명확하지 않다.

군산의 중심위치이자 과거 어촌의 중심마을이었기에 중동이라는 명칭으로 불렸을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 이곳은 북쪽으로 금암동, 남쪽으로 대명동, 동쪽으로 경암동과 구암동, 서쪽으로 신영동 등과 이웃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호남평야의 쌀을 바탕으로 한국주정이 운영되었지만 사라진지 오래다. 1980년대까지 중동은 군산수협 동부어판장의 핵심배후지역으로 신영동에서 금암동 째보선창까지 이어지는 어업관련 및 상거래의 한 축을 이뤘다.

중동 돌산과 중동호떡 부근에서 해망로를 넘어 경포천과 인접한 해안가로 가면 옛 영화를 자랑했던 서래포구가 위치한다.

 

금강하구 주변 내항에 정박해 있는 소형어선들. / 사진=투데이군산
금강하구 주변 내항에 정박해 있는 소형어선들. / 사진=투데이군산

 

경포천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서래포구는 오늘날의 모습과 달리 왕성한 항구 역할을 했던 곳이었다.

중동과 금암동, 경암동, 구암동 등은 매립을 거듭해서 육지로 변해 있었던 만큼 100년 전에는 갯벌과 갈대밭으로 둘러싸여 있었을 것이다.

중동과 경암동의 경계를 이루는 경포천 주변의 서래포구는 요즘 소형어선들만 남아 있었지만 1960년대까지 해도 고깃배들이 적지 않게 오갔다 한다.

주변은 서래교와 연안도로의 선형변경 등으로 과거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서래장과 경장시(경장시장)가 경포천을 끼고 열렸단다. 경포천 권역은 일제 매립공사와 일제강점기 때 정책적으로 육성한 째보선창의 등장 등으로 엄청난 변화를 거듭했다.

이곳은 제법 그럴듯한 항구로서 기능을 했던 흔적 중 하나가 째보선창 앞바다의 빨간등대가 여전히 모양을 바꿔가며 그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째보선창과 서래포구 앞에 있는 금강하구의 빨간등대가 묵묵히 소형어선들의 안전을 지켜오고 있다. / 사진=투데이군산
째보선창과 서래포구 앞에 있는 금강하구의 빨간등대가 묵묵히 소형어선들의 안전을 지켜오고 있다. / 사진=투데이군산

 

서래산의 당집 ‘중동당산’… 수백년 역사의 당산제

중동당산 주변 벽에 붙어 있는 흑색필름의 옛 당산제가 백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가는 듯하고 있다. / 사진= 투데이군산
중동당산 주변 벽에 붙어 있는 흑색필름의 옛 당산제가 백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가는 듯하고 있다. / 사진= 투데이군산

 

서래포구의 상징성을 증명이라도 하는 곳이 중동당산.

이곳의 당산제가 중동당산제다. 각종 구언과 자료들에 따르면 중동당제는 2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군산의 유일한 동제(洞祭)로 이 제사의 목적은 주민의 안녕과 복을 축원하고 풍년과 풍어를 기원하였음을 제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1481년)의 기록을 바탕으로 볼 때 조선시대 초기부터 지속된 당제라고 추측된다. 한때 지금의 중동당산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중동노인회관 2층에 마련된 당집에서 제를 지냈었다. 물론 과거 본래의 당집이 있었지만 그 흔적들이 소리없이 사라지는 바람에 그 역할을 했단다.

서래산에 있던 당집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기와집이었고 그 옆에 당지기 할머니가 당을 지켰다고 한다. 당제의 대상은 산신과 당할아버지, 당할머니, 이공, 조공, 오공 등으로 정월 열나흘에 지냈으나 요즘 대보름날 지낸다.

 

서래포구 마을에 위치한 수백년 역사의 중동당산. / 사진=투데이군산
서래포구 마을에 위치한 수백년 역사의 중동당산. / 사진=투데이군산

 

현재 당에 모신 신령들 화상(畫像)은 현 위치로 옮기면서 새로 그려서 모셨고 서래산의 당집 화상은 보존되어 있지 않다.

주민들은 풍물패를 앞세우고 거리제를 지냈으며 만조가 되는 시간에 맞춰 금강의 지류인 경포천 변(깨꼬랑)에 돼지머리와 음식을 차려놓고 풍어제(용왕제)를 지냈는데, 오늘날도 그 절차를 답습하고 있다.

 

‘서울로 가는 포구’ 경포(京浦)의 변천

중심항구에서 한적한 어촌포구로

군산 앞바다 / 올 때마다 가라앉는 것 같다 / 군산 앞바다, / 시커먼 물이 돌이킬 수 없도록 / 금강하구 쪽에서 오면 / 꾸역꾸역, 수면에 배를 깔고 / 수 만 마리 죽은 갈매기 떼도 온다. / 사랑도 역사도 흉터투성이다. / 그것을 아등바등, 지우려고 하지 않는 바다는 / 늘 자기 반성하는 것 같다 / 이 엉망진창 속에 닻을 내리고 / 물결에 몸을 뜯어 먹히는 게 즐거운 / 낡은 선박 몇 척, / 입술이 부르튼 깃발을 달고 / 오래 시달린 자들이 지니는 견결한 슬픔을 놓지 못하여 / 기어이 놓지 못하여 검은 멍이 드는 서해.

-안도현 시인의 군산앞바다-

안도현 시인의 군산 앞바다란 시가 사라진 군산항구의 영화와 오늘의 모습을 너무도 잘 노래한 것같아 이번 편에 담았다.

