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17] 백년 역사 지닌 죽성로 ‘가구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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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17] 백년 역사 지닌 죽성로 ‘가구거리’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1.04.28 11:30
  • 기사수정 2022-01-17 09: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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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성로 주변 골목길(옛 산업은행 군산지점, 전주문구, 삼익가구)
조선상인들, 죽성포구 중심으로 일본인들과 맞서 지역 상권 수호 앞장
한때 지역 건달 세계 풍미한 유흥업소 즐비… 그랜드파‧ 백악관파의 산실
대동사이다 공장 1920년대 중반 존재… 전북 최초 청량음료 등장
가구거리
가구거리

 

과거 군산의 중심축인 중앙로에서 영동교차로로 향하면 몇 갈래의 길이 있다.

이 길 주변에는 멋의 거리인 영동과 집을 아름답게 꾸미는 수많은 가구점들이 몰려 있는 가구거리가 있다.

죽성로 주변에는 영동상가와 가구거리, 동령길, 장미1길, 구시장로, 평화길 등으로 나눠진다.

영동거리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은 행정구역상 영정(사까에마찌)이라 불렀지만 한국인들은 송방거리 또는 송방골목이라고 불렀다. 그 이유는 그 시절 조선인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는 곳, 즉 개성상인(송상)이 상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이 조선인 중심의 상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의 조계지였던 지금의 영화동 주변과 상대적으로 떨어진 영동의 사정은 달랐다.

영동과 인접한 당시 번창했던 죽성포구(째보선창)가 있어 조선의 상업자본가였던 객주들이 위탁판매업과 여관업, 소규모 금융업을 하던 객주중심 상권이었다.

이 권역이 현 수협 금암지점 앞길에서 옛 동부위판장(째보선창 1899) 등에 이르는 길이다.

이 근처에는 충청도 한산에서 생산된 모시를 판매하는 모시전 거리(죽성동 옛 전북상호신용금고에서 부두까지), 땔감으로 사용되는 장작을 팔고 사는 째보선창 인근 장작시장 등이 있었단다.

동령길 쪽에서 조금 내려오면 외산빌딩 2층에 오피스 큐 전주문구가 있다. 1층엔 수용복 전문점이 있고, 앞에는 엠버의 하루와 네파 등이 있다.

1997년 서울 생활을 접고 군산으로 내려와 사는 고석재‧ 김경휘 오피스 큐 전주문구 사장 부부가 지금껏 맹렬히 생활하고 있다.

특히 고 사장은 이웃 익산 출신이지만 군산제일고를 졸업한 뒤 서울에서 대학을 마친 뒤 우리나라 굴지의 어느 신문사에서 근무했단다.

애주가여서 고교 동기(28회)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 그는 각종 봉사단체 등에서 맹렬히 활동하는 지역 예찬론자다.

이곳과 인접해 군‧중고 동창회관이 있고 산업은행 및 하나은행 군산지점 등도 활발한 영업활동을 벌였지만 거의 대부분 수송동권역으로 이전한 상태다.

장미1길은 뉴그랜드 모텔과 산업은행 군산지점을 옆에 끼고 있는 도로가 이 길이다. 이들 은행 등을 막 지나면 약 60m 구간이 가구거리이다.

삼익가구를 비롯한 수십 곳의 가구점들이 늘어서 있다.

또 다른 가구점으로는 리바트, 한샘, 군산호수갤러리, 김기선 가구갤러리, 에스아이 가구, 이태리가구, 우아미 가구, 노송가구, 에이스침대, 장인가구, 라자가구, 썬퍼이니처, 시몬스 등 가구점 약 50곳에 이른다.

군산에서 살면서 결혼한 사람이면 신혼을 앞두고 거의 대부분 이곳에 들러 신접용 각종 가구들을 골랐을 터…

새집으로 이사하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여전히 군산의 삶 속과 깊은 연을 맺어 온 곳이기도 하다.

