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동 연립 4부: 민정이 엄마의 세계 #6] 돈이 돈을 벌다
“언니, 돈 언제 줄 거여?” “뭔 돈?” 여자는 모르는 소리를 들은 듯이 새침을 뗐다. “나한테 빌려 간 돈 말이여.” “내가 언제 너한테 돈을 빌렸다고 그려?” 정자는 기가 막혔다. 영화동에서 옷 장사하던 언니가 달러 이자를 쳐준다고 해서 몇 달 전 빌려주었는데, 이제 와서 잡아떼는 것이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시치미를 떼!” “증거 있냐?” 여자는 오히려 목소리를 높였다. 가게 앞 지나가는 사람들이 하나둘 돌아봤다. 정자는 한참을 따지다가 돌아섰다. 그 무렵 수남이 친구들이 집에 자주 드나들었다. 경찰서에서 보았던 녀석들이었다. 덩치 큰 아이들이 안방에 앉아 수남이와 떠들고 있으면 집이 비좁게 느껴졌다.
“누나 뭔 일 있어요?” 녀석들 중 하나가 물었다. 정자가 시내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세상에, 돈을 빌려가 놓고 잡아뗀다.” 수남이 친구 하나가 물었다. “누군데요?” “영화동서 장사하는 여자여.” “얼마나 빌려줬는데요?” 정자가 액수를 말하자 녀석들이 서로 얼굴을 쳐다봤다. “누나, 우리가 받아다 줄까요?” “니들이?” “기다려 봐요.”
다음날 수남이 친구들이 찾아왔다. 한 녀석이 접힌 지폐 뭉치를 정자 앞에 내려놓았다. “받아왔어요.” 정자는 돈을 세어봤다. 빌려준 돈보다 많았다. “이건 뭐여?” “이자까지 받아왔죠.” “그 여자가 순순히 줘?” 녀석들이 웃었다. “안 줄 돈이 어디 있어요.” 사례금을 준다고 해도 녀석들은 한사코 거절했다. 정자는 수남이 친구들을 번갈아 바라보고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날 밤 정자는 돈을 다시 세었다. 약속한 이자에 일자가 밀린 이자까지 꼬박 계산한 돈이었다. 문득 어머니의 장롱이 떠올랐다. “엄마.” 어머니는 빨래를 개고 있었다. “장롱에 넣어둔 돈 있잖아.” “그게 왜?” “나 잠깐만 빌려줘.” 어머니가 손을 멈췄다. “그 돈은 수남이 대학 보낼 돈인디.”
정자는 입을 다물었다. 어머니는 수남이가 퇴학당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몰랐다. “알어. 잠깐만 쓰고 도로 넣어놓을게.” “안디야.” “아니, 수남이 대학 갈려면 몇 달 남았잖아.” 어머니는 한참을 망설였다. 그러다 장롱을 열고 깊숙이 넣어둔 돈뭉치를 꺼냈다. “꼭 돌려놔야 혀.” “알았어.” 정자는 돈을 받아 들었다.
그 뒤로 정자에게 돈을 빌리러 오는 하나둘 사람들이 늘었다. 장사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 급하게 목돈이 필요한 사람도 있었다. 정자의 장부는 빼곡해졌다. 돈을 갚지 않는 사람들에게 수남이 친구들이 몇 번 찾아가자 그 뒤로 이자를 밀리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었다.
어머니에게 빌린 돈도 얼마 지나지 않아 돌려주었다. “엄마, 빌린 돈.” 어머니는 돈을 세어보더니 정자를 바라봤다. “벌써? 머 이상한 거 아니지?” “아냐.” 어머니는 돈을 다시 장롱 깊숙이 넣었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나자 세간살이도 바뀌어 갔다. 석유 곤로 대신 가스레인지가 들어왔고, 부뚜막에 짓던 밥은 전기밥솥이 대신했다. 외풍이 심했던 집안에 전기난로가 있으니 웬만한 추위에도 끄덕없었다.
어느새 동생들도 다 컸다. 수남이 친구들도 더는 교복을 입지 않았다. 어머니도 새벽부터 나가서 도나스를 떼지 않았다. 그저 소일거리로 한 번씩 시장에 나갔다. 정자의 가방에는 항상 현금다발이 있었지만, 수남이 친구들 덕분에 남의 손을 탈 일은 없었다.
돈을 떼어 먹고 야반도주한 사람들은 수소문해 어떻게든 찾아갔다. 멀리 가봤자 익산까지였다. 돈을 줄 때까지 그 집에서 먹고 지내면 채무자는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 정자를 돌려보냈다. 그런데 전에 서울서 왔다는 그 여자 하나를 몇 달 동안 찾지 못하고 있었다. 백악관 나이트클럽에서 일하다가 요정을 크게 차린다기에 돈을 빌려주었더니, 빌빌대다가 결국은 군산을 튀어 버렸다.
“야! 정자야.” 같이 돈을 빌려준 언니가 숨을 헐떡이며 방문을 열었다. “어, 언니……” “야, 갸 찾았다. 그 여시 가시네.” “머여? 어딨는디?” “서울에 있디야. 쫓아가야지.” 정자는 부르르 떨었다. 그 여시는 정자뿐 아니라 여기저기서 돈을 쓰고 도망쳤다. 군산에서 돈놀이 좀 한다는 여자들 여럿이 돈을 물렸다. 그 떼어먹은 돈을 다른 데 줬으면 이자가 얼만디. 눈앞에 있다면 머리 끄뎅이를 잡고라도 내 돈 내놔라 할 참이었다.
정자는 짐을 쌌다. 마침 서울에 사는 언니, 오빠도 있어서 잘됐다 싶었다. 정자는 그 여시 주소가 적혀있는 쪽지를 챙겨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