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41] 군산 토박이들의 추억의 먹자골목 ‘세느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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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41] 군산 토박이들의 추억의 먹자골목 ‘세느강변’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1.10.12 15:31
  • 기사수정 2022-04-18 09: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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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 공설시장 인근 뒷골목길 집단단지… 국밥집들 한국전쟁 후 더욱 번성
1970년대 중반 개천 복개로 탄생… 새로운 공간 만들어져 먹자골목 등장
과거 부엌문화의 핵심인 땔감나무 판매장터 불야성… 돼지국밥촌의 원조격(?)
신영동의 전통순대국밥 집단촌. / 사진= 투데이군산
신영동의 전통순대국밥 집단촌. / 사진= 투데이군산

 

군산전통시장의 주도로는 구시장로다.

이곳에서 동신영길로 가면 공설시장이 자리잡고 있고, 구시장로에서 신금길로 접어들면 신영시장이 죽 늘어서 있다. 그야말로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모든 상가와 먹자골목 등이 모여 있는 공간이다.

특히 눈길을 끈 곳은 군산에서 보기 드물게 집단으로 형성된 신영동의 전통순대국밥 집단촌.

지역 국밥 마니아들은 이곳을 ‘세느강변’이라 부른다. 왠지 국제관광도시이자, 전북의 개항 전초기지다운 감각이 묻어나는 곳이다. 

신영동 먹자골목은 1918년 공설시장이 들어서면서 상가를 이루다가 1970년대 중반 샛강을 복개, 주변이 새롭게 주차장으로 변하면서 생긴 곳이다.

이곳의 본격화는 한국전쟁 이후라는 설도 있지만 시장 형성의 흐름을 고려할 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는 그렇다. 그때를 발전기라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일부 조합 관계자의 얘기처럼 그 시기에 시작됐다는 말은 좀 어폐(語弊)가 있는 듯하다.

하지만 순대국밥집과 같은 먹자골목은 장이 서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 말할 것 없이 자연발생적으로 들어선다. 시장에 일하던 사람이나 장을 보러 온 사람이 몰리는 곳이라면 싸게 먹을 수 있는 공간이 형성되게 마련이다.

다시 말해 5일장이 섰던 곳이든, 상설시장이 만들어졌던 곳이든 자연스런 현상 중 하나가 이런 골목의 뿌리다.

 

돼지국밥 집단촌 본격 생성

세느강변이란 이름으로 지역 명소 우뚝

공설시장과 5일장 등이 있었던 곳에 오늘의 신영동 먹자골목의 유래이자 역사이기도 하다.

군산 먹자골목의 시작은 째보선창 주변에서 비롯됐을 것은 분명하다.

그곳에서는 충청도의 안면도와 부안의 변산 격포 등에서 배로 실어 오는 질이 좋은 화목(火木)을 한 평 기준으로 쌓아놓고 손님에게 팔았는데 장의 규모가 커서 산탄조합이라는 조합이 결성될 정도였단다. 또 한 곳의 나무장은 현재의 구시장의 순대국밥 골목 앞 나무장이었다. 일제강점기 때에도 이곳은 국밥집이 즐비했고 국밥집 앞은 큰 공터였단다.

다른 곳들도 유사한 흐름은 얼마든지 있다.

부산과 경상도 지역민들은 돼지국밥을 무척 즐겨 먹는다. 구포시장은 물론 주변 거리에서도 돼지국밥 전문식당 간판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어떤 이들은 한국전쟁 피난 시절 부산에서 돼지국밥을 먹었다는 이유로 부산이 원조라는 주장을 펴는 이도 있지만 그런 설명은 꼭 논리와 부합한다고만 할 수 없다.

군산의 경우 그 시절은 물론 그 이전인 1920년대에도 나무장(시장) 등에 어김없이 돼지국밥을 전문으로 하는 먹자골목이 대거 존재했을 것은 분명하다.

옹기전 근처에는 째보선창으로 흐르는 샛강이 있었는데 지금의 동남아지역의 집들처럼 갯벌에 나무기둥을 박아 지은 집들이 아슬아슬하게 빼곡하게 서 있었단다. 깨끗한 물에서만 산다는 뱅어가 잡힐 정도로 물이 맑았을 뿐 아니라 각종 배들까지 떠다녀 단골들은 이곳을 프랑스 파리의 ‘샌강’이란 말을 빌려 운치 있게 ‘세느강변’이라고 불렀다는 것이 이곳 명칭의 유래다. 누가 처음 작명했는지는 모르지만 제밥 프랑스 풍의 낭만적인 말처럼 느껴진다.

이곳을 1970년대 복개공사와 함께 주차장으로 변하면서 국밥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가 약 10년 전에 먹자골목 특화거리 조성사업이 마무리됐다.

