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166] 한국 시단의 거목 ‘문효치 시인’의 고향 옥산면
‘무령왕의 나무새’, ‘계백의 칼’ 등 주옥같은 작품 쏟아내 ‘고향마을’ 남내리 엽서…옥산수원지 동화 속 용궁으로 그려 조부‧부친의 가정사의 아픔 시로 승화한 한국문단의 거목
[둔덕에서부터 소년들의 조잘거림이
꿈마다 배를 띄웠습니다.
<중략>
수염 허연 용왕과
동화 속의 별주부
기화요초로 장식한 용궁을
물속에 그녀 넣었습니다.
옥산수원지는 바다 보다 넓었습니다.]
한국현대문단을 대표하는 거장이자 군산이 낳은 문효치 시인(1943~)의 시 ‘남내리 엽서’다.
문단에 화려하게 등단한 그는 ‘무령왕의 나무새’, ‘남내리 엽서’ ‘계백의 칼’ 등 주옥같은 작품을 통해 백제의 역사적 숨결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한국 고유의 서정으로 승화시켜 왔다.
문 시인과 관련된 내용들이 문화자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실제로 최근 옥산면 일대에서는 이러한 문학적 자산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문효치 시인의 거리’ 조성과 함께 지곡동 새들공원 벽면에 문인의 거리에 그의 문학적인 활동 내용이 소개되고 있다. 특히 고향 옥산면 남내리에 살았던 그의 발자취는 옥산면이 지닌 자연의 풍요로움이 어떻게 깊이 있는 문예적 감성으로 피어나는지를 잘 보여준다.
시인의 시어가 품은 서정처럼, 옥산면의 바람과 들판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시가 된다.
옥산면이 간직한 근현대사의 상흔은 단순히 오래된 유적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 땅은 한국현대문단을 대표하는 거목, 문효치 시인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자, 그의 시 세계를 지탱하는 영감의 원천이다.
그리고 그의 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거쳐온 뼈아픈 가족사와 가문의 굴곡을 결코 외면할 수 없다.
# 거대한 부와 비극의 그늘 속 꽃 피운 시혼
문효치 시인의 집안은 일제강점기 군산 지역에서 막대한 부를 누린 명문거족이었다.
그의 조부인 문종구(文鍾龜)는 옥구 일대에 수백 정보의 농지를 소유했던 대지주이자 실업가로,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지역사회의 거물로서 화려한 명성을 누렸으나, 이는 역사 앞에서 씻을 수 없는 친일 행적이라는 무거운 오명으로 남았다.
조부의 그늘과 함께 소년 문효치의 가슴에 더욱 깊은 상처로 박힌 것은 바로 부친의 월북이었다.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지성인이었던 선친은 6·25 전쟁 당시 인민군에 지원하며 격동의 시대 속으로 사라졌다.
해방과 한국전쟁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폭풍우 속에서 집안은 몰락했고, 어린 문효치 시인이 감당해야 했던 시대적 낙인과 고독은 소년의 영혼에 깊은 침묵과 사색,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부조리함 그 자체였다.
일제의 부(富)와 친일의 유산, 그리고 한국전쟁이 남긴 아버지의 부재와 월북이라는 가혹한 낙인은 어린 시인에게 세상이라는 거대한 미로이자 넘어야 할 거대한 벽이었다.
# 문효치 시인의 문학 세계
가문의 영욕과 현대사의 비극이라는 무거운 짐은 아이러니하게도 문효치 시인을 한국 문단의 대들보로 이끄는 처절한 자양분이 되었다.
현실의 아픔과 존재의 부조리 속에서 그는 침묵과 응시를 택했고, 이를 고결한 언어의 예술로 승화시켰다.
1966년 《서울신문》과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당선되며 화려하게 등단한 그는 이후 백제의 역사적 공간과 고향의 자연을 교차시키는 독보적인 시 세계를 구축했다.
특히 대표작 ‘무령왕의 나무새’ 등을 통해 멸망한 왕국의 슬픔과 역사적 허무를 응시하는가 하면, 고향 옥산면의 풍경과 정서를 담아낸 ‘남내리 엽서’를 통해 인간 본연의 고독과 자연의 섭리를 노래했다.
그의 시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깊은 고요함과 서정은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의 묘사가 아니라 시대의 상처와 개인의 비극을 견뎌낸 영혼이 도달한 구원의 경지에 가깝다.
한국시인협회상과 정지용문학상, 석정시문학상 등 수많은 권위 있는 상들을 수상하며 한국 문학의 품격을 높여온 그는 삶의 아픔을 예술로 꽃피워낸 진정한 시인이었다.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국제PEN 한국본부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한국 문단의 수장으로 활동했다.
과거 조부의 거대한 농지가 펼쳐졌고,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눈물 흘리던 소년이 문학의 꿈을 키웠던 이 땅은 이제 모든 상처를 보듬는 생태와 문향(文香)의 낙원이 되었다.
역사의 그늘과 비극을 시혼(詩魂)으로 이겨내며 한국 문단의 거목으로 선 문효치 시인.
그가 태어난 옥산면의 흙과 바람은 오늘도 아픔을 품에 안고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묵묵히 따스한 위로의 시를 건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