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스크린여행-⑩선유도와 고군산군도] 新로케이션지 주목
바다를 건너온 그리움의 옛 기록… 서긍의 ‘고려도경’과 ‘이우도’ 스크린 넘어 K-콘텐츠의 심장 우뚝… 추억과 로맨스 작품 타진 영화 수학여행의 아날로그 동심 넘어 글로벌 OTT 주목도 높여야
철 지난 바다가 호젓하고 운치 있는 늦여름, 바다를 품은 섬은 늘 그리움과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되어왔다.
뭍과 단절되어 있던 섬은 역설적으로 예술가들의 사유를 부르는 캔버스이자, 문학과 역사가 교차하는 무대였다.
바다와 육지의 경계를 허문 지금, 서해의 푸른 품에 안긴 군산시 옥도면 고군산군도의 보석 선유도(仙遊島)는 과거의 시서화(詩書畵)와 스크린 속 은막의 예술을 품고 새로운 문화예술의 핵심공간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 이젠 옛이야기가 된 ‘고군산군도’
“바다가 육지라면 / 배 떠난 부두에서 울고 있지 않을 것을…”
가수 조미미가 부르고 이미자가 커버한 국민 이별송 ‘바다가 육지라면’(1970)은 이제 옛이야기가 됐다.
그 섬에 가고 싶을 때 언제든 갈 수 있는 ‘차로 가는 섬 여행’ 시대가 활짝 열렸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지점이자 서해의 품에 안긴 군산시 옥도면 고군산군도의 보석, 바로 선유도(仙遊島)다.
# 900년 전 서긍의 눈에 비친 예술적 해양 낙원, ‘군산도’
선유도의 문화적 뿌리는 거슬러 올라가 900년 전 고려의 정취 속에서 빛을 발한다. 1123년(인종 1원년)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를 찾았던 서긍(徐兢)이 남긴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은 당시 ‘군산도’라 불리던 이곳이 단순한 항구가 아닌, 고도의 격조를 지닌 해양 문화의 요충지였음을 증명한다.
서긍은 고려 왕이 머물던 웅장한 숭산행궁과 송나라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바닷가에 세워진 아름다운 정자(군산정)의 풍경을 세밀하게 기록했다.
당시 실력자 김부식이 직접 내려와 사신단을 맞이하고, 푸른 바다 위에서 펼쳐진 화려한 영접 연회와 선박(송방) 건조의 현장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예술적 축제이자 국가적 교류의 장이었다. 바다는 그들에게 세상과 통하는 가장 우아한 통로였다.
# 유배의 아픔을 예술적 연대로 승화시킨 ‘군산이우도’
시간이 흘러 조선시대에 접어들며, 고군산군도는 세상과 격리된 유배의 땅이자 시름을 삭이는 사색의 공간으로 변모했다.
선유도 망주봉에 얽힌 '임금을 그리워하는 선비의 눈물이 폭포가 되었다'는 전설은 이 섬이 얼마나 깊은 그리움과 서사를 품고 있었는지를 대변한다.
하지만 이 고립의 아픔은 오히려 깊은 정신적 교감으로 피어났다.
그 대표적인 유물이 바로 조선 중기 문인화가 조영이 1596년(선조 29)에 그린 시서화첩 ‘군산이우도(群山二友圖)’(건국대박물관 소장)이다.
임진왜란의 피난길 속에서 고군산군도라는 낯선 섬에 우연히 모인 조영과 영남의 선비 김주는 서로를 위로하며 한 폭의 그림과 시에 우정을 담아냈다. 칠흑 같은 전쟁의 서글픔 속에서 섬이라는 공간이 빚어낸 이 찬란한 예술적 연대는 오늘날 우리에게 묵직한 울림을 준다.
# 스크린 속에 피어난 순수의 영원한 고향, 영화 ‘수학여행’
역사와 사유의 공간이었던 선유도는 20세기 중반, 한국 영화사의 위대한 캔버스로 재탄생했다. 한국 영화계의 거장 유현목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고(故) 구봉서가 주연을 맡은 영화 ‘수학여행’(1969)은 선유도를 배경으로 시대의 감금을 넘어선 순수한 동심을 그려냈다.
섬마을 분교의 인자한 김 선생님(구봉서 분)이 낙도의 아이들을 이끌고 생애 처음으로 서울을 향해 수학여행을 떠나는 여정은 1960년대 말 산업화의 그늘 속에서도 고립된 섬이 지닌 순수함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각인시켰다. 선유도의 해변과 바람은 은막 위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대한민국 영화사의 서정적 원형이 되었다.
# 역사와 예술이 숨 쉬는 섬, K-콘텐츠의 새로운 캔버스로
이제 새만금 방조제와 연륙교를 통해 뭍과 하나가 된 고군산군도는 더 이상 단절의 섬이 아니다.
‘고려도경’이 증명한 천년의 해양 문화적 스펙트럼부터 조선 선비들의 애틋한 시서화, 그리고 1960년대 한국영화의 순수한 풍경까지 고스란히 간직한 채 전 세계를 향해 문을 열고 있다.
군산의 섬들이 지닌 로케이션 매력은 첫째, 사극부터 로맨스까지 소화하는 압도적인 비주얼과 레트로 감성이다.
둘째, 연도교 개통으로 장비와 인력 이동이 편리해진 제작환경의 혁신이다.
셋째, 글로벌 OTT 시장에서 각광받는 한국적인 로컬리티의 잠재력이다.
과거 사신들의 연회가 열리던 바다이자, 선비들이 우정을 나누던 화폭이었던 이곳은 이제 전 세계 독창적인 로컬리티를 갈망하는 K-콘텐츠 제작자들의 가장 매혹적인 무대로 거듭나고 있다.
철 지난 바다의 호젓한 풍경 속에서, 선유도를 포함한 고군산군도는 여전히 우리에게 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