 

신영동 먹자골목 ‘생존 몸부림’…코로나 직격탄

군산의 세느강변으로 불렸던 신영동 먹자골목이 2013년 11월 리모델링을 끝내고 본격적인 영업에 들어가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시는 신영동 먹자골목 특화거리 조성사업을 2012년 6월부터 추진해서 2013년 11월 말께 마무리했다. 이 사업은 군산공설시장 진‧출입로 확보를 위해 무허가로 운영해 온 음식점들을 대대적인 정비차원에서 시작됐다. 시비와 도비 등 모두 6억 원의 예산을 투입, 간판 정비와 공작물 설치, 공동작업장 신축 등을 통해 마무리한 것이다.

이 특화거리 조성사업과 함께 이곳에는 군산전통 순대협동조합이 만들어졌다. 이전 국밥거리의 고민거리였던 위생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는 고기손질작업을 한데 모아서 할 수 있는 현대식 공동작업장을 마련하고 그곳의 환경문제를 말끔히 해결했다. 다만 다른 것은 각자(가게마다)의 노하우를 맘껏 발휘, 영업하는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이곳에서 들어와 영업 중인 국밥집은 10여개다. 한때는 30~40여 곳에 달했을 정도로 성업 중이었다. 이곳은 엄마가 딸에게 물려 준 경우도 있고, 시어머니로부터 가업을 이어받는 며느리도 있다. 물론 자신이 독자적으로 시작한 업주도 있지만 이곳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는 사람들이 영업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곳 국밥집의 유래는 100년 전과 달리 본격적인 집단촌으로 다시 자리잡은 후 약 40~50년은 족히 넘어서고 있다. 옛 군산역 부근에 해당 조합이 생기면서 자체 처리장이 있어 과거와 달리 이곳에서 위생적으로 손질하기 때문에 한결 깔끔해졌다.

얼마 전까지 만도 식당 주인들이 직접 손질하는 경우는 이미 옛 얘기가 되어 버렸다. 이 때문에 식당에서 얻는 이익은 상당히 줄어들었다는 게 업주들의 공통된 얘기다.

특히나 코로나 상황은 더욱 힘들게 했다. 손님들이 일반 식당가처럼 구경하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아 40년 가까이 국밥집을 운영하고 있는 L식당.

이곳의 여사장은 “우리 5남매가 이곳에서 먹고 살았던 곳이어서 고향의 젖줄과 같은 곳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어머니가 수십 년 동안을 운영해왔지만 약 10년 전에 돌아가셔서 자신이 맡아 운영하고 있다” 고 말했다.

 

향토색 짙은 군산국밥의 맛은

필자가 얼마 오래전 이곳에 친구와 한 식당을 찾았을 땐 주변이 대부분 아는 사람들이었다. 음식 맛은 손맛이고, 술맛은 정 맛이라 했던가.

어느새 음식점이 가득 찼다가 시간이 얼마 흘렀을까.

“어이 친구! 아이구 형님, 동상!…오랜만이네(이네요).” “이모! 술 한 병 주세요.”

시간이 몇 시간이 지나 하나둘씩 손님들이 떠나고 식당을 나섰을 땐 즈음 누군가가 밥값을 냈단다. 고향의 장터나 단골집을 연상하는 일이자, 후한 인심들까지 더해지니 이곳을 쉽게 잊을 수 있을까.

고향의 정처럼 이런저런 것 때문에 국밥집의 맛은 오묘한 알파가 더해지면서 단골들이 늘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

일반적인 국밥집의 특성은 대부분 2~3평 이내의 식당으로 이뤄졌다. 이 때문에 식당에서 약간의 조리할 공간을 빼면 식탁이 3개 밖에 없는 아주 작은 식당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왜 세느강변의 인기는 여전할까.

고기와 양념을 아끼지 않고 퍼주고 손님 한 사람만 가도 즉석에서 반찬을 만들어 주는 정성에다 부족하다 싶으면 덤으로 나오기까지 한다.

국밥을 주문하면 그 자리에서 버무려주는 싱싱한 부출 겉절이는 입맛을 돋아주고 국물은 전날 먹은 술까지 해장용으로 작용, 애호가들은 어김없이 이곳을 찾곤 한다.

국물이 얼큰한데다 들깨가루를 듬뿍 넣은 국밥은 다른 지역에서 나온 전통탕을 연상케 할 정도다.

오젓과 육젓 등 계절에 따라 다르게 나오는 새우젓과 국밥을 주문하면서 기호에 따라 간이나 순대, 막창 등을 넣어달라고 하면 덤으로 나와 여전히 단골들의 발길을 사로잡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돼지 뼈를 고아낸 국물로 돼지국밥을 만드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돼지머리와 내장을 종일 고아낸 국물이어야 말로 제대로 맛이 난다는 것이 오랜 식당 주인들의 얘기다. 이제까지 어려움은 뒤로하고 그동안 이곳의 어두운 경기상황은 아무래도 코로나이후로 기약해야 될 것 같다. 아듀! 코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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