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셋, 중미에 던져지다 ⑩] 국제기구에서는 무슨 일을 할까?

2026-11-07     Young(필명)

국제기구에서 일한다고 하면 어떤 모습이 떠오를까?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회의하고,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기획하는 모습일까? 나 역시 파나마에서 국제기구 인턴으로 일하기 전에는 국제기구의 내부가 어떤 모습일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다.

# 국제기구의 사업을 뒷받침하는 일

내가 근무했던 곳은 FAO, 유엔식량농업기구의 중미 하위지역사무소였다. 파나마를 비롯해 멕시코, 과테말라 등 중미 지역 9개국의 국가사무소를 관할하는 곳으로, 약 70~80명의 직원이 근무하는 제법 규모가 있는 사무소였다.

사무소는 크게 기술 파트와 행정 파트로 나뉜다. 기술 파트가 농업과 식량안보 등과 관련된 사업을 기획하고 추진한다면, 행정 파트는 그 사업들이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운영, 재무, 조달 등의 부서로 나뉘어 업무를 지원하는 역할을 한다.

나는 행정 파트 전체를 지원하는 Administrative Intern으로 근무했다. 특정 부서에 소속되어 정해진 업무를 하는 자리라기보다는, 여러 부서의 업무를 경험하면서 필요한 부분을 찾아 지원하는 역할에 가까웠다. 상사 역시 내가 여러 부서와 이야기하고 경험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스스로 찾아보기를 바랐다. 덕분에 기존에 할당된 업무 외에도 다양한 일을 접하고 새로운 업무를 시도해 볼 기회가 있었다.

그중 가장 큰 프로젝트로 이어진 것이 바로 행정 파트의 관리 보고 체계를 만드는 일이었다. 어느 날 상사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각 부서가 개별적으로 업무와 데이터를 관리하다 보니 부서별 업무가 어디까지 진행되고 있는지, 전체적으로 어떤 일들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한눈에 파악하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를 한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 통합 관리 도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내가 직접 한번 만들어 보겠다고 나섰다.

먼저 각 부서를 찾아가 업무 프로세스와 데이터 관리 방법을 파악했다. 어떤 업무가 진행되고 있는지, 데이터를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지, 보고서에 어떤 항목이 필요한지 하나씩 확인해 상반기 관리 보고서를 작성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매번 데이터를 새로 취합하는 수고를 줄이기 위해 각 부서가 월말에 정해진 양식에 데이터를 입력하면 통합 보고서가 자동으로 생성되는 엑셀 기반 관리 도구도 만들었다. 처음부터 정해진 틀이 있었던 것이 아니어서 필요한 항목과 구조를 고민하며 하나씩 만들어 나갔다.

그런데 사실 이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건 보고서나 엑셀을 다루는 일이 아니었다. 바로 각 부서 직원들에게 질문하고 미팅을 잡는 일이었다.

당시에는 큰 조직에서 일해본 경험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낯설었다. 내가 하는 일이 혹시 해당 부서의 원래 업무에 방해가 되지는 않을까, 너무 사소하거나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각 부서의 업무를 파악해야 하는데 정작 그 업무를 잘 모르는 내가 먼저 질문을 꺼내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그러다 나름의 전략을 세웠다. 일단 평소 나에게 조금 더 살갑게 대해주던 직원들부터 공략하기로 했다.

가벼운 일상적인 이야기를 시작해 자연스럽게 "내가 지금 이런 업무를 진행하고 있는데, 너희 부서의 도움이 필요해. 혹시 도와줄 수 있을까?" 하고 말을 꺼냈다. 다행히 모두가 반갑게 맞아주었고, 시간을 내어 도와주었다.

그렇게 한 부서씩 일정을 조율하고, 회의실을 예약하고, 필요한 자료를 요청했다. 처음에는 미팅을 잡는 것조차 어색했지만 몇 번 반복하다 보니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어떤 질문을 해야 하는지, 회의를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지도 조금씩 익숙해졌다. 툴이나 데이터를 다루는 기술만큼이나 여러 부서의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소통하고 협조를 구하는 방법을 배운 시간이었다.

사업 수혜자들과 함께한 프로젝트 종료 행사/사진=young
국제회의 현장/사진=young

# 산타가 된 국제기구 직원들

여러 업무 중에서도 가장 즐겁고 따뜻한 기억으로 남은 순간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사업 지역의 한 학교를 방문했던 날이다.

당시 사무소에서는 직원들이 학교 학생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전달하는 행사를 준비했다. 재미있었던 건 선물을 준비하는 방식이었다.

사무실 입구에 놓인 크리스마스 트리에는 학생들의 이름이 적힌 작은 메모들이 오너먼트처럼 걸려 있었다. 직원들은 그중 하나를 무작위로 골라 학생 한 명과 연결됐다. 메모에는 학생의 이름과 성별, 키, 발 사이즈 등의 간단한 정보가 적혀 있었고, 직원들은 자신과 연결된 학생을 위해 각자 선물을 준비했다.

얼굴도, 성격도 모르는 학생이었지만 주어진 정보를 바탕으로 어떤 선물을 좋아할지 고민하는 과정 자체가 꽤 즐거웠다.

