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스크린 여행- ④경암동 철길마을] ‘멈춰버린 시간마을’ 독특한 풍경

1944년 산업용→ 1970년대 본격적인 정착→ 2008년 운행 중단 영화 ‘남자가 사랑할 때’ 등 촬영지‧ 사진 애호가들의 출사지 인기 관광객들, 70‧ 80년대풍 교복 입고 옛 시절로 추억여행 ‘흠뻑’

2026-09-22     정영욱 기자
옛 개정역. / 사진=투데이군산

1981년의 주말, 늦은 오후가 되면 모교 기숙사로 돌아 오는길엔 어김없이 일명 ‘동차’라 불리던 미니 열차에 올랐다.

전라선의 춘포역에서 출발해 익산역을 거쳐, 군산선의 개정역에 내려 장군봉 인근의 어느 산길을 묵묵히 넘고 또 넘어 군산제일고 기숙사로 향하던 길. 그렇게 꼬박 1년을 주말이면 반복하는 귀굣길이었다.

그전 중학교 시절부터 훗날 대학생이 되어서까지, 내 학창 시절의 적지 않은 시간은 언제나 기차의 덜컹거림과 함께 흘러갔다.

그래서일까.

영화나 화면 속에서 기차가 등장하는 장면을 볼 때면, 나도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아련해지며 잊고 있던 그 시절의 풍경들이 오버랩 되곤 한다.

언젠가 TV 세계기행 프로그램을 보다가 베트남 하노이의 철길마을을 비추는 화면을 마주한 적이 있다.

기차가 다가올 때면 상인들이 고함을 지르며 철길 위에 늘어놓았던 물건들을 급하게 치워내던 그 아슬아슬한 풍경. 순간 나는 홀린 듯 수십년 전의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내가 자란 춘포역 인근 동네는 철길이 곧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기차가 지나갈 때면 철도 위에 나란히 못을 올려놓고 멀리서 숨을 죽이고 기다리곤 했다. 기차가 굉음을 내며 지나간 자리에 가보면, 마법처럼 납작하게 눌려 반짝이는 칼 모양으로 변해 있던 못. 그 신기해하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귀를 철길에 바짝 대고 쿵쾅거리는 기차의 진동을 온몸으로 느끼며 무료했던 통근과 통학의 시간을 달래던 그 시절, 철길은 우리의 전부였다.

# 철도에 박제된 추억, ‘페이퍼코리아선’의 숨 가쁜 역사

코로나19로 발길 끊긴 경암동 철길마을에 연휴를 맞아 관광객들이 다시 찾고 있다. /사진=군산시

군산의 유명한 ‘경암동 철길마을’을 처음 마주했을 때, 나는 강한 기시감과 함께 잊고 있던 내 어린 날의 조각들을 발견했다. 이곳의 시작은 194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문용지 제조업체인 페이퍼코리아가 공장에서 생산된 물품을 실어 나르기 위해 마을 한가운데로 철도를 놓았고, 그것이 바로 ‘페이퍼코리아선’의 역사였다.

총구간은 2.5km에 달하지만, 마을을 관통하는 핵심 구간은 4~500미터 남짓이다. 1970년대부터 본격적인 정착촌이 형성되면서, 이곳은 철길 위에 못을 올리던 내 어린 시절의 추억이 고스란히 박제된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과거 이곳에 기차가 지나는 날이면 진풍경이 벌어지곤 했다. 역무원 세 명이 기차 맨 앞에서 호루라기를 불며 고함을 질러 사람들의 통행을 막았고, 주민들은 집 밖에 널어놓았던 빨래와 고추 등 소중한 세간을 황급히 안으로 들여놓았다. 마당을 뛰놀던 강아지마저 혼비백산해 집 안으로 불러들여야 했던, 삶의 소음과 온기가 뒤엉킨 생생한 일상의 무대였다.

아쉽게도 이 철도는 2008년 7월 1일 군산역과 군산화물역의 영업이 중단되면서 완전히 멈춰 섰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덜컹거리며 오가던 화물열차가 사라진 그 자리에, 자박자박 밟히는 자갈 소리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채워지며 철길마을은 화려하고도 아늑한 관광지로 다시 태어났다.

# 스크린 속 로맨스가 머무는 곳… 옛 추억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경암동 철길마을/사진=군산시 제공

이 길은 소유의 경계가 따로 없다. 문과 벽, 빨랫줄과 텃밭이 철길을 사이에 두고 다정하게 어깨를 맞댄 채 고즈넉한 마을의 일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 독보적인 레트로 감성 덕분에 이곳은 영화 ‘남자가 사랑할 때’를 비롯한 수많은 작품의 촬영지이자, 전국 각지에서 찾아오는 사진 애호가들의 성지가 되었다.

황정민· 한혜진 주연의 영화 이창동 감독의 두 번째 연출작인 ‘박하사탕’(2000년)을 촬영했고 한동욱 감독의 ‘남자가 사랑할 때’(2013)는 군산에서 90% 이상 올 로케이션으로 촬영된 작품이다.

영화 속에는 경암동 철길마을을 비롯해 중화요리점 빈해원, 월명공원 등 군산의 구석구석이 숨김없이 담겨 있다.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타고, 또 SNS의 입소문을 타면서 이곳은 어느새 주말이면 전국에서 찾아온 연인과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군산 여행의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코스가 되었다.

불과 20년도 채 되지 않은 시간 동안, 이곳은 군산을 대표하는 핵심 관광 자원으로 우뚝 섰다. 이제 철길 주변의 옛 주택들은 실거주 공간 대신 방문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문구점과 아기자기한 잡화점들로 채워졌다.

길거리를 걷다 보면 1960~70년대 복고풍 풍경이 저절로 미소를 짓게 만든다. 그 시절 그토록 반가웠던 뽀빠이 과자, 라면땅, 그리고 추억의 ‘뽑기(달고나)’를 만드는 달달한 설탕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빌린 옛날 교복을 나란히 차려입고 철길 위를 왁자지껄 누비는 젊은 관광객들의 모습은, 이 공간이 단순히 박제된 과거를 구경하는 곳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추억과 교감하는 살아있는 생명력임을 보여준다.

철길에 귀를 대고 먼 곳에서 들려오는 기차 소리를 기다리던 소년의 마음으로 경암동 철길마을의 자갈 위를 걷는다. 덜컹거리던 동차의 기억과 귓가를 스치는 콧노래 속에서, 비록 시간은 흘러갔어도 우리의 가슴속에 품은 그리움은 언제나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음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