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안의 群山學 9강] 영동에서 개복동, 창성동까지
상태바
[조종안의 群山學 9강] 영동에서 개복동, 창성동까지
  • 조종안 시민기자
  • 승인 2022.09.27 15:03
  • 기사수정 2022-09-27 15: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빈민촌이자 조선인 교육 중심지였던 개복동

군산시 개복·창성동은 월명산(105m)에서 뻗어 내려온 야트막한 산줄기를 등지고 초가들이 옹기종기 들어선 고즈넉한 마을이었다. 군산 개항(1899) 전 지명은 옥구군 북면 개복리. 1930년대 초 일제에 의해 개복정(町)이 되면서 군산부로 편입된다. 1932년 개복정 1정목(저지대)과 2정목(고지대)으로 나뉘고 광복 후 1정목은 개복동, 2정목은 창성동으로 개칭된다.

"보라! 개복정(개복·창성동), 약송정(개복·선양동), 산상정(선양동), 둔율정(둔율동·둔뱀이) 일대를! 그 중에도 고지대를! 다시 말하면 조선인 빈민지대를! 거리마다 오물이 산적하여 있으며, 변소의 분뇨가 도로에 일류(溢流)하여 통행인으로 하여금 코를 들지 못할 지경이오. 눈으로 그것을 볼 때마다 얼굴을 찌푸리고 몸소름이 나게 될 때에 정신적으로 얼마나 손실이며 위생적으로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아래 줄임)" - 1936년 8월 20일 치 <동아일보> 지방논단에서

군산의 조선인 빈민촌 참상을 고발하는 글이다. 구구절절 가슴을 후빈다. 악덕 일본인 대농장주의 횡포에 시달리는 어느 소작농의 절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기사가 말하듯 당시 개복정 고지대는 토막집 수백호로 메워져 콩나물시루를 연상케 했다. 옛 노인들 전언에 따르면 구정물이 튀기는 것은 예사고, 가로등도 없어 달빛이 없는 음력 초순이나 그믐밤에는 통행이 어려울 정도였다 한다. 그 같은 현상은 10년, 20년 뒤에도 개선되지 않는다.

개복정이 가장 가난한 동네였음은 당시 땅값에서도 잘 나타난다. 1924년 군산상업회의소가 조사한 군산부 지가(地價) 조사에 따르면 개복정 희소관(전북 최초 영화 전문 상영관) 부근은 한 평에 5원~40원, 개복정 서부 지역은 3원~15원으로 신흥동(8원~15원)과 함께 가장 낮았다.

일제가 민심 회유책으로 설립한 군산 도립병원 통계도 눈물겹다. 1935년 상반기 도립병원에서 무료로 치료받은 조선인 환자가 3만9412명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았다. 그중 위생이 불결한 빈민촌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소아병과 피부병 환자가 수위를 차지한 것. 당시 군산의 빈민촌 조선인들은 실업자 아니면 부두 노동자, 지게꾼, 매갈잇간(도정공장) 인부, 정미소 미선공(米選工), 인력거꾼 등 하루 벌어 끼니를 겨우 연명하는 하루살이 인생들이었다.

▲ 1920년대 군산 월명동 부근(왼쪽 ○ 표시가 개복동 고지대. 오른쪽은 명산동 유곽단지)/사진=조종안 기자
▲ 1920년대 군산 월명동 부근(왼쪽 ○ 표시가 개복동 고지대. 오른쪽은 명산동 유곽단지)/사진=조종안 기자

서울 충무로에 비견됐던 ‘예술의 거리’, 1980년대 이후 쇠락

구한말 당시 어느 선비가 "군산은 앞으로 산(山) 수십 개가 없어지고 선유도는 육지로 변할 것이며, 어청도가 군산의 관문(항구) 역할을 할 것"이라고 예언해서 주위로부터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120여 년이 흐른 지금 군산은 그 선비 예언대로 올망졸망한 산 10여 개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고군산군도 섬들도 여러 개가 육지화 됐다.

창성동 말랭이(고지대) 옛 지명은 노서산(老鼠山)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곳에는 해마다 정월에 당제를 지내는 신당(神堂)이 있었으나 경술국치(1910) 이후 일제에 의해 그 맥이 끊기고, 초가집이 옴닥옴닥 들어서 달동네를 이뤘으며 은군자마을(주점골목)이 조성된다. 광복 후에는 집창촌이 됐다가 2006년 아파트단지에 자리를 내주었다.

개복정 2정목은 빈민촌이자 조선인 무산아동 교육의 메카였다. 미선공조합 사무실을 비롯해 영신여학원(영신유치원 전신), 적성야학교, 계화여학당, 양영학교(청년야학교) 등 조선인 야학이 즐비했던 것. 이 야학들은 대부분 1910~1920년대 설립됐으며 교사 신축을 앞두고 독지가, 노동자, 기생 등 조선인 수백 명이 성금을 기탁한 것으로 전해진다.

