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34] 서양의학 서비스 시대 활짝… 궁멀예수병원의 후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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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34] 서양의학 서비스 시대 활짝… 궁멀예수병원의 후예들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1.08.25 13:34
  • 기사수정 2022-01-17 09: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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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야소병원한국인 최초 병원 열었던 곳… 일제강점기 이후 안동병원, 세창병원 등 인술 펼쳐
국민은행 5거리 ‘영동로‧ 신영1길‧ 평화길‧ 약전안길‧ 싸전길’ 주변 개업 줄이어
서양식 의료서비스 군산 첫선… 의료선교사 드루 1896년 4월 첫 진료

영동로에서 옛 군산역 방향으로 길을 잡으면 어김없이 지나야 하는 곳이 있다.

군산에서 보기 드문 사통팔달이라 할 수 있는 ‘KB국민은행 군산지점 오거리’가 있다. 영동상가 입구여서 영동로와 만나고, 신영1길, 약전 안길, 평화로와 싸전길로 나뉘어 있을 뿐 아니라 근거리에 있는 중앙로와도 만나는 곳.

1세기 동안 이곳은 과거 군산의 유통 및 판매시설 등이 집중된 최고의 번화가였고, 어느 면으로는 그 주변에는 유흥가를 끼고 있어 이른바 군산의 돈줄의 핵심공간이기도 했다.

국민은행 군산지점은 실질적인 금융기능을 하고 있으면서 한자리에 위치한 현존 최고의 금융기관이다. 1963년 2월1일에 개점한 이곳은 벌써 58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지점이다. 이런 역사성 때문에 주변에는 많은 명물과 얘깃거리들이 여전하다.

이를테면 ‘군산갈비음식’의 박물관과 같은 완주옥이 있고, 지금은 사라졌지만 세창병원, 안동병원, 옥산병원 등이 있어 의료시설이 부족했던 시대에 서민들과 민족의 애환을 담아냈던 곳이기도 하다.

물론 서양식의료기관의 시초는 궁멀예수병원이지만 당시 일본인이나 한국인들에 의한 의원개업의 물결은 계속됐다.

이런 역사성 때문에 군산의 중심가로서 과거 110여 년 동안 많은 화젯거리의 중심에 있었을 뿐 아니라 유명 인물들이 이곳에서 생활했단다.

이 때문에 어떤 이는 맛을 얘기했고 어떤 이는 경제적인 부를 일궈 성공신화를 열어 오랫동안 회자되기도 했다.

또 주변에 한국인들만 다니는 중앙초등학교가 있어 학교와 관련된 숱한 얘기들이 남아 있고, 이런 도회적인 풍토를 보면서 음악가와 학자, 영화인, 정치인 등으로도 성공한 이도 다수 있었다.

이들의 얘기를 다뤄 전설(?)들을 스토리텔링을 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분야별로 정리해본다.

우선, 지금은 사라졌지만 일제강점기와 해방 및 50‧ 60년대 인근에서 서민들의 의료와 치료를 책임졌던 병원과 그곳을 운영했던 의료인 등에 대한 역사를 기록해보기로 한다.

큰틀로 보자면 병원들이 집중 개업된 곳은 개복동(구복동)과 중앙로 2가(소화통), 영동(영정), 평화동 등이다. 일부는 명산동과 중동에도 문을 열기도 했다. 이에 국민은행 군산지점 5거리는 교통의 요지라는 점에서 지역의료 발전사와 긴밀한 관련이 있는 듯 싶다.

우리전통의학인 한의학의 역사를 통한 지역 의료사를 다루기는 난망한 상황이어서 서양의학과 관련된 내용을 중심적으로 정리해보기로 한다.

 

군산 서양의료 125년사… 근대의학 선구자들

서양의학과 관련된 내용은 ‘군산을 걷다 # 29’편에서 이미 다뤄 다소 낯 익는 내용도 있다. 이에 좀 더 요약한 뒤 군산의 근‧ 현대기의 의료를 담당했던 내용을 정리하는 장을 마련했다.

