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동 연립 3부: 민정이의 세계 #24] 하얀 양말
적십자사에서 운영하는 도서관 뒤편으로 돌아서자 골목이 갑자기 좁아졌다. 대낮인데도 건물과 건물 사이에는 그늘이 길게 들어앉아 있었다. 벽에는 오래된 전단지가 반쯤 뜯긴 채 붙어 있었고, 어디선가 짜장면 냄새가 났다.
골목 안쪽 만화방 유리문에는 빛바랜 만화책 표지가 몇 장 붙어 있었다. 문을 밀자 담배 찌든 내와 라면 냄새가 뒤섞여 훅 끼쳐왔다. 낮인데도 안은 침침했다. 희끄무레한 형광등 아래 낡은 소파에 아이들 몇 명이 몰려 앉아 있었다.
세나가 문을 잡은 채 소리쳤다. “야, 나와.” 아이들이 서로 얼굴을 쳐다봤다. 잠시 후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쭈뼛거리며 골목으로 나온 아이들의 표정이 굳어있었다. 만화방 문이 닫히자, 안에서 들리던 텔레비전 소리가 멀어졌다. “니네가 일렀지?” 세나가 다그쳤다. “뭘.” “선생님한테. 우리 롤라장이랑 오빠들 얘기.” “우리가 언제.” “했잖아!”
한 아이가 고개를 숙였다. 옆에 있던 아이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물어보니까 말한 거지.” “그게 이른 거잖아.” 세나 뒤에 서 있던 아이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맞았는지 알아?” “우리 엄마한테까지 말했다며?” “진짜 아니라니까.” 좁은 골목에서 아이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민정이는 한동안 잠자코 있었다. 괜히 따라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리 끝내고 집에 가고 싶었다.
“조용히 좀 해!” 민정이가 소리를 질렀다. 아이들이 입을 다물었다. 민정이도 순간 멈칫했다. 세나도, 뒤에서 떠들던 아이들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불려 나온 아이들은 민정이의 눈치를 살폈다. “니네 뻥 치지마!” “…….” “반성문에 쓴 거 다 봤어. 내 이름도 썼잖아.” “……미안.” 아이들이 울먹거렸다.
그때 민정이 눈에 아이들의 발목이 들어왔다. 하얀 양말이었다. 깨끗한 운동화 위로 반듯하게 올라온 양말에 나이키 로고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옆에 선 아이들의 발목에도 비슷한 양말이 보였다. 나이키, 히포, 리복…. 새하얀 양말 위에 곱게 새겨진 자수. 학교에서는 운동화 위로 흰 양말을 끌어올려 로고가 보이게 신는 게 유행이었다. "우리 엄마가 사 왔어." "이 양말은 매일 빨아야 된다고 엄마가 잔소리야." 아이들은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민정이는 그럴 때면 슬쩍 자기 발목을 감췄다.
민정이 양말은 늘 검은색이었다. 오래 신어 발목이 늘어난 것도 있었다. 걸어 다니다 보면 슬금슬금 흘러내려 운동화 속으로 말려 들어갔다. 막내숙모는 흰 양말을 싫어했다. 금방 더러워지고 빨기도 힘들다며 짜증을 냈다. 그때는 세탁기에 넣어 돌리는 것만으로는 얼룩이 잘빠지지 않았다. 손으로 박박 비벼 빨고, 누렇게 때가 남으면 냄비에 삶아야 다시 하얘졌다. 그런데 아이들은 매일같이 새하얀 양말을 신고 왔다. 새것을 신은 날이면 로고가 잘 보이도록 발목을 더 끌어올리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운동화 위로 꼿꼿하게 올라온 그 하얀 양말이 싫었다. 발목 위에 박힌 로고까지 자기를 보고 빈정거리는 것 같았다. 민정이는 눈앞의 아이들을 다시 바라봤다. 오늘은 달랐다. 조금 전까지 따박따박 대꾸하던 아이들이 민정이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세나와 아이들은 어느새 민정이 뒤에 모여 있었다. 민정이는 다시 하얀 양말을 바라봤다. 그 양말을 벗겨버리고 싶었다. 맨발로 운동화를 신고 돌아가게 하고 싶었다. 다음에 저 양말을 꺼내 신을 때마다 오늘 일이 생각났으면 했다.
