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동 연립 4부: 민정이 엄마의 세계 #1] 프롤로그_다시 시작된 삶
하늘이 유난히 파랬다. 엄마는 이층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봤다. 저 멀리 골목 끝에 아이가 보였다. 책을 한 아름 안고 걸어오고 있었다. 하나로 꽉 묶은 머리끝에 남은 파마기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살랑거렸다.
"민정아!”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엄마를 발견하고는 책을 한쪽 팔로 몰아 안더니 손을 흔들었다. “엄마!” 엄마는 그제야 창문에서 물러났다. 아직 낯선 동네라 독서실에서 돌아올 시간이 조금만 늦어져도 창밖을 내다보게 되었다.
현관문이 열렸다. “엄마, 델몬트 주스 사놨어?” 신발도 벗기 전이었다. “당연하지.” “고맙네.” 민정이는 곧장 주방으로 가 냉장고를 열었다. 델몬트 병을 꺼내더니 병째 입에 대고 꿀꺽꿀꺽 마셨다. “컵 놔두고 뭐 하냐.” “컵에 먹으면 맛없어.” 엄마가 웃었다.
“엄마, 나 자리 옮겼어.” “무슨 자리?” “학교. 선생님이 나 앞에 앉혔어.” 전학 온 첫날만 해도, 담임은 커트머리에 핀컬파마를 한 민정이를 교실 맨 뒤에 앉혔다. 한눈에도 속을 좀 썩이겠다 싶었던 모양이었다. 짝은 수업 시간마다 엎드려 자는 운동부 아이였다. 황순원의 「소나기」를 배우던 날에는 소년과 소녀 중 어느 쪽이 여자냐고 민정이에게 물었다.
“근데 선생님이 내가 공부하는 거 보고 놀랐나 봐. 앞자리로 옮겨줬어.” “당연히 그래야지.” 며칠 전 독서실 주인의 말도 떠올랐다. “민정이는 착해서 뭐라도 할 애예요.” 엄마는 그 말이 좋았다. 전학하고 처음 받아온 성적은 전교 백 등 언저리였다. 다음에는 오십 등, 그다음에는 삼십 등. 어느새 한 자리까지 올라갔다. 시험을 보고 온 날이면 민정이는 선생님 흉부터 봤다. “머리 좋은 놈이 공부 안 한다고, 틀린 거 두 배를 때렸다니까.” 투덜대면서도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이제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책상 앞에 앉았다. 한동안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던 아이가 제 발로 다시 돌아온 것 같았다. 그런데 가끔 민정이는 뜻밖의 말을 했다. “엄마, 도망간 거 아니었어?” 엄마가 민정이를 쳐다봤다. “내가 어딜 도망가.” “나는 그런 줄 알았어.” 엄마는 기가 막혔다. 도망이라니.
남편이 갑자기 죽고 모든 것이 엉켜버렸다. 유산 문제로 사람을 만나러 다녔고, 돈을 떼먹고 사라진 사람도 쫓아다녔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해서 먹고살아야 할지 몰라 타지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 묻기도 했다. 민정이는 그 시간을 몰랐다.
그동안 민정이를 아무한테나 맡긴 것도 아니었다. “막내숙모 못 됐어.” 민정이는 그 말을 여러 번 했다. “뭐가 그렇게 못됐는데.” “맨날 눈치 주고. 혼잣말하는 것처럼 내 들으라고 말하고.” “니가 좀 예민해서 그런 거 아니야?” 그때마다 민정이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엄마는 몰라.” “내가 왜 막내숙모한테 너를 맡겼는데. 많이 배웠잖아. 나는 못 가르쳐줘도 같이 있으면 뭐라도 배우겠지 싶어서 그랬지.” “됐어!” 민정이는 입을 닫았다.
엄마도 서운했다. 형제자매가 많은 집에서 큰애가 작은애를 보고, 작은애가 더 어린애를 건사하며 컸다. 가족은 원래 그렇게 서로를 거두는 줄 알았다. 그래서 민정이가 무엇이 그렇게 서러운지 엄마는 알 수 없었다.
자기는 민정이를 아무렇게나 키우고 싶지 않았다. 공부도 제대로 못 해본 자신처럼 만들고 싶지 않았다. 민정이 하나만 낳은 것도 그래서였다. 하나라도 제대로 키우고 싶었다. 그런데 제대로 키운다는 게 무엇인지는 몰랐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았다. 민정이는 자기와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민정이 친가에는 공부 잘한 사람들이 많았다. 좋은 대학을 간 사람도 있었고 의사도 있었다. 어릴 때부터 책을 붙들고 살던 민정이를 보면서 엄마는 생각했다. 이 아이는 저쪽 세계로 갈 수 있겠다.
그래서 붙들었고, 닦달했고, 하나부터 열까지 간섭했다. 잘못될까 봐 겁이 났다. 그러다 둘은 3년 가까이 떨어져 살았다. 다시 만난 민정이는 엄마가 알던 아이와 조금 달라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 민정이는 엄마가 말하지 않아도 책상 앞에 앉았다. 밤이 깊었는데도 민정이 방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엄마는 방문 앞에 서서 문제집을 들여다보는 아이의 등을 바라봤다. 한 장을 넘기고, 연필로 무언가를 쓰고, 다시 지우개로 지웠다.
언젠가 스님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딸만 믿고 사세요.” 엄마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민정이가 다시 제 길로 돌아오는 것을 보고 있으면, 자기 삶도 함께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사각. 책장이 한 장 넘어갔다. 엄마는 방문을 살며시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