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16] 군산 맛의 고향 '째보선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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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16] 군산 맛의 고향 '째보선창'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1.04.19 13:23
  • 기사수정 2022-01-17 09: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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째보선창의 다른 이름 죽성포구… 1978년 매립 때문에 원형 사라져 상상 속 고향
각종 생선 위판장 수십년 간 자리 지켜… 동부위판장→ 해망공판장→ 비응도 공판장
군산도시가스‧ 동우의 원천… 군산상의 이전 군산 경제중심지 도약

‘째/보/선/창’ - 고현 -

여기서는 억세게 바다만 퍼올린다.

여기서는 바다를 퍼올린 배들이 모여 계속 출렁거린다.

여기서는 퍼올린 바다를 나눠준다.

깊은 내륙이나 가까운 마을을 가리지 않고 나눠준다.

나누어 가진 바다는 거기에서는 살아 출렁거린다,

출렁거리는 그 많은 비늘.

여기서는 이 세상 모든 비닐이 모여 반짝인다.

군산의 원향과 같은 공간인 째보선창을 노래한 문인들은 많다. 어떤 이는 시어(詩語)로 노래했고, 또 어떤 이는 소설과 수필에서 이곳을 묘사했다.

이들은 대부분 군산에서 태어나 자랐던 군산사람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대표적인 인사가 백릉 채만식과 고은 시인이지만 고 이병훈 시인과 고현시인, 김철규 전 전북도의회의장 등도 째보선창을 얘기했다.

예외적으로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에서도 이곳의 풍경을 다룬바 있다.

왜 째보선창이었을까.

군산의 주된 항구는 과거에 째보선창과 서래포구(경포), 궁포 등이 존재했었다.

째보선창의 본래 이름은 죽성포구.

고려와 조선 때 군산의 핵심포구 가운데 하나였다. 조선시대 이곳에 큰 대나무 밭이 있어 마을을 감싸고 있었는데 대나무 숲이 마치 성(城)과 같이 마을을 에워싸고 있는 모습이었단다.

죽성포구가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조선시대 편찬된 옥구군지였다. 당시 포구의 위치는 옛 해안파출소 자리에 있던 돌산 기슭이었다

이곳에는 현재 둔율동 성당의 인근 산에서 흘러 내려 온 개천 물과 팔마산 자락을 돌아 대명동 구시장을 지난 물이 합류, 죽성포구로 모여들었다. 이곳에 제법 널찍한 만이 형성되어 배의 접안과 해풍을 피할 수 있는 지리적인 이점 때문에 포구가 형성된 것이다.

일설에 따르면 이곳에 살던 째보 객주가 포구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어 째보선창이라고 불리었다는 말도 있고, 이곳의 형태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 얘기도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어판장이 들어서면서 동부 위(어)판장으로 불리었다. 이땐 당시의 지역 명칭인 동빈(東濱)이란 이름의 위판장이 존재했다.

이 시기에는 조선객주와 일본 세력과 격돌을 벌였지만 식민지의 아픔으로 일제가 그곳의 어업권을 쥐락펴락하게 됐다. 그들이 자신의 조계지와 인접한 공간을 차지하고 조선인들의 힘이 강한 서래포구와 대항하는 체제를 구축하고 종국에는 그곳을 작은 포구로 전락하게 만든다.

째보선창시대가 화려가 열린 것이다.

이곳은 수심이 꽤 깊어 농어, 민어 등 고급어종도 잡혔지만 1960년대 이후 급변한다. 환경변화에 따른 과거 어종들이 하나둘씩 사라진 것이다.

