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26] 군산의 극장 역사와 얘기…전북 영화문화 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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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26] 군산의 극장 역사와 얘기…전북 영화문화 선도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1.06.29 10:23
  • 기사수정 2022-01-17 09: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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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가, 지금 폐업 중 밤엔 칠흑만 ‘가득’… 새로운 가능성 모색 중
부경대 김남석 교수 “군산좌와 군산극장은 엄연하게 별개의 극장” 지적
극장길 속 시네마 우일‧ 국도극장‧ 운정식당‧ 교복판매업소단지 등
옛 국도극장 앞 거리/사진=투데이 군산
옛 국도극장 앞 거리/사진=투데이 군산
옛 군산극장 거리/사진=투데이 군산
옛 군산극장 거리/사진=투데이 군산

 

개복동 성매매업소 화재참사 현장과 옛 경찰서 부지, 개복파출소 등을 뒤로하고 중앙로쪽에서만 들어올 수 있는 일방통행로인 극장길이 과거의 영광을 뒤로하고 어두운 모습으로 맞이한다.

이 거리는 약 200m 구간으로 군산의 근‧ 현대문화를 선도하던 곳이자 한때 전북 최초의 극장이 위치할 정도로 엄청난 문화사 위상 또는 사회적 얘깃거리가 있었던 향수 어린 공간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당시 상권 1번지이자 최고의 번화가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곳을 한땐 ‘예술인의 거리’라 부르고 시가 2008년 2월부터 휴식 및 문화 공간 조성 등에 노력했지만 도로에 채색작업과 주변 정비 등을 했을 뿐 수년째 별다른 변화는 없는 상태다.

해방 이후 전북문학과 문화(영화)예술을 주도하던 지역치고는 매우 한가한 곳으로 전락했다. 이곳에서 눈길을 붙드는 것이 극장가와 지금은 사라졌지만 지역문학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비둘기다방이다. 비둘기다방과 관련된 내용은 전편에서 다룬 만큼 그것으로 가름해야 할 것 같다.

이곳에 나온 무수한 옛날 얘기들을 조금씩 나눠 정리하기 위해 지역 극장 소사(召史)와 백릉의 탁류 등 관련된 문학기행을 다뤄본다.

이 골목길의 시대적 연관어의 출발은 역시  ‘극장 얘기’ 일 것이다. 극장이 있었기에 상권 중심지였고, 문학동인들의 모임장소인 다방도 자연스럽게 들어설 것이다.

군산은 일제가 개항과 함께 호남 지방의 쌀을 수탈하기 위해 인천(제물포)과 부산에 이어 집중적인 공략했던 항구여서 일본 문화 및 경제의 침탈이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집요하게 이뤄졌다 할 수 있다.

 

전북 최초의 극장 ‘군산좌’ 등장… 극장문화 주도

옛 국도극장/사진=투데이 군산
옛 국도극장/사진=투데이 군산

 

일본인들이 본격 상륙하면서 일본의 유랑극단과 이동식 영사기만 지닌 이동극장이 함께 들어와 1910년 초부터 공연과 상연을 한 것으로 보아 군산의 극장 탄생은 이 시기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1914년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 펴낸 ‘호남선’에 “군산에는 군산좌와 명치좌 두 곳의 극장이 있다”고 적고 있다.

전북 최초의 극장은 군산좌다. 군산좌는 개장 초에는 일본 전통극의 가부키 중심의 공연을 하였으나 변사가 진행하는 활동사진인 신파극과 연극(창극 등)도 교대로 상영하는 다기능 공연장이었다.

본래 군산좌는 죽성동 수협 앞 골목(동광한의원 뒤) 안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1932년 화재로 오늘날의 시네마 우일이 자리하고 있는 개복동으로 이전한 것이다. 당시 군산좌의 노후화 등으로 지역여론은 새로운 극장 신축을 원했고 1929년 후반 신축돼 1930년에는 본격 운영된 것으로 알려졌다.

해방 후에도 건물형태와 이름을 그대로 유지했지만 1996년 대규모 내부공사를 마치고 ‘시네마우일’로 대변신을 했다. 이곳은 미군정하의 적산관리국에서 불하받은 뒤 김봉희, 김원전, 육복술, 백정흠씨 등을 거쳐 박주일씨로 넘어왔다.

하지만 나운동 등의 신시가지 확대와 현대식 경쟁 매체(비디오와 현대식 극장) 등이 등장, 폐업한 뒤 아쉽게도 10여 년째 문을 닫고 있는 상황.