연안도로가 개설되면서 만들어진 다리가 서래포구를 가로막고 있어 마치 갇힌 듯한 모습의 소형어선들이 오늘의 서래포구를 잘나타내고 있다. / 사진=투데이군산
연안도로가 개설되면서 만들어진 다리가 서래포구를 가로막고 있어 마치 갇힌 듯한 모습의 소형어선들이 오늘의 서래포구를 잘나타내고 있다. / 사진=투데이군산

 

군산 상권 중심지는 400년 역사를 지닌 서래장에서 출발한다.

조선 시대 서래장터는 충청·전라도 각지에서 생산되는 곡물과 농산물, 건어물, 직물 등의 집산지였다. 지도에 나타나듯 이 지역은 초가집이 빽빽한 어촌으로 고깃배와 장삿배가 쉴새 없이 드나들던 포구였다.

해방 후에도 경포교(물문다리) 부근에 군산어업조합 관할 어판장이 있었다.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전라우도 군산진지도'를 보면 옥구군 경포리에 큰 하천이 흐르고 여기에 긴 다리 하나가 표시되어 있다.

과거의 '아흔아홉 다리' 부근이다. 오늘날의 송경교가 위치한 곳이라 할 수 있다.

이곳과 서래산 아래에 큰 장이 섰다. 조선 시대부터 오일장이 섰던 '설애장터(경장시장)'이다. 경포(京浦)란 지명은 호남지방의 풍성한 물질과 재화를 모아 서울로 올려보낸 데서 유래한다.

경포는 '서울 京'에 '浦'는 '개(개 포 字에서 연원됐기 때문에)'이므로 우리말 발음으로 '서울개'라 했던 것. 이후 설개→ 설애(슬애)→ 서래 등으로 어원이 변이되어 오늘에 이른다.

소설 탁류에서는 '스래'로 나온다. 옛 노인들은 경포천 서쪽(중동)은 '안스래', 동쪽(경암동)은 '바깥스래'라 하였다.

경포는 서울을 비롯해 강경, 전주, 태인 등 전국 각지로 물화가 오갈 정도로 큰 포구였다. 군산 개항 이후에도 한동안 활기를 띠었다.

400년 역사의 물산의 집산지도 1918년 장재동에 상설시장을 개설하고 1920년대 중반 째보선창을 조성하면서 쇠락했다. 일제식민통치가 강화되면서 상권을 빼앗기고 실질적인 기능을 째보선창에 넘겨주며 오늘의 작은 포구로 전락했다.

그래도 1960년대 후반엔 지금의 중동로터리 주변까지 고깃배가 드나들었으나 그 시절 주변이 매립되면서 이곳의 물류 및 배후산업단지 역할은 수명을 다했다. 조선소와 목재소, 성냥공장, 백화공장 등은 물론 인근의 경성고무 등이 있어 그야말로 근대기 군산의 핵심 산업단지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그 잔영들이 일부 작은 조선소와 옛 합판공장 흔적들이 아닐까.

 

서래포구의 변신

‘어촌뉴딜 300사업’ 으로 어업박물관 등 관광자원

경포천/투데이 군산DB
경포천/투데이 군산DB

 

일제는 개항 후 자국민들의 생활터전과 행정타운을 ‘조계지(租界地)’로 삼아 조선침략의 교두보로 삼았는데 군산항의 조계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일강제병합을 통해 초기에는 기존 항구 기능을 하던 곳을 쇠락시키는 정책을 사용했다가 공동화 또는 폐허공간을 만들었다. 도시팽창이 진행되자 나중에 그곳을 헐값에 사들여 재개발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경포천 주변권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금암동, 중동, 경암동 등과 같은 바닷물이 드나드는 간석지가 대표적이었다. 그 시기가 1920년대와 그 이후다.

해안 매립공사를 통해 일제의 기마경찰훈련장이었던 경마장과 공설운동장, 조선소, 목재소, 제염소 등의 공간을 만드는 한편 차례로 그 영역을 확대해 오늘날의 육지화 형태로 조성한다.

그 흔적들이 조금씩 변신을 거듭했는데 해방 후에는 신흥목재, 한국주정, 우풍화학, 군산화력발전소(현 군산복합화력발전소) 등의 등장이다.

1967년 준공된 군산화력은 2004년 문을 닫고 군산복합화력발전소란 이름으로 2010년 9월 준공과 함께 재가동,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은 한때 쇠락의 현장처럼 방치되어 있었으나 연안도로 개설과 노선변경 등으로 주변이 휴식공간으로 변했을 뿐 아니라 카페들이 하나둘씩 들어서 새로운 모습으로 변하고 있다.

그중 눈길을 끈 곳이 오산상회다.

이곳은 원래 배에서 노, 닻, 키 따위의 기구를 파는 선구점이었단다. 시간이 흘러 이곳 주변은 낙후로 상징적인 공간처럼 폐점을 거듭했다.

이곳의 새로운 주인이 ‘카페 오산상회’를 개장했는데 폐선에서 해체되어 버려진 선구를 활용, 멋진 공간을 만들어 관광객들과 주민들을 손짓하고 있다.

여기에다 민간의 노력에다 서래포구의 어촌뉴딜300사업 선정도 지역맞춤형 어촌특화개발사업으로 이어져 기대감을 키우고 있다.

호안 정비, 물양장 조성, 어구작업장 조성 등 기반시설 현대화 및 어촌박물관, 산책로, 폐선 전시관, 어촌체험관 등의 특화 사업과 각종 사업이 이어지고 있다. 오랜 항구의 스토리텔링 역사가 어떤 변화를 거듭할지가 주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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