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19] 죽성로와 중앙로 속 패션거리 ‘영동상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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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19] 죽성로와 중앙로 속 패션거리 ‘영동상가’(상)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1.05.10 15:34
  • 기사수정 2022-07-25 14: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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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안권 최고의 패션거리… 군산상권 100년역사 자랑
송방골목이자 민족자본의 본거지 ‘멋의 거리’… 한 시대 풍미
과거보다 크게 위축… 40% 가량 영업 중 대부분 의류분야
자료사진=시청 
자료사진=시청 

“군산에서 유행을 얘기하지 마라.”

과거 수십 년 동안 군산 혹은 서해안권 도시의 멋쟁이들이 ‘서울의 명동’처럼 생각했던 곳이 있다. 그 당시 젊은 층들의 자랑거리처럼 ‘첨단 유행’이란 말을 이곳에서 함부로 얘기했다가 망신당할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바로 중앙로에서 영동로타리를 지나 동령길 및 죽성로와 마주한 영동로에 있는 영동상가다.

1930~40년대에서 1990년대 초반까지, 반세기를 훌쩍 넘는 군산 최대 상권이었다는데 이론이 없었다. 전국 상권 중에서도 흔치 않은 ‘일자형’상권을 형성하고 있는 영동상가는 태동에서부터 지금까지 변함없는 군산의 중심상권으로서 역할을 다해왔다.

영동상가의 주된 고객층은 군산지역 외에도 도내는 물론 서천‧ 장항‧ 부여지역의 소비층까지 끌어들일 정도로 넓은 상권을 유지한 도내 패션 1번지이자 군산의 소비문화를 주도한 공간 다름 아니었지만 지역상권의 급변과 도시팽창 등으로 많은 어려움이 예고돼 있다.

영동상가는 긴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그런 내용이 역사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옛 경찰서 부지 쪽 입구에서 영동을 찍은 1930년대의 사진을 보면 길 양쪽에 상가들이 줄지어 있고 사람들의 부산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특히 군산에는 세 곳의 백화점이 영업했는데 동아백화점은 유일하게 한국인이 경영하던 백화점이었단다.

일본인들은 영동거리를 행정구역상 영정(사까에마찌)이라 불렀지만 당시 우리 조상들은 송방거리 혹은 송방골목이라고 부르며 민족자본의 상징적 공간으로 생각했다.

그 배경에는 이곳이 일제강점기 때 한국 상인의 중심상권으로 이곳에서 상업을 하던 사람 중에 개성상인(송상)들이 주류를 이뤘다. 이곳은 일본인 상인들이 뿌리내리지 못한 지역으로 대다수의 한국인과 소수의 일본인 및 중국인들만 장사를 했단다.

영동근처에는 모시전 거리, 장작시장, 떡전거리, 싸전골목, 농방골목 등이 주변에 있어 자연스럽게 조선인 상권이 형성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송방골목의 전통은 최근까지 계속됐다. 한때 군산 최고의 포목점이었던 개성상회가 20여 년 전까지 명맥을 이어왔지만 세월의 흐름 속에 사라졌다.

영동상가를 얘기하면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인력거일 것이다. 인력거꾼들이 대기하는 일종의 차고지 성격의 정차방, 즉 차방(車房)이 군산에만 두 곳이 있었다. 그중 한 곳이 옛 군산경찰서 오거리의 영동입구 권사진관 또는 갑자옥 모자점 인근에 있었던 ‘하나야 인력거 방’이었다.

인력거꾼들은 보통 이곳 차방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손님들이 전화나 인편을 통해 인력거를 호출하면 달려가곤 했다. 열차 도착 시간이 되면 오늘날의 택시처럼 군산역으로 몰려가 손님을 태우는 경쟁을 했다 한다.

큰 두 개의 바퀴가 달린 수레를 수레꾼이 끄는 것을 ‘인력거’라고 하는데 인력거는 앉은 손님이 뒤로 기대어 앉을 수 있고 끄는 사람의 힘이 덜 들게 하는 손수레로 일본인들의 발명품이다. 지금도 관광도시와 교토 등과 같은 일본의 고도(古都)나 관광지에 가면 어김없이 그들의 전통 복장을 한 인력거꾼들이 있을 정도다.