군산에서 서양식 의료서비스가 첫선을 보인 때가 1896년 4월(또는 2월 닥터 드루(의료선교사)가 첫 진료한 시점을 기준).

이는 군산개항이 있었던 1899년 5월보다 대략 3년이 앞선 시점이다.

의료선교사 A. D 드루(한국명 유대모)와 W. M 전킨(한국명 전위렴:1865~1908))이 이때 군산진이 있었던 수덕산 기슭의 초가를 사들여 포교소를 설립하고 의료 선교활동을 시작한 때다. 특히 버지니아 의학부를 졸업한 드루는 1893년 결혼, 부인과 함께 한국선교에 나서 1896년 2월 군산에 들어왔다 전킨과 합류, 본격적인 의료 선교활동을 벌인다. 이때를 서양식 의료서비스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이 선교사들과 후임자들은 포교소 한쪽에 약방을 꾸며놓고 오전에는 전도를, 오후에는 환자들을 돌보았다.

하지만 1899년 개항과 함께 수덕산 일대가 일본의 조계지역으로 지정되면서 불가피하게 다른 곳으로 이전해야 했다.

전도선 등이 정박하기 편리한 곳을 찾은 끝에 새로 옮겨간 곳이 구암동(당시 옥구군 개정면 구암리 구암산) 산기슭, 즉 구암동산이다. 선교사들은 이곳으로 본거지를 옮긴 뒤 학교와 병원을 건립했고 이렇게 군산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 탄생한 것. 이 병원이 ‘궁멀야소병원’의 시작이다. 이름의 연원은 기독교 ‘예수’의 한자식 번역어인 ‘야소(耶蘇)’를 따다 붙여졌고 이 병원이 전주예수병원 등과 호남권예수병원의 큰형뻘이다. 후엔 일제의 강압에 의해 야소란 이름대신 ‘구암병원’으로 불려야 했다.

당시 구암리의 옛 지명이 궁멀이어서 ‘궁멀(예수)병원’으로도 불렸던 이 병원.

이곳의 드루와 전킨 선교사는 전도선을 타고 연안 도서지방을 순회하면서 진료와 선교활동을 벌였고 6~7년 만에 드루는 미국으로 영구 귀국하게 된다.

1904년 T.A 다니엘이 부임, 진찰실과 수술실, 입원실 등을 갖춘 병원으로 확장했고 그 후임 J.B.패터슨(한국명 손배돈)병원을 확충하고 발전시켜 전국적인 병원으로 성장했다. 이 병원은 L.C. 브랜드(한국명 부란도) 등을 거치면서 엄청난 변화를 거듭했다.

이후 태평양전쟁 발발과 함께 외국 선교사들을 강제로 출국시켰고 그 과정에서 궁멀병원은 문을 닫았다. 이곳에서 근무하던 한국인 의사 홍복근 원장이 뒤를 이어 명산동에 구암병원을 개원, 헌신적인 의료활동을 벌였단다.

홍복근 원장의 구암병원(1950년대). / 사진= 군산시청 제공
홍복근 원장의 구암병원(1950년대). / 사진= 군산시청 제공

 

궁멀예수병원의 개원 후 군산에는 일본인과 조선인 등에 의한 서양식 병원이 잇따랐다. 1900년대 들어 본격적인 근대 의료서비스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일본인에 의한 병원 개원 붐

일본인 의사들은 개항 초기부터 중앙로1가(명치정)과 중앙2가(소화통) 등에 대거 개원하기 시작했다.

군산 최초의 본격 현대적인 병원은 1900년 봄 일본인 ‘가다끼리’가 세운 가다끼리 진찰소였다. 그는 1년 남짓 운영하다 유끼야마에게 넘겨 1901년 군산병원이란 이름으로 개원한다. 유끼야마가 1904년 2월 일본으로 돌아가자 1년 앞서 병원을 개원했던 나까야마가 이 병원을 인수 합병한 뒤 영화동으로 이전, 군산병원이란 이름으로 확장 개원했단다.