이곳의 역사는 40여 년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인근이 영동상가(송방골목)였다는 점을 볼 때 100년 이상은 됐을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다만 오늘날의 모습은 60년대를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 때문에 특화거리 조성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일었고 일부 시의원들이 나서 관련 조례를 제정하려는 노력도 있었단다. 이들 가구점 상인들은 수년 전 번영회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가구거리의 옛 명성을 되살리자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최근엔 감감무소식이다.

이곳을 언급하면서 그래도 빠질 수 없는 것은 군산의 주먹세계에 관한 내용이 아닐까.

옛 그랜드 호텔과 흰색으로 이뤄진 백악관 건물은 이곳의 유흥업소를 무대로 활동하는 건달들의 활동공간과 일치한다.

이곳의 유흥가를 놓고 자웅을 겨루던 조폭들이 그랜드파와 백악관파다. 군산의 조폭이 등장한 시기는 80년대 중반쯤에 만들어졌다는 게 경찰들의 증언이지만 그 이전에 느슨한 형태의 조직이 있었을 것이란 추론도 가능하다.

하지만 지방은 한계가 있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하나둘 지역을 떠나 서울로 향했다.

전북 조폭들이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영남과 수도권 중심의 개발기가 진행되면서 인구와 지역세 등 모든 면에서 타 지역에 비해 열악했다. 나이트와 호텔, 주점 등과 같은 돈이 될만한 시설도 손에 꼽았기 때문.

이들은 서울을 제2의 고향이자 터전으로 만들기 위해 이른바 ‘주먹’과 ‘깡다구’라는 필살기를 앞세우며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를 서서히 장악해나가기 시작했다. 또 기틀을 마련한 이들은 조직의 세를 넓히기 위해 '싸움 좀 한다'는 고향 후배들을 하나‧ 둘씩 영입해가면 몸집을 키워나갔다.

그 결과 수도권에서 규모가 큰 나이트와 룸살롱, 오락실 등 유흥업소를 인수하거나 지분을 갖게 됐고, 사업도 유흥업에서 건설업 등으로 확장하기 시작했다. 조폭의 기업화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의 결과였다.

하지만 군산의 조폭들은 서울로 진출하기 보다는 지역에 주로 거주하면서 건설업과 유흥업소 등을 만들어 생활했다. 그야말로 화석화되는 흐름을 유지, 익산과 전주에 비해 그 세가 크게 약화된 상황.

군산지역 조폭들은 출범 당시 약 40여 명의 조직원과 추종세력들로 이뤄졌는데 그랜드파를 만든 대부는 조모씨였고, 백악관파를 주도한 이는 오모씨였다, 물론 이들은 죽거나 고령으로 활동을 하지 않고 있지만 그들의 후예들은 여전히 조직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도 간혹 범죄단체 가입문제로 폭력사태가 있었던것을 보면 그들의 후예들이 활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1990년대 정부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뒤, 대대적인 조폭 소탕에 나서자 지역 조폭들은 활동 영역에 변화를 줬다.

한편 이곳과 조금 떨어진 88맨션 자리에는 1970년대 어느 시기까지 대동사이다 공장이 있었단다. 어떤 원로 언론인은 이 공장과 연관된 시설(땅)이 있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대동사이다와 코라 쥬-스라는 재미있는 말이 들어간 부채가 있었다는 지역 촌로들의 얘기다. 이 부채는 그 당시 군산지역에서 유명했던 대동흥업사의 부채다. 대동흥업사의 계열사격인 대동양조장은 장항에 있었단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대동양조장은 전북은 물론 호남에서 지명도가 높은 회사였다. 1932년 4월 동아일보에 김제발 관련 기사로 나올 정도였으니 말할 것도 없지 않은가.

대동양조장은 해방 이후에도 50‧ 60년대까지 더욱 사세를 확장, 대동공업과 대동양조장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특히 장항 대동양조장에서는 순곡주와 탁주, 약주까지 생산했다 한다.