20~30년대 개복동은 조선인 동네 중심지였다. 군산경찰서를 경계로 영화동, 월명동, 중앙로 일대는 일본인들 공간이었고, 영동, 죽성동, 둔율동, 개복동 일대는 조선인 거류지였던 것. 상업적으로는 70~80년대까지 영화동 일대가 미군 전용 클럽 거리로 명성을 떨쳤다면 개복동 일대는 내국인들 여흥 공간으로 소란했던 곳이다.

서울 충무로에 비견될 정도로 번창했던 50~70년대. 전원다방, 보스턴다방, 인기영화배우가 차 마시고 나오다가 뺨 맞았다는 초원다방, 아리랑고개 부근의 한진다방, 군산극장 앞 군산다방, 비둘기다방과 붙어 있던 향지다방, 부라질다방, 산호다방, 장미다방 등 개복동은 ‘한 집 건너 술집, 두 집 건너 다방’이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다방도 많았다.

기생 골목, 여인숙 골목, 젠사이집 골목, 막걸리집 골목(먹자골목) 등 골목도 많았다. 이름 없는 골목도 사방으로 갈라져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개복동이라 하지 않고 '개복동 골목'이라 하였다. 영화동이나 월명동과 대비되는 것은 영화동이나 월명동 골목은 직선으로 뻗어있는데 반해 개복동 골목들은 하나같이 꼬불꼬불하다는 것이다.

개복동은 두 개의 극장(희소관, 군산극장)과 기생을 관리·양성하는 권번이 세 곳(군산권번, 보성권번, 한호예기조합)이나 있었고, 요릿집(세심관, 조선각, 식도원, 금화각 등)도 많았다. 광복 후에는 작품 전시회와 인기스타 초대 만찬이 청춘옥 별관에서 자주 열리는 등 문화·예술의 거리로 명성을 떨쳤으나 나운동 지역이 신도시로 개발되기 시작하는 1980년대 쇠락하기 시작하였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시화전·사진전 등이 열리고 문인들이 모여 문학을 논하는 다방도 있었던 개복동. 호남 최초 영화관과 연극 공연장이 있던 동네이지만 시대 흐름에 따라 집창촌도 생기고 화재사건도 발생했던 가슴 아픈 장소이기도 하다. 현재는 구도심의 가장 슬럼화된 공간이지만 예술인들의 활동과 문화적 재생을 위한 움직임이 새롭게 형성되는 중이다.

조선인 교육 중심지였던 동네, 개복동

개복정 1정목(현 개복동)에는 영화관이 두 개(군산극장, 희소관) 있었다. 병원, 악기점, 양복점, 사진관, 여관, 음식점 등의 간판도 보였다. 일본식 절 대음사(군산사)를 비롯해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 군산지국, <동아일보> 군산지국, 공설질옥(공설전당포), 보성권번과 한호예기조합도 있었다. 고지대인 2정목(현 창성동)에는 미선조합(米選組合) 사무실, 영신여학원(영신유치원 전신), 적성야학교, 계화여학당, 양영학교(청년야학교) 등 조선인 야학들이 자리했다.

▲ 군산영신유치원 제12회 졸업기념 사진(1943) ⓒ 동국사
▲ 군산영신유치원 제12회 졸업기념 사진(1943) ⓒ 동국사

그중 영신여학원은 군산 개복기독교청년회와 뜻있는 조선인들이 후원회를 조직, 1920년대 초에 설립한 미션스쿨이었다. 초기에는 6년제였으나 운영비 관계로 4년제로 단축하여 운영되었다. 교사(校舍) 건축을 앞두고는 군산 상우회, 형평사, 군산 노동회, 철도 노동조합, 양화 직공조합 등 사회단체와 개인, 권번(군산권번, 보성권번)의 기생들까지 나서 후원금을 맡겼다.

영신여학원은 1923년 여름 군산을 방문한 하와이교포 야구팀 환영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1923년 8월 5일 하와이교포 학생야구팀 일행(합창단 포함 23명)이 군산역에 도착한다. 광장에서 기다리던 환영객 600여 명은 미선조합 양악대(고적대)를 선두로 거리 퍼레이드를 벌였다. 경기장으로 이동하기 전 영신여학원에서 열린 환영식은 대성황을 이루었다.

당시 군산은 일제의 곡식 수탈 전진기지로 번창 일로에 있었다. 대규모 상가와 금융기관이 잇따라 들어섰다. '권세를 누리려면 한성 부윤, 돈방석에 앉으려면 군산 부윤'이란 말이 나돌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인들이 부를 쌓을수록 조선인의 삶은 더욱 고달프고 궁핍해져 갔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하와이 교포들을 따뜻하게 맞이했다.

