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29] 지역 민초들의 삶터 ‘명산시장과 서양식 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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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29] 지역 민초들의 삶터 ‘명산시장과 서양식 병원’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1.07.21 16:41
  • 기사수정 2022-01-17 09: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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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교학교‧구암병원 등이 있었던 향토사적인 의미 지닌 역사 거리
유곽 등 번성기 자연스럽게 시장 형성… 지역 구암병원 등 개업
월명로와 금광길이 합류점… 명산철물‧ 오남매빵집 등 역사 오롯이
명산시장. / 사진= 투데이군산
명산시장. / 사진= 투데이군산

 

명산4거리에서 월명로를 따라 몇 걸음만 선양고가교 방향으로 내딛으면 명산시장이 있다.

오남매빵집과 공영주차장, 끼 헤어와 명산철물 등을 거쳐 몇 발짝만 내려가면 금광로라는 푯말이 있는 곳이 명산시장.

이곳과 붙어있었던 옛 신흥동 유곽은 일제강점기 때 호남 최대의 유곽으로 일본인들을 상대로 하는 고급 술집이었다.

1900년대 초 이곳에 유곽이 들어섰는데 당시로선 상당한 이권사업이었단다.

당시 후보지로는 신흥동 산수정(현 명산시장)과 팔마산 동쪽 평지(경장리), 그리고 경포리 부근 해변가(오늘날의 고속터미널 인근) 등 3곳이 경합을 벌이다가 최종 신흥동 산수정이 선정된 것이다.

이 땅은 당시 군산의 금융왕이라고 불리던 일본인 사토오란 사람이었다.

그는 본래 논과 작은 저수지가 있던 이 지역의 많은 땅을 싼 가격에 사들여 그중 유곽이 들어설 부지 주변 약 1만 6000㎡를 일본민회에 무상기증하는 조건으로 유치에 성공하게 된 것.

당시 유곽 후보지 선정을 위해 일본민단 내에 선정위원회까지 구성됐고 군산이사청의 고위관계자가 직접 관여했을 정도다

이후 현 신창동 인근에 소규모 유곽이 또 들어섰다. 기록에 따르면 1930년대에는 일본인 유곽이 8곳이었고 조선인 유곽은 3곳이었다.

명산동 옛 화교소학교
명산동 옛 화교소학교

 

당시 가장 유명했던 유곽은 칠복(명산동 화교소학교 자리).

일제강점기에 번성했던 이들 유곽들은 미군 진주 후 공창제도 폐지(1948년 2월) 방침에 따라 사라졌고, 화교들이 이곳을 매입, 소학교로 활용했고 한국전쟁기에는 화교 피난민들의 임시수용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특히 칠복은 1925년 만들어진 목조 2층 건물이었지만 해방 직후 군산화교들이 매입했다.

하지만 2000년 화재로 이 건물은 전소됐고 그 후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 오늘(화교소학교)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학생 수 감소에 따라 지난 2019년부터 휴교 중이다.

유곽이 번성하자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돼 유곽시장으로 불리운 것이 오늘의 명산시장이다.

해방 후 채소장사를 하던 상인들이 유곽을 불하받고 유곽고(유가쿠) 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장터를 만들어 운영해오다 지명을 따 명산시장으로 개칭한 것이다.

하지만 이때는 노점 형태로 운영되는 탓에 시와 경찰의 단속에 쫒고 쫓기는상황이 연출돼 흩어졌다 모이는 새들과 같다하여 새시장이라는 별칭도 있다.

본격적으로 시장 형태를 갖춘 것은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2년 정식 시장으로 개설된 명산시장(인정시정)은 점포수만 약 50개소에 달하는 규모로 성장했지만 대형마트의 공세로 크게 위축된 상태다. 이곳에는 명산청과, 개복건강원, 강경반찬 등의 점포들이 영업 중이지만 예전만 못하다.

명산시장과 깊은 관계가 있었던 곳이 군산의 첫 서양병원이 군산야소병원이자 구암병원. 한때 그 위상은 대단했었지만 1980년대 초반 문을 닫았단다.

명산시장과 화교소학교에서 명산사거리를 넘어서면 거석길이 있다. 군산우체국쪽에서 명산동 방향으로 오는 길이 바로 이 거석길이다.

작은 도로인 이 길은 크고 작은 골목길과 접해 있다. 이곳도 과거 행정타운이 존재했을 땐 영화를 누릴 정도였지만 주변엔 동경회집과 군산실비회집 등 미니 횟집타운이 영업하며 단골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일본식 가옥들이 변형됐지만 여전히 70~ 80년 이상 지켜오고 있다.

 

홍복근 원장과 군산 최초의 서양병원 구암병원…야소병원의 후신

- 홍복근 원장 -

군산 구암리 미국병원 물려받아

일본하고 전쟁 나자

미국 선교사 의사 다 떠난 뒤

그 병원 명산동으로 옮겨다가

구암병원 주인된 홍복근 원장

훤한 달밤 대머리에 늘 웃음 피어나

병실 회진할 때

좀 어떠신가요

차도가 있으신가요

…중략…

그 병원에서 낳은 아기

구암쇠야

구암쇠야

하고 안경 속 눈웃음에 봄눈 녹아버린다

아마도 잠잘 때도

웃으며 잠잘 사람

그 사람이 홍복근 원장이다

아마도 꿈꿀 때도

<고은 만인보>

군산에서 서양식 의료서비스가 첫선을 보인 때가 1896년 4월(또는 2월 선교사(의사) 드루가 첫 진료한 시점을 기준).