"야!" 민정이의 눈치를 살피던 아이들이 화들짝 놀랐다. "……왜." "벗어." 아이들이 눈을 크게 떴다. "뭐?" "양말 벗으라고." "뭐라고?" 민정이는 아이들을 빤히 바라보며 몰아세웠다. "이런 씨. 안 들려?" 아이들은 세나를 한번 보고, 민정이를 다시 바라봤다. "빨리 벗으라고!" 머뭇거리던 아이들이 허둥지둥 운동화를 벗었다. 운동화 위로 반듯하게 올라와 있던 하얀 양말이 뒤집히며 발끝에서 빠져나왔다.
민정이가 신발주머니를 내밀었다. "한쪽도. 여기다 넣어" 나머지 양말도 벗겨졌다. 아이들은 맨발을 감추듯 얼른 운동화에 발을 집어넣었다. 운동화 뒤축이 구겨졌다. 조금 전까지 하얗게 장식되었던 발목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이키도, 히포도, 리복도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 아이들이 맨발을 감추고 있었다. 민정이는 이상하게 속이 시원했다.
“꺼져.” 세나 뒤에 있던 아이가 소리쳤다. “한 번만 더 우리 얘기하고 다니면 죽을 줄 알아.” 기가 죽은 아이들이 운동화를 질질 끌며 골목을 빠져나갔다. 아이들의 모습이 골목 모퉁이로 사라지자, 세나의 무리 중 하나가 킥킥 웃었다. "야, 너 진짜 웃긴다." "뭐가." "돈이나 뺏지. 쓸데없는 양말은 왜 뺏냐?" 옆에 있던 아이도 웃었다. "그러게. 그걸 뭐 하게?" "내 맘이야. 그럼 앞으로 부르지마!"
민정이는 신발주머니를 벌려 안을 들여다봤다. 조금 전까지 눈에 거슬리던 양말들이 뒤엉켜 있었다. 그렇게 대단해 보이던 것도 가까이서 보니 별것 아니었다. 발바닥에는 거뭇한 때가 묻어 있었고, 뒤집힌 안쪽에는 보풀이 일어나 있었다. 누렇게 얼룩진 것도 있었다. "가자." 민정이는 가방을 여몄다. 아이들이 골목길을 나섰다.
어두운 골목 끝으로 나오자 갑자기 햇빛이 쏟아졌다. 민정이는 눈을 찡그렸다. 길가에 쓰레기통이 보였다. 몇 걸음 지나쳤다가 민정이가 멈춰 섰다. 신발주머니에서 휴지처럼 구겨진 하얀 양말들을 꺼냈다. 잠깐 내려다보다가 쓰레기통에 던졌다. 양말들이 쓰레기 사이로 떨어졌다.
“야, 빨리 와.” 앞서가던 아이들이 불렀다. 민정이는 뛰어가 아이들 틈에 섞였다. 길가에는 아카시아 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다. 바람이 불자 꽃대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하얀 꽃송이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야, 꿀이다!” 아이들이 떨어지는 꽃을 받으려고 팔짝팔짝 뛰었다. 한 아이가 손바닥에 떨어진 꽃을 집어 입에 물었다. “아카시아꿀 달다.” “니네 그거 농약먹는 거야.”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아, 지랄.” 깔깔 웃음이 터졌다.
“다음은 팔마재교 다리랑 해망굴 옆 방방타는 데야.” 민정이가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거길 또 가야 돼?” “가기로 했잖아.” “뭘 해야 되는데?” “째려만 보거나, 욕만 해주면 돼.” “아, 진짜!” 민정이가 떨어지는 아카시아꽃을 향해 손을 뻗었다. 꽃 하나가 손바닥을 스치고 땅으로 떨어졌다. “아카시아 껌 사주면 간다.” “아카시아꽃이나 먹어.” “미쳤냐.” 아이들이 다시 깔깔거렸다. 바람이 불 때마다 하얀 아카시아꽃이 후두둑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