군산의 두 번째 극장이자 전북 최초의 전문영화상영관인 희소관은 1934년 현재의 국도극장 자리에 설립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희소관은 영화전문상영관이었기 때문에 군산의 각급 학교들의 단체 관람이 집중됐다. 희소관은 해방 후 남도극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다시 국도극장으로 개명돼 오늘에 이르고 있지만 시네마 우일과 마찬가지로 쇠락을 거듭하다 문을 닫은 것이다.

이들 군산극장업계는 단관극장의 불리함과 경영여건 등의 문제로 전국적인 체인망을 형성하며 확장하는 멀티플렉스의 물결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운명을 맞게 된 것이다.

해방 후 세계적이거나 국내 유명 영화들을 상영했을 뿐 아니라 가수 리사이틀, 이기동‧ 배삼룡 등의 유명 코미디언 공연이 있어 그야말로 이곳은 인산인해를 이뤘단다.

 

전북중핵극장 군산극장 탄생… ‘전설의 무희’ 최승희 등 유명인 공연 등

옛 우일시네마(군산극장)/사진=투데이 군산
옛 우일시네마(군산극장)/사진=투데이 군산

 

전북 최초의 극장 군산좌는 군산극장의 후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게 김남석 교수(부경대 국어국문학과)의 분석이다.

김 교수의 ‘개항장 군산 대표극장 군산극장의 설립배경과 역사적 의의에 관한 연구’에서 군산좌와 군산극장은 엄연하게 별개의 극장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 근거로 한때 군산의 대표극장이었던 군산좌는 1930년 군산극장이 본격적으로 문을 연 이후에도 여전히 운영되었고, 1932년 화재로 전소됐다. 군산극장과 군산좌는 공존하며 운영했던 시기가 분명 존재했으며 일정한 공존기간을 거쳐 군산좌가 영업을 중단하고 휴면상태로만 남는 시기가 도래했다.

군산좌의 화재 이후 군산극장이 지역 대표 극장으로 인정됐는데 후신으로 오해한 것은 극장주가 동일인이었기 때문에 빚어진 촌극이었고 오늘날처럼 1호관과 2호관이란 개념이 없었던 시기여서 별도체제로 운영된 것으로 보여진다. 이를테면 일종의 형제 극장과 같은 위치에 있었다고 하는 것이 보다 더 적확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아니면 지역적인 프랜차이즈의 시작이라도 할 수 있다.

군산극장은 1930년대 ‘전설의 무희’ 최승희(1911~ 1967)의 공연까지 유치할 정도로 엄청난 발전을 거듭했다. 최승희는 서구식 현대기법의 춤을 창작‧ 공연한 최초의 인물로 해방이전 한국무용계를 주도했지만 납북됐다.

이런 역할은 해방 이후에도 계속되는데 극장의 운명은 약 50년 사이에 격변기를 맞는다.

일제 패망은 극장가의 대변화를 가져왔다. 소유자가 사라져 적산관리국이 담당하다 군산극장과 희소관을 불하했는데 그가 김봉한이었다.

그는 1.4후퇴 때 극장의 임시경영을 백남준에게 일임했는데 그의 가족이 좌초, 일가가 몰살되는 참극이 벌어졌고 이 비극에서 살아온 그의 동생 김봉원이 경영하다가 희소관의 경영권을 김삼만에 넘겼다. 김삼만은 전주 백도극장과 이리극장, 삼남극장을 운영한 인물이었다.

군산극장의 경영권 흐름은 김봉원 이후 육복술, 백정음으로 바뀌었다고 고 최영 시인은 그의 군산풍물기에 적었다.

정읍 출신 박주일은 1967년 군산극장의 사장이 됐을 뿐 아니라 남도극장(옛 희소관)의 경영권을 획득, 김봉원 사장 시절의 통합극장 사장의 이미지도 확보했단다. 또 1975년 제일극장까지 소유하면서 군산극장가의 대부로 등극했지만 본격 프랜차이즈 시대를 맞으면서 손을 들어야 했다.

 

한일은행→ 조흥은행→ 신한은행 군산지점… 극장 주변의 유명 식당가

운정식당 골목/사진=투데이 군산
운정식당 골목/사진=투데이 군산

 

상권이 확장되면서 한일은행이 1921년 11월7일 강경지점 군산파출소로 개점, 다음해 9월1일 군산지점으로 승격했다. 한일은행과 호서은행의 합병으로 이곳은 1931년 1월21일 동일은행 군산지점이 됐다.

이후 1943년 한성은행과 동일은행의 합병으로 조흥은행 군산지점으로 되었다가 신한은행 군산지점이 되었지만 지금은 수송동으로 이전, 소상공인 교육장소와 자동화코너만 남았다.