이 인력거는 1930년대까지 전성기를 누리다가 현대적인 교통수단에 의해 밀리는 듯했지만 1940년대 일제가 전쟁을 일으키면서 가솔린 소비를 통제하면서 제2의 호황기를 누렸단다. 해방 후까지 한동안 존재했으나 대중교통의 발전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특이한  ‘일자(一字)형’ 상권

지금은 예전의 영화를 지키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다.

1997년 군산시청이 조촌동 현청사로 이전하면서 주변 상권이 크게 위축됐다. 인근 지역인 대전 및 전주의 백화점 입점으로 경쟁력이 예전만 같지 않은데다 불경기의 파고를 넘지 못한데 따른 것이다.

여기에다 전주와 익산, 부여지역의 상권 블록화 현상, 군산의 경우 나운동으로 대표되는 신흥 상권으로 소비자들이 다수 빠져나갔을 뿐 아니라 최근엔 수송동 및 조촌동 롯데몰 상권이 크게 확대되고 있어 위기감이 그 어느 때보다 커지고 있다.

약 100년 동안 영동이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은 역사성과 집적화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과 상가번영회의 공통된 분석이다.

100여 개의 점포가 집적화된 영동상가에는 의류상가가 80%를 차지하고 있고 나머지 귀금속 및 잡화매장 등으로 이뤄졌다.

영동상가는 중앙동에 소재하는 군산 핵심 상권의 하나로 주변에는 중앙동과 선양동, 오룡동, 월명동 등 수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

이곳은 패션 로드샵 밀집지역으로서 원도심권의 붕괴를 지연시키고 있는 유일한 활성화 대안지역으로 의미가 남다르다.

특히 이곳은 청주 중앙동과 함께 전국의 몇 안 되는  ‘일자(一字)형’으로 상가의 형성이 분산되어 있거나 나눠 있지 않은 통합된 상권이다.

영동상가는 국내 대부분의 패션 브랜드회사로부터 첨단 유행브랜드 유치지역으로서 전북권에서 전주 고사동 지역의 상권과 더불어 최고 상권으로 여전히 가능성이 큰 지역이다.

하지만 최근 10여 년 새 수송동 상권과 조촌동 롯데몰로 몰리면서 40%가량 공실로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다.

직선길이 300m에 넓이 50~70m를 자랑하는 영동상가 주변에는 평화상가, 죽성상가, 신영상가, 공설시장, 중앙로 번영상가 등과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

영동상가는 엄청난 화제의 공간이었다. 군산지역 가톨릭성장과 깊은 연을 맺었을 정도였다.

일제강점기 군산 영동 상가 개성상인 김용진, 한민수, 홍종식 등은 보다 나은 상업적 이익을 얻기 위해 안면도와 목포 등을 경유, 군산으로 이주했다.

이들은 군산에서 상업 활동을 하면서도 가족 일부 또는 대다수를 개성에서 거주하게 하면서 고향 개성을 삶의 근거지로 계속 유지했다. 상대적으로 이동성이 강한 개성 상인이면서도, 고향 개성을 삶의 근거지로 중시하는 생활방식을 고수했단다.

이들은 영동 상가에서 포목 관련 업종에 종사했고, 혼인을 통해 인척관계를 형성하면서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었다. 사업장에서는 가족들이 협업하는 등 강한 결속력과 협동력을 보였다.

천주교를 신앙으로 선택해 불모지나 다름없던 군산지역에 군산 공소를 설립하여 천주교를 활성화시켰으며, 신앙 공동체 대표로서 교회 설립을 위해 많은 돈을 기부하는 등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전개했다. 이들 중에 특히 김용진은 주변의 불우한 아동들의 문맹 탈피를 위해 오랜기간 동안 많은 사재를 쾌척하여 야학교를 운영했다.

 

영동상가의 산증인  ‘강유식 사장’ … 80년 인생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했던가. 굽은 소나무가 되기 싫어 떠난 이도 있지만 70여 년을 이곳에서 오롯이 살아온 ‘영동상가’의 산증인이 있다.

그 주인공이 강유식 사장(80).

사람들은 영동에서 낳고 이곳에서 평생을 생활해온 그를 이곳의 터줏대감으로 부른다. 필자는 강 사장과 8~9년 전에 만나 취재한 바 있다. 이후에도 은퇴한 후 노구를 이끌며 여전히 영동에서 자신의 터전을 지키고 있다.