이는 군산개항이 있었던 1899년 5월보다 3년이 앞선 시점이다.

의료선교사 A. D 드루(한국명 유대모:1859~1924)와 W. M 전킨(한국명 전위렴:1865~ 1908)이 이 시기에 군산진영이 있었던 수덕산 기슭의 초가를 매입, 포교소를 설립하고 의료 선교활동을 시작한 때다.

버지니아 의학부를 졸업한 드루는 1893년 결혼, 부인과 함께 한국선교에 나서 1896년 2월 군산에 들어왔다 젼킨과 합류, 본격적인 의료 선교활동을 벌인다. 이때를 서양식 의료서비스의 기원으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

이 선교사들은 포교소 한쪽에 약방을 꾸며놓고 오전에는 전도를, 오후에는 환자들을 돌보았다. 그해 가을에 서울에 머물던 데이비스라는 여 선교사가 합류했다.

그는 해리슨 선교사와 1898년 결혼, 전주에서 의료 및 선교활동을 벌이다 1903년 발진티푸스로 안타깝게도 사망했다.

1899년 개항과 함께 수덕산 일대가 일본의 조계지역으로 지정되자 큰 배가 정박하기 편리한 구암동(당시 옥구군 개정면 구암리 구암산) 산기슭에 건물을 짓고 예수의 한자식 번역어인 야소(耶蘇)를 붙여 군산야소병원을 개원했다.

당시 구암리 지명이 궁멀이어서 궁멀병원으로도 불렸던 이 병원의 드루와 전킨 선교사는 선교선을 타고 금강과 만경강 연안 도서지방을 순회하면서 진료와 선교활동을 벌였다.

그 후 미국 버지니아 의대를 졸업하고 뉴욕 소사이어티 라잉(Society Lying)병원에서 근무하던 의사 토마스 다니엘이 1904년 결혼과 함께 군산에 도착, 궁멀병원을 다시 개원한다. 이에 앞서 초기 선교사들은 건강 등의 문제로 미국으로 돌아갔다.

다니엘은 열악한 시설과 환경에도 심혈을 기울여 의료 및 선교활동을 벌이다 1910년 전주예수병원으로 옮겨간다.

1902년 가을 A.J.A 알렉산더는 병원장으로 부임했으나 얼마 안돼 독립협회에서 활동하던 중 군산으로 피신, 선교사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던 오긍선과 함께 도미(渡美)했다.

1906년 미국으로 귀국한 알렉산더가 기부금을 보내와 새로 병원시설을 갖췄는데 18개 병상 2개동 규모의 애킨스 병원으로 개칭, 운영됐다.

이곳에서 진료하던 대표인사들은 다니엘(1904~ 6년: 군산진료기간), 오긍선(1907~10년: 군산진료기간), 패터슨(1910~ 24년: 군산진료기간) 등이 진료하면서 지역민들로부터 신망받은 의료기관으로 거듭난다.

특히 오긍선은 미국에서 1907년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군산과 광주, 목포 등지의 야소병원장을 역임했다. 그는 세브란스의전 교수와 교장 등으로 일하면서 고아 구제 사업에 힘쓰다 1963년 별세했다.

병원이 신축됐을 때는 1906년 패터슨(한국이름 손배돈)이 병원장으로 부임한 때다.

이때 한국인 의사로는 세브란스의전 출신 강필구(1931년)와 홍복근(1937년) 등이 근무했다. 1924년 패터슨이 귀국하면서 쇠퇴기에 접어들었지만 홍복근 원장(1937~1941년: 군산야소병원 근무) 등이 뒤를 이었다.

이후 세브란스를 졸업한 홍복근 원장의 부친인 홍원경(1945년 작고)도 이 병원의 의사였는데 1919년 3.5만세에 가담했던 민족주의자였다.

이 병원은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위기를 맞는다.

이곳에서 일하던 의료선교사들이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되면서 문을 닫는다. 미국인 선교로 이곳에서 마지막까지 근무하던 의사는 윌슨이었고 간호사는 우즈였다.

이때까지 야소(예수)병원, 궁멀병원, 구암병원 등이란 이름으로 환자들을 돌봤을 뿐 아니라 지역민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1896년부터 1940년까지 문을 열었던 이곳은 약 7만여명의 환자를 진료한 것으로 여러 기록들은 전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근무하던 홍 원장은 서래장터 물문다리 옆(중동 서래산 아래) 함석집에 구암병원 간판을 걸고 명맥을 이었다.

구암병원이 자리했던 명산시장 주차장
구암병원이 자리했던 명산시장 주차장

 

이후 구암병원은 명산동소재 명산시장 근처(지금의 공영주차장)로 이전, 1982년까지 진료하다 폐원했다.

홍 원장이 개업한 구암병원의 본래 위치를 놓고 여러 설이 있지만 별다른 증거를 없는 한 서래장터 옆에서 명산동 이주설을 준용하고자 한다.

시인 고은도 군산에서 승려로 있을 때 홍복근 원장과 교분을 쌓았을 뿐 아니라 의료 혜택을 받았단다.

아쉽게도 체계적인 서양의료를 군산에 첫 선을 보였던 구암병원은 수많은 생명을 구하는 등 지역의료 발전에 기여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군산은 선교활동의 거점답게 서양식 의료혜택을 빨리 받았을 뿐 아니라 근대 의료기관이나 의료인들의 활동이 남달랐던 곳이다.

의료관련 분야에 대한 얘기는 구암동산과 영명학교 등을 언급하면서 다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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