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안 記者의 '군산 야구 100년사'] 동경유학생 야구단 모국 방문경기 군산서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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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안 記者의 '군산 야구 100년사'] 동경유학생 야구단 모국 방문경기 군산서 개최
  • 조종안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 승인 2020.04.23 13:42
  • 기사수정 2022-01-14 10: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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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야구대회 군산팀 우승 알리는 1928년 6월20일 동아일보 기사./출처=군산야구 100년사
호남 야구대회 군산팀 우승 알리는 1928년 6월20일 동아일보 기사./출처=군산야구 100년사

 

1928년 6월, 군산체육협회가 주최하고 오사카 아사히신문 군산지국이 후원하는 호남야구대회(16일~17일)가 군산중학교 운동장에서 열렸다.

이 대회에는 대전, 이리(익산), 전주, 광주, 군산 등 다섯 개 도시 대표팀이 참가하였다.

선수들은 첫날부터 열띤 응원전과 함께 예선전을 치른 후 대전팀과 군산팀이 최종 결승에 진출하였다.

결승전에서 만난 두 팀은 온갖 묘기와 백열적(白熱的)인 대결로 관중을 열광시키며 군산팀이 6-3으로 쾌승, 택촌(澤村) 군산 부윤으로부터 상장과 우승기를 수여하였다.

마땅한 볼거리가 없고, 전통적인 의식구조가 주민 의식을 지배하던 당시 지역대항전 형식의 각종 운동경기는 주민들의 관심과 애향심을 크게 자극하였다.

특히 전주, 군산을 대표하는 야구와 축구 대항이 열리는 날은 두 도시 시민이 구름처럼 몰려나와 열광적으로 응원전을 펼쳤다.

야구 경기 열리고 있는 군산 공설운동장(1935년)./출처=군산야구 100년사
야구 경기 열리고 있는 군산 공설운동장(1935년)./출처=군산야구 100년사

 

조선일보·동아일보·중앙일보 군산 지국과 조선 매일신문 호남지사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동경유학생 야구팀-군산 야구팀 대항전이 군산체육협회 후원으로 1935년 7월 1일 오후 5시 군산부 일출정 공설운동장에서 열렸다.

유학생팀 선공(先攻)으로 시작된 대항전은 1회 초 공격부터 화끈한 타격전이 펼쳐졌다.

유학생팀이 선취점을 뽑자 군산팀이 1회 말 2점을 따라잡고 3회 말 공격에서 1점을 더해 역전(3-1)에 성공한 것.

이후 팽팽한 접전이 펼쳐지다가 유학생팀이 6회에 3점, 7회에 2점을 빼내 재역전(6-3)된다. 유학생팀은 9회 초에도 2점을 추가, 승기를 잡는 듯했으나 군산팀이 8회 말 1점, 9회 말 대거 4점을 뽑아 동점(8-8)을 만든 뒤 끝내 승패를 가리지 못하고 게임이 종료된다.

동경유학생 선수단 모국 방문 기념사진./출처=군산 야구 100년사
동경유학생 선수단 모국 방문 기념사진./출처=군산 야구 100년사

 

이변과 파란이 일몰 시각(오후 7시 20분)까지 거듭되면서 승부를 가리지 못했던 유학생 야구팀-군산 야구팀 경기.

다음날 재경기 역시 접전 끝에 군산팀이 8-7, 가까스로 승리를 거둔다.

입장료 20전을 받았음에도 군산에서 처음 개최된 큰 경기여서 수천의 관중이 입장하였다.

동경유학생 야구팀은 비록 패했으나 열정과 투혼으로 관중에게 많은 격려를 받았다.

당시 군산팀 진용은 김수복(포수), 김동극(중견수), 박상석(2루수), 황 동(투수), 김귀성(유격수), 김행규(3루수), 김구영(1루수), 김수연(우익수), 양태근(좌익수), 전의용(PH) 등으로 짜여있었다.

동경유학생 야구팀은 박전원(매니저), 이준용(감독·8), 박만경(투수), 김영규(포수), 김태호(5), 진성섭(주장·6), 이기경(3), 손해룡(4), 김영하(9), 배기협(7), 박경원(PH) 등이었다.

제1차 동경유학생 모국방문단 야구 경기는 1909년 7월 21일 한성 훈련원(조선 시대 무과 시험장)에서 개최됐다.

상대는 황성 YMCA 야구팀(선교사들과 혼성팀)이었으며 유학생 팀이 19-9로 승리하였다.

이후 유학생들은 10여 차례 모국을 방문, 지방을 순회하며 시범경기를 갖는 등 한국 야구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동경 유학생들은 1937년에도 하기휴가를 맞아 축구와 야구팀을 조직, 모국을 방문하여 대구, 목포, 광주, 군산, 서울, 해주, 평양 등 일곱 곳에서 경기를 갖고자 하였다.

그중 야구단은 7월 10일 오후 4시 일출정 공설운동장에서 군산 야구구락부와 경기를 치르겠다고 양측 선수단 명단까지 언론을 통해 발표했으나 부득이한 사정으로 취소됐다.

당시 <동아일보>에 소개된 양측 선수단 중 군산팀 임원은 부장 여 홍(餘 鴻), 감독 손귀성(孫貴成), 주장 양태보(梁泰寶) 등이었고, 선수는 양태근(梁泰根), 김동극(金東極), 이완고(李完高), 손귀성, 현부남(玄富男), 김귀성(金貴成), 김수운(金洙運), 김구영(金九榮), 여근영(廬根榮), 노갑종(盧甲宗), 이옥동(李玉童) 등으로 이뤄져있었다. (계속)

 

덧붙임: 1933년 당시 군산 인구는 3만 5999명(조선인 2만 6508명, 일본인 9106명, 외국인 385명)이었다.

1932년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으로 옥구군 구암리, 신풍리, 둔율리, 경장리 일부가 군산부로 편입되면서 도시가 대폭 확장된다.

군산의 관문 역할을 했던 소화통(중앙로 2가) 역시 그즈음 완공된다. 또한, 3차 축항공사 완공으로 1934년에는 일본으로 반출된 쌀이 2백만 석을 넘어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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