토사가 쌓여 이곳의 영광을 더 유지하기조차 힘들게 됐다. 결정적인 사태를 부른 것은 금강하굿둑의 준공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과거 째보선창 주변 해변에는 철물점과 각종 선박관련 공구점 등이 과거의 영광을 뒤로하고 낙후의 공간처럼 지켜오고 있다./ 사진=투데이군산
과거 째보선창 주변 해변에는 철물점과 각종 선박관련 공구점 등이 과거의 영광을 뒤로하고 낙후의 공간처럼 지켜오고 있다./ 사진=투데이군산

 

이곳은 세월이 흐르면서 산업도로(해망로) 확장공사 등으로 매립되면서 과거와 전혀 다른 환경으로 변했다. 이런 변화는 동부위판장을 제외한 공용주차장 부지와 도로가 생겨나면서 과거와 달라진 것이다.

지금은 주변에는 어선의 엔진수리공장과 선구점, 철공소, 여인숙 골목들이 즐비하게 남아있다.

그래도 동부위판장의 위세는 금강하굿둑이 준공되기 전까지 계속됐지만 엄청나게 쌓인 준설토양 때문에 큰 어선들이 들어올 수 없게 됐다.

급기야 1997년 6월 해망동 공판장으로 통합되면서 폐쇄되는 아픔을 겪게 된다.

​이곳에 대한 애정이 대단한 조종안 기자는 여러 곳에 기고했는데 이렇게 적고 있다.

째보선창은 1978년 매립된다. 군산시수협조합 위판장 부지를 제외한 매립지가 지금의 공용주차장이다. 복개 전에는 소설 ‘탁류’ 기념 빗돌이 세워진 곳까지 바닷물이 드나들었다.

기념 빗돌 옆에는 다리(금암교)가 있었다. 탁류에 나온 정주사가 용댕이(장항)에서 똑딱선을 타고 군산에 처음 발을 내디딘 곳이자 신세를 한탄하며 자살을 생각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에서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보름이가 서무룡의 도움으로 떡장수를 하는 곳으로 나온다.

고깃배 대부분이 무동력선이던 시절, 입하(立夏)를 앞두고 째보선창에 나가면 조기가 지천이었다. 이때가 되면 소금배, 상고선, 화목선(장작배) 등도 바쁘게 드나들었다. 고깃배가 들어오는 조금을 전후해서는 어부들 씀씀이도 푼푼했다.

철도와 어판장 주변에 설치된 건조대에 줄줄이 매달려 파시를 노래하는 오통통한 굴비들은 풍요 그 자체였다. '째보선창에 가면 강아지도 100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말도 이때 나왔다.

부둣가는 인심도 후했다.

선주나 중매인들은 길에서 우연히 만난 지인이나 구경나온 동네 이웃에게 "금방 잡아 온 것잉게 물(선도) 좋을 때 맛이나 보라고!"라면서 팔뚝만 한 황금빛 조기 몇 마리를 포대에 담아주는 게 인사였다.

어부들이 잡아 온 조기는 어(위)판장 바닥에 무더기로 쌓아놓거나 대광주리에 담아 경매했다. 그러한 방식은 어상자가 등장하는 1970년대 초까지 이뤄졌다.

경매가 끝나면 중매인과 대매인(중매인에게 수수료를 주고 구매하는 중간상) 등을 통해 기차나 트럭, 생선 장수 아낙들의 다라이(함지박)로 옮겨져 각지로 팔려나갔다. 생선과 소금을 짐자전거에 싣고 농촌을 찾아다니며 곡식과 맞바꾸는 물물거래 방식을 병행하는 행상도 많았다.」

이런 어촌의 풍경처럼 군산 연안과 먼바다에서 잡은 각종 어류들을 사고 팔고 소비하는 첫 출발지가 이곳이었다. 그 핵심적인 공간이 아무래도 동부위판장이 아니었을까 싶다.

여기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어류로는 도미, 준치, 민어, 가자미, 홍어, 조기, 갈치 등이었다.

 

군산의 맛의 원류… 여전한 맛집 ‘4인방’ 위세등등

군산의 맛의 원류인 째보선창 맛집들이 수십년동안 이곳에서 영업하며 지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사진=투데이군산
군산의 맛의 원류인 째보선창 맛집들이 수십년동안 이곳에서 영업하며 지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사진=투데이군산

 

자연스럽게 이곳을 드나드는 어선과 선원, 장삿꾼, 주민들을 상대로 음식점들이 하나 둘씩 생겨났을 것이다.

