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스크린여행-⑧월명공원] 시‧ 사상‧ 영화의 배경
김광균 시인- 채만식 소설가- 이영희 교수- 영화감독 시인 김광균, 청년기 보낸 경성고무 시절 창작 모티브 공간 시, 자유, 그리고 영화의 배경: 군산이 품은 예술의 궤적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저마다의 거대한 물리적·정신적 공간을 남긴다.
그 공간은 때로는 누군가에게 치열한 사유의 터전이었고, 때로는 시와 소설, 연극, 그리고 스크린이라는 예술적 무대로 옮겨져 시대의 아픔을 비추는 거울이 되기도 했다. 한국 현대 지성사의 큰 스승인 ‘사상의 아버지’ 고(故) 이영희 교수와 한국 문학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거장들(채만식, 김광균 등).
이들이 마주했던 시대와 예술의 공간인 월명공원은 오늘날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한다.
# 이영희가 머문 공간: 분단과 냉전의 거친 바람 속 진실의 터전
‘사상의 아버지’라는 호칭처럼, 한국전쟁 직후 월명공원에서 대학시절을 보냈던 이영희 교수가 냉전과 독재의 폭력이 지배하던 서막(?)을 뿌연한 안갯속에서 보았을 터.
‘전환시대의 논리’를 세상에 내놓으며 한국 사회의 맹목적인 반공주의와 주류 인식을 뒤흔들었던 그는, 감옥과 해직이라는 억압의 공간 속에서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시대의 진실’을 응시했다. 그에게 공간은 단순한 물리적 거주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민족의 분단과 민주주의의 부재라는 모순을 온몸으로 돌파해 나가며 새로운 사상의 지평을 열어젖힌 치열한 정신의 최전선이었다.
이곳 주변에 한국해양대학교가 있을 때 대학을 다닌 이영희 선생은 이곳 출신 배우자와 연애하고 평생을 해로했고, 그 부인은 과거를 회상한 글 중에 이곳 얘기가 종종 다뤄줬다.
# 채만식과 월명공원, 그리고 ‘탁류’가 빚어낸 군산의 풍경
이러한 공간의 미학은 항구도시 군산이라는 특수한 지형에서 격렬하게 요동쳤다. 군산이 낳은 대문호이자 소설 ‘탁류’를 통해 일제강점기 쌀 수탈의 비극과 세태의 부조리를 날카롭게 고발한 채만식 선생에게 군산은 식민지의 상흔이 고스란히 스민 거대한 소설의 무대였다.
비록 소설의 행간에 ‘월명공원’이라는 지명이 직접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지는 않으나, 오늘날 군산 앞바다가 굽어 보이는 월명공원 자락에는 채만식의 문학비가 세워져 ‘탁류’가 품었던 시대의 통탄과 고향의 풍경을 묵묵히 증언하고 있다.
군산의 바다와 바람을 조망하는 이 공원은, 탁류 같은 세파를 헤쳐가며 시대를 고발했던 작가의 문학적 영혼이 깃든 상징적 공간이다.
# 김광균이 마주한 군산의 공간: 경성고무의 청춘과 모더니즘의 탄생
채만식이 소설로 군산의 탁류를 헤쳐 나갔다면, 시인 김광균에게 군산은 모더니즘의 감수성이 싹튼 청춘의 터전이었다.
개성의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났지만 가세의 몰락으로 소년 가장이 된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살길을 찾아 항구도시 군산으로 내려왔다.
그는 군산의 대표적인 근대 기업인 ‘경성고무’에 입사해 낮에는 숫자를 다루는 실업인으로, 밤에는 항구의 밤풍경과 낯선 근대의 불빛 속에서 시를 썼다. 그의 군산생활은 1932년 10월부터 1938년 1월까지로 알려졌다.
청춘을 군산에서 보낸 그의 체험은 훗날 ‘와사등’, 설야’ 같은 주옥같은 모더니즘 시로 탄생했다. 월명공원을 거닐며 바라보는 군산의 바다와 옛 도심의 풍경 속에는, 이렇듯 고단한 청춘 속에서도 차갑고도 아름다운 문명의 불빛을 건져 올렸던 한 시인의 쓸쓸하고도 찬란한 발자취가 깊게 포개져 있다. 일부 언론에선 그의 옛 추억을 손자의 빛 바랜 기억물로 회상하기도 했다.
# 스크린 속으로 걸어 들어온 월명공원과 군산의 풍경
시인과 작가들이 문학의 언어로 군산의 숨결을 기록했다면, 오늘날 월명공원과 그 인근 일대는 특유의 고즈넉하면서도 근현대적인 풍경 덕분에 수많은 명품 영화와 드라마의 배경으로 사랑받고 있다.
월의 크리스마스(1998): 한석규, 심은하 주연의 명작 멜로 영화로, 주인공들이 일상을 나누는 동선 속에 월명공원 입구와 인근 골목길, 초원사진관 일대가 고스란히 담겨 서정적인 분위기를 완성했다.
사랑할 때(2014): 황정민, 한혜진 주연작으로 배경의 90% 이상이 군산에서 촬영되었으며, 월명공원과 바다조각공원 일대가 애틋한 감정이 오가는 주요 무대로 등장했다.
무대: 월명공원 자락과 맞닿아 있는 원도심(동국사 길, 히로쓰가옥, 초원사진관 등)은 타짜, 화려한 휴가, 변호인 등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담아낸 단골 영화촬영지로 유명하다.
# 거장들이 만나는 지점: 시와 사상, 그리고 영화가 기록한 시대의 기록
전환시대의 논리를 쓴 사상가 고 리영희 교수가 냉철한 지성과 비판적 사상으로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등대가 되었다면, 채만식과 김광균이 일구어낸 군산의 풍경, 그리고 김광균 시인이 직조해 낸 극적 긴장감은 예술의 언어로 그 어둠 속에서 신음하던 인간의 내면을 포착해 냈다.
이들이 머물렀고 증언했던 공간들, 그리고 오늘날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 스크린 속으로 확장되는 군산의 다양한 풍경들.
문학거장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남긴 묵직한 발자취는 오늘날 월명공원의 바람과 함께 우리가 디디고 선 이 땅의 공간을 다시금 되돌아보게 만드는 영원한 지표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