 

우리나라 사이다 역사와 군산 대동사이다

군산, 전북사이다 시장 주도

본래 우리나라 사이다의 고향은 인천이다. 사이다의 역사는 구한말 인천 개항장에 일본 요코하마에서 생산된 샴페인 사이다가 들어오면서 비롯됐다.

이 사이다는 식혜와 수정과가 음료의 전부인 줄 알았던 조선인들의 혀를 깜짝 놀라게 했을 것이다. 톡 쏘는 맛에 트림이 나오는 사이다를 당시 사람들은 맛있는 소화제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 시기인 1905년 인천시 신흥동에 첫 공장이 들어선다. 일본인 히라이야마 나쓰타는 미국식 제조기와 50마력짜리 발동기를 들여와 이곳에 인천탄산수제조소라는 사이다 공장을 세웠다.

이곳에서 별표사이다와 일생표 사이다를 제조, 판매했는데 1920년대 접어들자 사이다는 귀하면서 인기 있는 음료수로 자리를 잡는다.

해방 후 인천탄산수제조소를 손욱래씨가 인수, (주)경인합동음료로 회사명을 바꾸고 스타사이다라는 이름으로 사이다를 생산했다.

이 무렵 우리나라에는 12개의 사이다 회사가 난립했으나 인천의 스타사이다와 서울의 서울 사이다, 평양의 금강사이다가 각축전을 벌였단다. 다만 1950년 5월 출시한 칠성사이다가 출현하면서 전국의 사이다 업계를 평정,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후 인천과 군산 등 전국의 사이다 제품은 거의 사라지게 된다.

그러면 군산과 전북에는 어떤 사이다가 있었을까.

전북에는 군산의 대동사이다와 삼양사이다(삼양주조장의 순설탕사이다), 전주의 오성사이다(또는 오성콜라), 월성사이다 등 4개 업체가 각축을 벌였다.

정확한 사이다의 역사는 정리하기 어렵지만 아마 군산의 대동사이다도 군산 또는 전북 최초의 사이다 회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대동사이다의 주인은 일본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1932년 4월 동아일보에 나온 기사와 전국 붐이 일어난 점으로 볼 때 1920년대 중반에는 군산에도 사이다공장이 들어서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군산에 사이다공장이 생긴 것은 당시 물산의 중심지인데다 주 소비층인 일본인들이 많이 살아 자연스럽게 회사가 설립됐을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있다.

대동사이다 토지 소유 등을 고려해볼 때 해방 후 대동사이다의 창업주인 서천출신 구재승씨가 소유했다는 흔적이 나오기 때문. 구씨는 이 근처의 땅을 1952년 국가로부터 산 것으로 볼 때 강점기 일본인 소유의 땅, 즉 적산재산이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구씨는 군산남도극장 앞에서 잡화점인 승옥상점 등을 하면서 돈을 벌어 1945년 전국 최초로 청량음료시장에 뛰어들었고 그 후 대동사이다, 대동공업사, 대동소주 등 양조업까지 확장했다. 그가 과거 경영했던 장항읍의 대동양조장은 아직까지 앙상한 모습을 한 채 남아 있다.

지금의 소주병과 비슷한 병에 담긴 대동사이다와 삶은 달걀은 60년대 소풍과 열차여행의 최고 메뉴이자 별미였단다.

대동사이다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군산 평화동 소재 삼양양조장의 삼양사이다도 군산과 전북지역에서 꽤 유명했단다. 당시 손략규씨가 운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사이다 시장은 미녀들을 내세운 뜨거운 영업전쟁을 벌였을 정도였단다. 아름다운 여성을 내세워 시장 쟁탈전을 벌였고 ‘사이다 송(노래)’ 등이 나올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누렸으나 1970년대 중반 이후 콜라와의 경쟁에서 밀리면서 일부 회사만 남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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