크리스마스가 되기 전, 우리는 준비한 선물을 들고 학교를 찾아갔다. 평소에는 각자 사무실에서 일하던 직원들이 이날만큼은 공연 준비로 바빴다. 점심시간에 틈틈이 연습했던 짧은 공연도 선보였는데, 나는 스페인어가 유창하지 않은 관계로 노래를 부를 때만 깜짝 출연해 열심히 리액션을 담당했다.

이후에는 학생들과 함께 밥을 먹고 탁구도 치면서 시간을 보냈다. 마지막에는 각자 준비한 선물을 전달했다.

행사 중에는 중남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피냐타(Piñata) 놀이도 있었다. 사탕과 간식으로 가득 채운 종이 인형을 높이 매달아 놓고, 눈을 가린 사람이 막대기로 몇 차례 내리쳐 터뜨리는 놀이다. 피냐타가 터지는 순간 사탕이 바닥에 쏟아지면 아이들이 서로 먼저 주우려고 달려들었다. 

평소 컴퓨터 앞에 앉아 자료를 정리하던 일상과는 전혀 다른 하루였다. 무엇보다 평소 사무실에서 보던 동료들이 학생들을 위해 공연하고, 선물을 준비하고, 함께 웃는 모습을 보는 것도 새로웠다.

특히 얼굴도 모르는 학생 한 명을 위해 누군가가 시간을 들여 선물을 고민하고 준비했다는 사실이 좋았다. 누군가를 위해 마음을 쓰는 일이 이렇게 즐거울 수도 있구나 싶었다. 해외에서 혼자 오랜 시간을 보내던 나에게도 왠지 모르게 위로가 되고 따뜻해지는 하루였다.

사무실에서 진행하는 업무가 실제 사업 지역의 사람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도 기억에 남는다. 이전 방글라데시 해외봉사 때도 느꼈지만, 국제개발협력 분야의 일은 때로 그 성과나 변화를 눈으로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사업을 기획부터 집행, 평가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만 그것이 실제로 어떤 변화를 만들어 내고 있는지 당장 체감하기는 어렵다. 때로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이 과연 의미 있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이렇게 사업이 이루어지는 현장에 직접 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면, 내가 하는 일이 결국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조금 더 선명하게 느껴진다. 평소에는 업무와 숫자, 보고서로만 접하던 사업이 실제 사람들의 일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순간들이 내가 이 분야의 일을 계속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크리스마스 행사, 다같이 빨간색 옷을 맞춰 입은 직원들/사진=young
생일이나 각종 행사에서 즐기는 피냐타(Piñata)/사진=young 

# 파나마에서 일한다는 것

인턴십이 끝나갈 무렵인 11월, 파나마에서는 월드컵 예선이 한창이었다.

그해 파나마는 월드컵 본선 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었고, 본선 진출 여부가 결정되는 중요한 경기가 파나마 현지 시간으로 저녁 8시에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경기 당일, 갑자기 사무소 단체 채팅방에 공지가 하나 떴다.

"오늘은 오후 1시에 퇴근하세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월드컵 경기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 처음에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경기가 저녁 8시인데 오후 1시에 퇴근이라니. 한국에서는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그날 파나마는 크게 승리하며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했다. 파나마 역사상 두 번째 월드컵 본선 진출이었다. 그날 밤 거리는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밤새 자동차들이 경적을 울리며 거리를 돌아다녔고, 사람들도 거리로 나와 함께 기쁨을 나눴다.

이런 일들은 내가 파나마에서 일하면서 경험한 여러 문화적 차이 중 하나였다.

평소에도 사무소에서는 출퇴근 시간이 비교적 유연한 편이었다. 특히 몸이 좋지 않을 때면 일단 출근해서 참는 것보다는 쉬는 것을 먼저 권하는 분위기였다. 내가 컨디션이 조금 안 좋아 보이거나 아프다고 이야기하면 상사나 동료들이 먼저 병원에 가보라고 하거나 집에 가서 쉬라고 했다. 정해진 병가 일수를 신경 쓰기보다 몸 상태를 우선적으로 고려해 주는 느낌이었다.

물론 내가 경험한 사무소의 분위기를 파나마의 모든 직장 문화라고 일반화할 수는 없다. 국제기구라는 조직의 특성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당시의 나에게는 상당히 새로운 경험이었다.

동료들과 함께한 점심시간/사진=young

# 6개월의 시간을 돌아보며

처음 파나마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국제기구에서 일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몰랐다. 국제기구라는 이름에서 떠올렸던 모습과 실제 그곳에서 보낸 일상은 생각보다 많이 달랐다.

보고서를 작성하고, 엑셀을 만들고, 다른 부서와 미팅을 잡고, 행사 준비를 돕는 일.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업무를 맡기도 하고, 동료들과 함께 웃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내가 경험한 국제기구는 특별한 사람들만 모여 거창한 일을 하는 곳이라기보다,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일을 하고 서로의 업무를 도우며 하루를 보내는 평범한 직장이었다.

그리고 그 평범한 일상 속에서 만난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내게는 가장 오래 남는 기억이 되었다.

행사 중 동료에게 받은 작은 선물/사진=young
유엔식량농업기구 FAO 창설 80주년 기념행사/사진=yo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