그는 1907년 민단립병원으로 개원했으나 얼마 후 나까야마병원으로 개칭, 군산의료계를 재편할 정도로 입지를 굳혔다. 이밖에 붕운당 병원과 사사키 병원 등도 있었다.

주목할 만한 것은 1909년 12월 일제가 민심을 달래기 일환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도마다 1개씩 일종의 도립병원 성격의 자혜병원을 건립했고, 군산에는 1922년 세워진다.

자혜의원
자혜의원

 

자혜의원은 1925년 4월 군산도립의원으로 개칭됐다가 해방을 거쳐 오늘날의 군산의료원으로 성장한다.

한편 군산에는 1934년 12월 기준으로 외국 선교사가 운영하는 병원 1개를 비롯한 일본인 운영 병원 8개, 조선인 병원 3곳이었단다.

 

일제강점기의 한국인 병원들

군산의 힙포크라테스의 후예들

군산에서 최초의 한국인 의사는 궁멀병원(구암병원) 출신 오긍선(1907~1910년 군산 근무)이었지만 의료사적인 내용이 자료에 따라 한국인 최초 개업의 등에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이 분야에 연구와 기사화에 힘쓴 조종안 기자의 기록과 최영의 군산풍물기 등을 참조, 정리했다.

군산시 의사회 제2호(2005년 발행)와 군산시사에 따르면 한국인 최초의 군산 개업의는 육기병(1874~1935)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육 원장은 1920년 구시장과 인접한 곳인 평화동에 옥산의원을 개원했다. 서울출신의 한학자이자 다년간 약방을 경영했던 검정의(醫) 출신이었던 그는 가정상비약 등을 주로 판매했을 뿐 아니라 일종의 양‧한방서비스를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곳은 원협 죽성지점 주변에 위치해 있었고, 육 원장이 한의학을 공부했던 점으로 볼 때 일반인들로부터 옥산당으로 불렸단다.

문제는 이보다 빠른 시기에 개업한 이가 있는 것으로 기록돼 이에 대한 정확한 규명이 필요할 것으로 보여진다.

조종안 기자가 과거 취재한 내용에는 전남 목포 영흥중학교를 졸업한 정순문씨가 27세 때 목포야소병원 등의 조수로 임상연구를 쌓아온 경험을 살려 1916년 봄 군산에서 군제병원을 개원했다가 4년 만에 폐원(1920년 12월께)했다. 그는 익산을 거쳐 다시 업종을 바꿔 평화동에 영신양복점을 개업한 특이한 인사였다. 이후 지역에서 경제계 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단다.

다음으로 눈길을 끈 개업의는 권태영 원장.

서천군 한산면 출신인 권 원장은 1921년 국민은행 군산지점 인근 신영동에 제대로 된 서양병원인 안동병원을 개원했다.

자신의 본관인 ‘안동(권씨)’이란 이름을 빌려 안동병원을 개원한 그는 사업적으로 상당한 성공을 거뒀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의 큰아들인 영복은 주조장 등을 경영하며 사업적으로 성공했지만 1945년 11월30일 경마장 폭발사건 순직했고 2남 영준은 일본 동경 소재 동양미술전문대를 졸업했단다. 3남은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한 뒤 서울대 의대교수로 근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딸 영희씨는 당시로선 드물게 군산여고와 이화여대를 졸업할 정도로 재원이었단다.

하지만 권 원장은 1950년대 불행한 가정사에다 사업에 실패한 뒤 군산을 떠나 서울에서 생활하다 작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권 원장의 큰아들 영복씨는 경마장 사고로 순직했지만 3남을 낳았고 그 중 둘째 아들은 공직에서 1990년대 초반 은퇴했던 것으로 당시 군산시청 선‧후배들은 기억하고 있다.

오랫동안 주민들과 고락을 해온 곳으로 알려진 영동상가 인근(중앙로2가)의 옛 세창병원.

