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동 연립 4부: 민정이 엄마의 세계 #4] 버텨온 대가

2026-10-16     김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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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돌아온 것은 해가 팔마재를 느리게 넘어갈 무렵이었다. 무더위도 갈 때가 되었는지 날이 저물면 제법 선선해졌다. “민자야, 쌀 있는데 우리가 밥할까? 엄마 오늘 늦게 오네.” 딸그락 딸각. 양은냄비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부산스러웠다.

대문이 열렸다. 딸들은 부엌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어머니가 구루마를 밀고 들어오고 있었다. 민자가 얼른 달려갔다. 어머니의 걸음이 평소보다 느렸다. 저고리 앞섶이 늘어져 있었고, 전대의 한쪽 매듭이 풀어져 땅에 질질 끌렸다.

“엄마, 왜 그래?” “뭐가.” 어머니는 구루마를 마당 한쪽에 세웠다. 그제야 생각났는지 전대를 풀고 옷섶을 대충 여몄다. 코를 쏘는 소주 냄새가 났다. “술 마셨어? 한 잔도 입에 못 대는 양반이 웬일이래?” “뭘.” 어머니가 몸을 돌리는 순간 정자의 눈이 목덜미에 멈췄다. 목덜미에서 쇄골 쪽으로 붉은 자국들이 엉켜있었다. 손톱에 긁힌 살갗에는 피가 말라붙었고, 그 아래로 푸르스름한 멍이 번져 있었다.

“이게 뭐야?” 정자가 손을 대려 하자 어머니가 고개를 피했다. 빨개진 눈가에는 아직도 물기가 남아 있었다. “아무것도 아녀.” “누가 그랬어?” “됐다.” “뭐가 돼. 누가 그랬냐니까.” 어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구루마에서 남은 도나스 판을 내려 부엌으로 가져갔다. “엄마!” “밥 먹자.” 부엌문이 닫혔다. 정자는 한동안 닫힌 부엌문을 바라봤다.

덜컹. 잠결에 들려온 소리에 정자가 눈을 떴다. 덜컹, 끼익. 구루마 소리였다. 방문을 열자 새벽의 서늘한 공기가 밀려들었다. 마당에 어머니와 민자가 있었다. 어머니는 구루마에 도나스 판을 싣고 있었다. 전대의 찢어진 자리에 흰 실로 꿰맨 자국이 보였다. 반창고인 양 새벽빛에 희뜩거렸다.

“엄마.” 민자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모집에서 돈 받았어?” “아니.” “또?” “응.” “왜?” 어머니가 다시 손을 움직였다. “외상값 좀 달랬더니 달려들더라.” “뭐?” “내비둬.” “도나스랑 모찌를 시키지를 말든가. 맨날 받아 놓고 돈 달라면 그러고. 그럼 공짜로 주는 거나 뭐가 달라.” “조용히 해라. 니네 언니 알면 난리난다.” 막내 여동생이 한숨을 쉬다 무심코 마루 쪽을 바라봤다.

얼굴이 굳었다. 어머니도 뒤를 돌아봤다. 정자가 마루 끝에 서 있었다. 두 손이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어디야?” 어머니가 정자를 바라봤다. “뭐가.” “그놈의 집 어디냐고.” “뭔소리여? 들어가.” “이모집이라며?” 어머니가 흠칫 놀라 민자를 돌아봤다. “시장 안에 있는 이모집 맞지?” 정자는 신발을 신었다. “됐어. 내가 찾으면 돼.”

역전 앞은 새벽부터 사람들로 붐볐다.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좌판을 펼 자리를 찾고 있었다. 빨갛고 파란 차양이 펼쳐지자 호박이며 가지, 고추, 오이가 신문지 위에 가지런히 놓였다.

정자는 빠르게 걸었다. 시장 안쪽으로 들어서자 비린내가 훅 끼쳤다. 박대와 조기, 갈치가 궤짝 위에 줄지어 누워 있었다. 파리가 나풀대는 노끈을 피하며 생선 위로 내려앉으려 했다. 탁. 상인이 파리채를 내리쳤다. 천장의 끈끈이에는 수십 마리의 파리며 모기가 다닥다닥 달라붙어 있었다.

“정자야.” 지나가던 누군가 말을 걸었다. 정자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생선전이 끝나자 광장이 나왔다. 광장 한가운데 장판을 씌운 긴 탁자들이 일렬로 이어졌다. 사람들이 나란히 앉아 국수를 후루룩거렸다. 매운잡채, 미니족발, 떡볶이와 김밥이 양은쟁반에 담겨 손님들 앞에 놓여있었고, 그 끝에 도나스와 꽈배기, 모찌가 보였다.

하얀 바탕에 빨간 글씨로 쓴 간판들이 보였다. 서천집, 옥자네, 일호집……. 이모집. 정자가 그 앞에 멈춰 섰다. 한 잔 150원. 뚜껑이 열린 소주병들 사이로 덩치 큰 여주인이 보였다. 두툼한 팔뚝과 불룩한 배가 앞치마를 팽팽하게 당기고 있었다. 정자는 어머니의 앙상한 목덜미에 남아 있던 손톱자국을 떠올렸다.