그는 본래 회현면 대정리가 고향이었지만 일제강점기에 군산시내로 이사 온 선친 때문에 영동에서 태어났단다. 강 사장의 선친(강흥술(1954년 작고))이 일본인 백화점에서 일하면서 성실함을 인정받아 ‘초지야(丁子屋)’ 백화점의 군산점을 운영하게 됐고, 이를 통해 부를 쌓았단다.

그의 선친은 19살에 일본인이 운영하는 백화점에 근무한 뒤 업무 능력과 성실함을 인정받아 1930년대 후반에는 백화점 분점까지 맡을 정도로 부를 일궜단다.

하지만 5남4녀 중 막내였던 강사장과 그의 바로 위의 형만 해방정국의 혼란 등이 얽히면서 재산을 잃고 어린 시절을 어렵게 보내야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주경야독(야간중학교를 다니면서)을 한 강 사장은 1959년 3월 영동상가의 한 양복점이었던 ‘테라’의 견습생으로 들어가 5년간 혼신을 다해 재단기술 등을 배웠다.

그는 군대를 마치고 71년께  ‘창풍라사’(중앙로1가 11의 7)를 차렸다가 일시적으로 다른 곳으로 옮겼으나 돈을 벌어 영동에 가게를 낸 뒤 되돌아와 80년대 중반까지 절정기를 보낸다. 그는 지금도 당시 몸 사이즈를 잰 1만5000벌 가량의 기초자료들을 보관하고 있고 그때의 추억들을 곱씹고 있다.

그의 기억엔 개성상회와 이시계점 등에 대한 기억들은 물론 영동상가의 변천사를 줄줄이 얘기할 수 있는  ‘살아있는 전설’이다.

자신이 본 영동상가는 크게 △ 일제강점기 △ 45~ 60년대 송방시대 △ 70~ 80년 대 중반 양복점‧ 양장점‧ 양화점시대 △ 80년 중반~ 90년대 기성복 시대(메이커 중심시대) △ 90년대 ~2000년 캐주얼 시대 △ 2000년 이후 아웃도어 시대(쇠퇴기) 등으로 분류했다.

영동에서 생활한 군산의 마지막 개성상인이었던 고 김동숙씨의 개성상회와 관련된 얘기 보따리를 풀었다. 한국전쟁 때 군산으로 온 김씨는 송방(개성 베를 이용 일종의 포목점)을 차린 뒤 자전거를 타고 영업에 매진, 엄청난 돈을 벌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김씨의 아들 장렬씨가 운영했지만 90년대 들어 문을 닫으면서 개성상회는 영동에서 종적을 감췄단다.

그 자녀들도 가업을 잇지 못한 채 뿔뿔이 흩어졌다.

군산의 70대 이상의 노인들이 기억하는 ‘이시계점’의 역사도 간략히 정리해줬다. 본래 우리나라 국수인 이창호 9단의 할아버지 고 이화춘씨가 전주로 옮기기 전에 군산에서 이시계점을 운영했다는 설도 있다.

이시계점은 엄대우 전 국립공원관리공단이사장의 모친(또는 선친)이 인수, 50년대 초반에서 70년까지 군산에서 최고의 갑부 반열에 올랐을 정도였다.

엄 전 이사장의 친누나인 엄문정 전 군산시의원은 어렸을 때라 정확치 않지만 시계점을 운영하는 어머님이 옆에 있던 국수(國手) 이창호의 조부가 판 가게를 확장, 별도의 이시계점을 운영했다고 술회했었다.

하지만 양쪽의 자료나 진술이 달라 예단할 수 없지만 이창호의 조부가 1940년대부터 이시계점을 했다는 도내 일간지 기록이 있는 것을 감안할 때 엄 이사장의 모친이 운영하는 이시계점과 어떤 깊은 관계가 있다고 추정할 수밖에 없다.

강 사장은 한동안 2세 체제를 열었지만 과거의 영광을 구현하지 못했단다. 그는 양복점에 이어 영에이지를 1991년부터 98년까지 직접 운영했고 그를 이어 한때 큰며느리가 ‘퓨마’를 운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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