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동 연립 3부: 민정이의 세계 #26] 상처가 남긴 것

2026-09-03     김규아

대문을 밀자 흰둥이가 먼저 달려왔다. 철그렁, 철그렁. 쇠줄이 마당을 긁었다. 이름과 달리 거뭇거뭇한 큰 개가 민정이를 보자 꼬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민정이는 쳐다보지 않고 마루로 올라갔다. “어니!” 나리가 방문을 붙잡고 서 있었다. 민정이를 보자 입이 헤, 벌어졌다. 이제 막 걸음을 배운 나리가 “어니, 어니” 하며 뒤뚱뒤뚱 걸어 나왔다.

민정이는 가방을 내려놓고도 나리를 안아주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벌써 번쩍 들어 올렸을 것이다. 양쪽 볼을 살짝 꼬집으면, 나리는 까르르 웃으며 민정이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민정이는 무뚝뚝하게 나리를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팔마재 다리 아래에서 아이들이 지르던 소리가 귓가에 남아 있었다. ‘민정이 돌았다.’ ‘야, 미친!’ 깨진 콜라병을 들자, 뒤로 물러서던 아이들의 얼굴도 떠올랐다. “어니.” 나리가 민정이에게 다가왔다. 민정이는 안방으로 휙 들어갔다. 나리도 따라왔다. 짧은 다리로 빨리 걸으려니 휘청거렸다. 그래도 민정이를 향해 허우적댔다.

“어니.” 민정이는 가만히 나리를 바라봤다. 나리는 해맑게 웃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갑자기 그 얼굴이 얄미웠다. 민정이가 전등 줄을 잡아당겼다. 딸깍. 방 안이 캄캄해졌다. 나리가 그대로 멈췄다. 잠시 후 울음소리가 들렸다. “으아앙―” 민정이는 움찔했다. 막내숙모가 들으면 어쩌지. 민정이는 거실 쪽을 살폈다.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상처받은 나리의 서러운 울음소리는 점점 커졌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민정이는 얼른 불을 켰다. 그리고 나리를 바로 안았다. 나리는 갑자기 밝아진 빛에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엉망이었다. “괜찮아. 언니 여기 있어.” 나리는 기다렸다는 듯 민정이에게 안겼다. 민정이는 나리의 등을 토닥였다. “미안. 안 그럴게.” 한참을 울 것 같던 나리는 몇 번 훌쩍이더니 울음을 그쳤다.

나리가 민정이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봤다. 그러더니 금세 미소를 지었다. “어니.” 민정이는 나리의 얼굴을 오래 바라봤다. ‘나를 이렇게 좋아하는 사람도 있구나.’ 마당에서 쇠줄 끄는 소리가 났다. 철그렁. 흰둥이가 마루 아래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꼬리를 흔들었다.

요즘 민정이는 흰둥이를 제대로 보지 않았다. 흰둥이가 반갑다고 달려들면 귀찮다고 밀어냈다. 기분이 좋지 않은 날에는 짜증을 냈다. 그러다 어쩌다 한번 불러주면 흰둥이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다시 달려왔다. 울다가 웃고 있는 나리처럼.

나리의 팔꿈치에 조그만 딱지가 보였다. 며칠 전 마당에서 넘어졌을 때 생긴 상처였다. 처음에는 벌겋게 피가 번져 있었다. 민정이는 손끝으로 그 둘레를 살짝 만졌다. 곪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딱지가 제대로 앉은 것 같았다. “아퍼?” 나리는 알아듣지도 못하고 웃었다. “어니.”

문득 오래전의 아이 하나가 떠올랐다. 방바닥에 엎드려 책을 읽던 아이. 어른들이 마냥 좋았던 아이. 남을 미워할 줄을 아직 잘 모르던 아이.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의 자신이었다. 불과 몇 년 전이었다. 그런데 아주 오래전 일처럼 그 아이가 낯설었다.

민정이는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의 얼굴을 먼저 살폈다. 말을 걸기 전에 표정을 보고, 가까이 가기 전에 자기를 싫어하는지부터 생각했다. 혼자 있는 것보다 아이들 틈에 있는 게 좋았다. 여럿이 몰려다니면 아무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 엄마의 돈을 훔치고, 또래의 하얀 양말을 벗겼다. 깨진 콜라병으로 아이들을 위협했다. 조금 전에는 나리를 울렸다.

민정이는 품 안의 나리를 내려다봤다. 문득 예전의 그 아이가 보고 싶었다.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마당에서 흰둥이가 짖었다. 민정이는 문밖을 바라봤다. 흰둥이는 여전히 거기 있었다. “흰둥아.” 민정이가 작게 불렀다. 철그렁, 철그렁. 흰둥이가 기다렸다는 듯 마루 쪽으로 달려왔다.

나리가 조그만 팔로 민정이를 꼭 안아주었다. “어니.” 민정이는 나리의 팔꿈치에 난 딱지를 피해 아이를 고쳐 안았다. 괜히 덧날까 싶었다. 민정이는 손끝으로 아이의 작은 등을 천천히 쓸었다. 마음 한구석이 오래 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