이곳이 매립되기 전에는 산업도로인 해망로 쪽에 음식점들이 즐비하게 있었다는 게 지역원로들의 설명이고 회고다. 이곳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각종 어류를 다루고 음식으로 만드는 곳이 자연스럽게 형성됐을 것은 분명하다.

이들의 음식 솜씨가 할머니- 어머니, 아니 다른 세프 등의 제자 격(?)인 사람과 후배들에게 전수돼 오늘날 군산의 맛을 만들어낸 원조들이 아니었을까.

이들 연결해 준 곳이 반백 년도 훨씬 전에 ‘봉래식당’이 오늘의 맛집들을 있게 만든 중시조 세프였을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이곳을 지켜온 지역민들의 애용 ‘4인방 실비식당’이 그 뒤를 이어오며 군산 맛을 전국에 알리고 있다. 이들 음식점이 해성‧ 중앙‧ 유락‧ 돌풍식당이 그 토박이 전용 실비식당.

40대 이상의 시민이면 누구나 이곳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로 가장 군산다운 밥상을 만나고 있다

얼마 전 필자도 지인들과 반지회덮밥과 아나고탕을 먹고 이곳이 군산의 맛의 원류라는 생각에 감회가 남달랐다.

다른 식당이 준치회를 다룰 때 해성식당(1980년 8월)이 목포에서 올라온 밴댕이를 갖고 반지회를 새로 개발했고 준치가 귀해지자 다른 식당들도 모두 뒤를 따랐다.

그 세프가 전남 고흥출신 이선자씨였단다.

수년 전 백종원의 3대 천왕에 나왔던 중앙식당(1996년 11월 개업)과 유락식당(1981년 9월 개업) 등도 이곳의 산증인처럼 지켜오고 있다.

또 주변 졸복을 다룬 아복식당과 똘이네집도 상당히 알려진 맛집이자, 주당들의 속풀이를 하는 곳이다.

째보선창과 인접한 공간에는 군산경제를 이끌어온 동우와 군산도시가스, 군산상공회의소와 전북신용보증재단 군산지점, 근로복지공단 군산지사 등이 인접해있다.

이곳의 핵심인사는 아무래도 김동수 군산상의 회장이자, 동우와 군산도시가스, 참프레회장.

김 회장은 사전적인 의미로 자수성가한 재계인사라고 할수 없을지 모르지만 사업가이자, 정치인이었던 그의 선친 김봉욱(작고) 전 의원과 비교할 때 그야말로 ‘청출어람’이라 할 수 있다.

전주고와 한양대를 졸업한 그는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군산도시가스㈜와 ㈜동우, 참프레 등을 굴지업체로 키웠을 뿐 아니라 전북을 대표하는 육가공업체로 거듭났다.

특히 1993년 화성식품주식회사로 문을 연 오늘날의 동우는 코스닥 등록(2006년 6월)은 물론 참프레, 주식회사 나농 등의 계열사를 이끈 군산은 물론 전북을 대표하는 기업이다.

육가공분야만도 이미 1조 클럽에 가입했을 정도다. 가동 중인 부안 참프레공장과 함께 아쉽게 고창으로 가게 될 동우공장까지 풀 가동되면 이 분야 최고업체인 익산소재 하림과 어깨를 나란히 할 것으로 보인다.

군산상공회의소
군산상공회의소

 

한편 군산상공회의소의 이전 소사는 이렇다.

1916년 일제강점기 때 군산상업회의소란 이름으로 시작된 군산상의는 시공관 이전(1935년), 중앙로시대(1970년 12월 이전), 금동시대(1992년12월), 조촌동시대(2003년 6월) 등을 거쳤다. 새로운 청사를 신축한 군산상의는 2019년 5월 장미동 현청사로 이전해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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