옛 세창병원 전경. / 사진= 투데이군산
옛 세창병원 전경. / 사진= 투데이군산

 

군산출신 강세형 원장은 1920년대 초반에 개업한 이래 1970년까지 반세기 동안 병원을 운영하며, 인술을 베풀어 나이 든 지역민들의 기억에 생생하게 살아있을 정도다. 아직까지 당시 병원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이 병원 건물은 막내아들 창희씨가 평생을 지키며 살고 있다. 약 8년 전 취재했던 아들 창희씨에 따르면 어렸을 때 아버님(강 원장)은 어려운 환자들을 마다하지 않았고 환자들이 밤늦게라도 문을 두드리면 왕진에 나서는 등 인술을 베풀었다고 기억했다. 최근 건물 사진을 촬영하던 중 만난 인근의 한 아주머니는 지금도 이 건물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자제분이 살고 있다고 귀띔했다.

개복동에 인제의원을 개원한 이장희 원장은 군산도립의원(지금의 군산의료원)에서 산부인과 의사로 근무하다 산부인과를 전문으로 한 병원을 연다. 대구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그는 자신의 인제의원의 개원 시기(1936년)와 군산부 지도(1934년)에 나온 개원 기록의 시점이 다르게 되어 있어 개원 때를 정확하게 특정하기는 그렇다.

또한, 그 시기에 동화병원(원장 이도준), 박제의원, 한호의원(원장 서희순), 박제의원(원장 김윤곤)등도 당시 서양의술을 통해 지역민들을 치료했지만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이밖에도 개복동의 이민오 치과와 유치과, 군창치과, 중앙치과 등 6곳이 치과 관련 의원들이 개업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해방 이후 유명 의원들

일제강점기에 개업의와 다소 차이는 있지만 눈길을 끈 병원은 십자의원.

평화동 소재 옛 십자의원을 개업했던 노재홍 원장(1903~ 1971)은 황해도 연백출신으로 북한에서 이주한 실향민 출신 의료인이었다.

노 원장이 1952년경에 개원했다가 6년 뒤 도립병원 원장으로 부임하자 그 자리에서 사위인 고영석 원장이 뒤를 이어 개업했었다는 것.

고 원장이 1984년 즈음 우풍화학 인근으로 병원을 새롭게 이전할 때까지 지역어린이들의 전문의료기관으로 명성은 대단했다.

그 당시를 기억하는 노 원장의 둘째 아들 강호씨는 이곳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오롯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어서 그 당시의 기억들(전화 인터뷰)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그의 형이 이곳에서 약 7년 전까지 살았던 고향집이지만 타지로 이사했고 얼마 전 그마저도 매각하는 바람에 지금은 다른 사람 소유로 넘어간 상태다.

이곳에서 어린 시절 발을 크게 다쳐 치료를 받았던 고교 동창 이모(58)씨는 “이곳이 없었다면 그 시절 의료수준을 고려할 때 엄청난 아픔과 큰 상처를 남겼을 것”이라며 그때를 떠올렸다.

해방 후 시민들의 기억 속을 아로새긴 곳은 영화동의 만수의원(원장 안형채).

이 의원은 1960~ 70년대 이후 오랫동안 지역민들의 사랑을 받았을 뿐 아니라 안 원장의 작고 이후엔 다른 사람에게 그 건물조차 팔린 것으로 알려졌다. 안 원장의 안채(궁전갈치)와 인근에 병원 건물은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과거 자료 중 인터넷 검색에서 나온 그에 대한 행적은 ‘군산복싱의 살아있는 전설’ 김완수 관장의 옛 도장을 건립할 때 도움을 준 것으로 나와 있다.

이곳에서 기적적으로 폐렴을 치료해서 나았다는 필자의 친구 K.

어린 시절 K는 당시에는 의료기기들이 취약, 원인을 잘 알기 어려웠던 까닭에 생사를 넘나들어야 했는데 안 원장의 치료 덕분에 완치했다는 부모님의 오랜 기억을 소환해냈다.

한편 수년 전에 작고한 안상용 원장은 한국전쟁기에 군의관 생활을 하다 1960년 12월에 개원(안이빈후과의원), 군산에서 가장 오래된 병원 타이틀을 갖기도 했지만 그가 죽고 나서 그 병원은 빈 건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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