곧장 여자 앞으로 갔다. “어서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주인이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아이고!” 일어서려던 여자의 머리채가 정자의 손에 감겼다. 정자는 여자를 가게 밖으로 끌어냈다. “아이고! 이것 좀 놔요!”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고개를 돌렸다. “뭔일이여?” 정자는 여자를 내려다봤다. “돈 내놔.” “네?” “우리 엄마 돈 내놓으라고!”

짝. 여자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남의 물건을 쳐 가져갔으면 돈을 줘야 될 거 아냐?” “장항댁 말하는 거예요? 아니, 내가 소주도 주고 했는데.” 여자의 눈에 독기가 살아났다. “소주가 십만 원이냐?” 정자의 손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아이고, 머리야. 이것부터 놔!” “내놔. 빨리” “놓고 말해!” “머리껍데기 벗겨질 때까지 못 놔.” 상인 몇이 달려와 정자의 팔을 잡았다. “아가씨, 그만혀.” “가만있어 봐. 장항댁 둘째 딸 아녀?” “그 집안이 얌전한 집안인디….” “빼짝 말랐는디 보통 아니네.” 정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여주인의 얼굴에서 땀이 뚝뚝 떨어졌다. “알았어요. 준다고요!” 여주인이 전대에서 구겨진 천 원짜리를 한 움큼 꺼냈다. 정자가 돈을 낚아챘다. 그제야 머리채가 풀렸다. “미친년 아니야?” 돌아서던 정자의 몸이 앞으로 휘청했다. 여주인이 달려든 것이다. 정자는 여주인의 멱살을 잡아챘다. “너 우리 엄마도 이렇게 때렸냐?” “아니, 그게……” “너도 당해봐.” “미안해요. 미안하다고요!” 사람들이 다시 달려들었다. 한참 뒤에야 정자의 손이 풀렸다. 여주인은 가게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손에는 구겨진 지폐가 쥐어져 있었다. “아이고, 이를 어쩌냐.” 돈을 받은 어머니는 울상을 했다. “뭘 어째?” “인자 거기서 도나스 안 받는다고 하면 어쩌냐.” 정자의 눈이 커졌다. “뭐?” “어쩐다냐, 어쩐다냐.” “엄마는 분하지도 않아?”

정자가 마당 한쪽을 노려보았다. 낡은 구루마가 서 있었다. “그놈의 도나스.” “뭐?” “그거 팔아서 얼마나 남는다고. 새벽마다 끌고 나가서 외상 주고, 돈 달라고 했다가 얻어맞고.” “됐다. 그만해라.” “여태 시장바닥에서 버텨서 뭘 얻었는데?” “저놈의 구루마를 없애야 돼.” 쾅. 구루마가 옆으로 밀렸다. “야! 그만혀!” 정자가 다시 걷어찼다. 끼이익. 낡은 나무 덩어리가 한쪽으로 기울며 비명을 냈다.

어머니가 달려와 구루마를 막았다. “그만하라니까!” 정자가 숨을 몰아쉬었다. “이딴 걸 왜 붙들고 살아!” “시끄럽다!” 어머니가 소리를 질렀다. 비뚤어진 손잡이를 움직여봤다. 끼익, 끼익. 손잡이가 헐겁게 흔들렸다. “아이고…….” “그냥 버려. 내가 돈 줄게.” “필요 없다.” “그럼 저걸 계속 끌고 다니겠다고? 또 나가면 저거 진짜 다 부숴버릴 거야.” 정자는 계속 발길질을 했다.

어머니가 서둘러 안방으로 들어갔다. 쿵. 장롱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정자가 숨을 몰아쉬며 구루마를 걷어차고 있을 때 어머니가 보따리 하나를 들고 나왔다. “봐라.” 보따리 속에서 지폐뭉치가 나왔다. 정자의 발이 멈췄다. “이게 뭐야?” “돈이다.” “무슨 돈?” “도나스 팔아서 모은 돈.” 정자의 눈이 커졌다. “이게 다?” “봐라. 이렇게 모았는데 관두면 어떻게 하냐.”

정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돈을 다시 싸기 시작했다. “막내 대학은 보내야지.” 어머니는 돈을 품에 안고 다시 안방으로 갔다. 장롱 안쪽 옷가지를 걷어내고 돈을 깊숙이 밀어 넣었다. 탁. 장롱문이 닫혔다.

잠시 후, 어머니와 민자가 구루마를 다시 세우고 있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정적을 메웠다. 그때 대문 앞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계십니까?” 민자가 내다봤다. “무슨 일이세요?” “경찰입니다. 심수남 씨 계십니까?” “네?” 어머니가 침묵을 깼다. “우리 막내인데요. 무슨 일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