이들 상권 때문에 이곳에는 해방정국에서 사회주의자였던 강철씨가 해방서점을 열었고, 일제 강점기부터 고문봉 청구목재 회장의 부인이 회춘당이란 약방을 운영하며 많은 돈을 벌어 해방 후 청구목재의 설립 기반을 만들기도 했다. 그의 아들도 고병조 회장도 뒤를 이어 사업에 투신, 군산 경제인으로 한때 명성을 쌓았단다.

이 극장가 주변은 국내 유명 정치인들과 인연이 많아 새삼 화제가 되곤 한다.

1960~70년대까지 있었던 선양동소재 근화여관은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이자 국무총리의 외가로 잘 알려져 있다. 외가는 전주 이씨 가문으로 어머니 이정훈 여사(작고)의 친정집이 근화여관이었다.

상권과 뒷골목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어서 이들 지역을 중심으로 힘의 원리라 할 수 있는 건달의 세상이 열렸단다.

군산 최초의 한국인 다방인 고향다방과 유명한 카페였던 파라다이스 등이 이들의 주무대였다.

유명한 주먹들의 활동무대였을 뿐 아니라 먹자골목도 형성됐다. 청춘옥, 삼승식당과 그의 며느리가 운영하던 영화식당, 한양옥 등 유명한 식당가로 즐비했단다.

지금도 운정식당은 녹두삼계탕으로 유명, 향수와 맛을 그리워하는 인사들이 자주 찾고 있는 음식점이다. 과거와 다른 것은 상권 쇠락으로 주로 단골들만 찾은 맛집으로 변했다는 점이다.

 

백범 김구 선생과 군산 인연

백범 김구 선생이 쓴 서체를 서각한 군산여상 현판/사진=투데이 군산
백범 김구 선생이 쓴 서체를 서각한 군산여상 현판/사진=투데이 군산

군산과 백범 김구(1876~1949년 6월26일) 선생과 많은 인연이 있었지만 정리된 사료는 많지 않다.

더 사라지기 전에 자료와 지역 원로들의 기억과 자료 등을 찾아 정리하는 장을 만들었다.

백범과 군산의 인연은 기록상으로 두 차례로 나와 있는 것이 정설이지만 기록에 따라서는 한 차례가 추가되어 있어 모두 세 차례(정설) 또는 네차례일 수 있다는 설도 있다.

첫 인연은 백범이 1946년 9월30일 군산방문. 내용이 명확하게 나와 있지않지만 귀국 후 삼남 순회기간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그 내용을 유추해보자면 과거 자신을 보살펴 주었던 사람들에게 은혜를 갚기 위한 보은의 답방이다. 백범기념관 자료에 나온 사진도 있다.

두 번째는 1948년 10월10일 군산여상을 방문, 학교 현판을 직접 썼다는 시점이다. 백범은 동산학원 설립자인 고 정만채 선생과의 인연으로 학교를 방문한 것이다.

세 번째는 1949년 4월20일 한국독립당(한독당) 군산지부 건국실천원 단기양성 강좌회 개강식과 군산부두어업조합 방문이다.

그해 4월 방문과 비슷한 내용으로 5월 중순 당원 단기강습회 개강식에 참석한 것으로 되어 있어 명확하지는 않지만 이 기록이 정확하다면 네 차례 방문으로 기록될 수 있다.

아마 이 시기인 1949년 4월과 5월 군산 방문 때 백범은 한독당 지역 간부인 고 김영배씨 등과 함께 식사를 했던 일화가 있다. 김씨는 이날 점심식사로 백범을 위해 진수성찬을 차려 대접하려 했단다.

하지만 평생 이국만리에서 조국광복을 위해 싸워왔던 진정한 독립운동 거두답게 백범은 “해방 조국의 동포들은 굶주리고 있는데 이것이 웬 것이냐”고 역정을 내면서 “(중국 망명시절을 떠올리며) 콩나물만 남기고 다 물리라”했다는 것이다. 가히 백범다운 풍모였다 할 수 있다.

세차례 방문 중 백범은 동산학원 실질적인 설립자라 할 수 있는 고 정찬홍 선생과 만남을 가졌다는 내용도 확인되고 있다. 정회상 매촌재단 이사장은 지난해 백범 김구 선생의 글씨를 서각한 것으로 추정되는 ‘군산여자상업학교 현판’을 공개했다.

이 현판은 군산 동산학원 초대 이사장을 지낸 고 정찬홍 선생이 군산여자상업학교를 운영하던 당시의 것으로 보이며, 그의 손주인 정 이사장이 지금까지 소장해왔다.

고 정찬홍 선생은 일본서 학교를 마치고 국내로 돌아와 철기 이범석(1900~ 1972) 장군과 함께 조선민족청년단(족청)서 활동을 해왔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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