영신여학원은 1925년 '희소관'에서 음악가극회를 열었다. 1928년엔 군산좌(군산극장)에서 동정(同情:이웃돕기) 음악회를 개최한다. 각종 토론회와 매년 하기 아동성경학교를 여는 등 다양한 행사로 반향을 일으키자 일제는 1931년 3월 재정 부족을 구실로 폐교 조치를 내린다. 그리고 그해 여름 뜻있는 주민들의 지원에 힘입어 영신유치원으로 다시 태어난다.

적성야학교(교장 한상계)는 시내 정미소 미선공들 단체인 미선조합이 800여 조합원의 성금과 개인, 사회단체 지원으로 1921년 설립한 야학이었다. 적성야학은 1922년 한상계 교장이 따로 설립한 계화여학당과 교육활동 사진대를 조직해 전남북 지역을 순회하며 계몽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 기와 얹은 양영학교 건물.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면서 사라졌다.ⓒ 군산시
▲ 기와 얹은 양영학교 건물.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면서 사라졌다.ⓒ 군산시

양영학교(養英學校)는 경술국치(1910) 이후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추진된 교육 구국운동의 결과로 1918년에 설립된 무산아동 교육기관이었다. 초창기 교명은 '군산청년야학교'. 문맹률이 80%를 웃돌던 시절, 보통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 젊은이들에게 한글, 수학, 일어 등을 가르쳤다. 초기엔 3년제였으나 1933년 9월 수업을 2부제(주간 여학생, 야간 남학생)로 개편하고 교명을 양영학교로 변경하면서 4년제가 된다.

옛날 신문은 양영학교 교사들이 여름방학 중에도 매일 오전 8시부터 10시까지 산술법과 조선어 서간문 작성 등을 중심으로 보충수업을 시행해서 시민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하다고 전한다. 대부분 고학생이어서 취업과 계몽 위주로 수업을 진행했던 이 학교는 1936년 재정난으로 폐교된다. 당시 잔여학생 100여 명과 학부모들이 며칠 밤을 눈물로 지새웠다 한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폐교 후에도 학생들 수업은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콩나물고개를 경계로 이웃한 둔율정(둔율성당 부근)에는 대한제국 시절(1907) '옥구 군산항 민단'이 설립한 금호학교(今湖學校)가 있었다. 금호학교는 을사늑약(1905) 이후 국권회복을 위한 자강운동의 일환으로 세워진 근대교육의 전당이었다. 군산항 민단 설립에 앞장섰던 옥구 부윤 이무영을 주축으로 세워졌으며 초기에는 '군산항 민단강습소'로 불리다가 1908년 학부대신이 다녀간 뒤 '금호학교'로 개칭하였다.

금호학교(교장 조병승)는 호남지역을 대표하는 중등교육기관으로 유수한 인재들을 양성하였다. 부르주아 민족주의 계열을 대표하는 김성수, 송진우, 백관수가 수학했으며, 조선공산당 서기장을 지낸 김철수도 이 학교 출신으로 알려진다. 호남에서 유일한 민족 교육기관이었던 금호학교는 대한제국 국권이 일제의 손아귀로 완전히 넘어가는 1910년 폐쇄되고 학교 재산은 군산공립보통학교(현 중앙초등학교)에 흡수된다.

개복정의 조선인 야학들은 문화·체육 공간 역할도 하였다. 중앙 언론사들이 유명한 요리연구가를 초빙하여 주부들 대상으로 서양요리강습회(양식, 중국식, 간이요리와 양과자 만드는 법 등)를 열었다. 영신유치원에서는 팬들의 뜨거운 응원전과 환호 속에 도시 대항(군산 농구구락부-전주ABC팀) 농구 경기가 펼쳐지기도. 그 외에 군산을 방문하는 외지 손님 환영대회와 간담회 등이 열렸다. 일제강점기 개복정은 가난한 빈민촌이자 조선인 교육 중심지였던 것이다.

지역별 키워드

ㆍ개복동: 구복동, 천일상회(김홍두), 우석 황종화 서화연구소(황씨 4형제), 군산극장(군산좌), 희소관(남도극장, 국도극장), 매일신보 군산지국, 동아일보 군산지국, 공설질옥(공설전당포), 예기조합(보성권번, 군산권번, 한호예기조합), 기생골목, 여관골목, 해장국집 골목, 젠사이집 골목, 비둘기다방(토요동인회), 가락지다방, 청춘옥, 일심이발관, 동인약국(동인제약), 숙명양재학원, 풍년제과점(개복), 호남건재상회(개복)

ㆍ창성동: 은군자마을(오백고지), 노서산 당제, 고야산 편광사. 금강사 개복포교소, 미선조합 사무실, 영신여학원(영신유치원 전신), 적성야학교, 계화여학당, 양영학교(청년야학교), 군산사(대음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