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1주년 특집] 임시정부 이끈 ‘군산의 애국지사 4인’

군산출신 고판홍· 이인식· 최태경 지사 등 독립운동 헌신 서천출신이지만 군산무대서 해방전후 활동한 윤석구 선생 독립자금 모금‧ 조국 광복 위해 전재산 헌납‧ 무장투쟁 등

2026-08-13     정영욱 기자
자료출처=정책브리핑 www.korea.kr군산 3.1운동역사공원 입구에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출처=

오는 8월15일이면 광복 81주년.

세월이 흐르면서 광복투쟁과 독립운동 등 항일 애국지사들의 삶과 업적들이 아련한 옛이야기로 변하거나 친일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들도 있다.

우리 선열들의 목숨을 건 항일투쟁을 생각하면 작금의 현실로만 이해하거나 단순하게 설명할 수 없는 만큼 다시 한번 광복의 참의미와 항일투쟁에 앞장선 이들의 삶을 재조명해야 한다는 목소리다.

다행히 얼마 전부터 열리고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역사를 함께 조명하는 기획전(나라를 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이 눈길을 끌고 있다.

김구, 이동녕, 조소앙, 이시영… 등은 한국사를 공부해 본 이들이라면 여러 번 들어 봤음직한 상해 임시정부의 핵심요인들이다. 이 글에서 필자가 소개하고자 하는 인물들은 이들이 아니다. 목숨을 아끼지 않고 독립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했지만 그동안 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주역들이다.-

<편집자 주>

그중에서도 군산출신의 인물들을 얘기해 보고자 한다.

이들은 임시정부를 지원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했을 뿐 아니라 광복 후에도 인재육성 및 국가발전 등에 힘써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드는 주역이었다.

보통 군산출신이라는 의미는 군산에서 태생적인 것을 중심으로 접근하는 경우라 할 수 있지만 이곳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나 군산이란 공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독립지사도 있다.

후자의 대표적인 이가 윤석구 선생은 어떤 의미에선 군산의 독립지사로 추존해야 할 인물이다.

이유는 명확하다. 이런 점에서 윤석구 선생은 임정 요원으로 활동하면서도 군산멜볼딘(여)학교 교사 뿐만 아니라 해방 후 제헌의원으로 당선된 곳도 군산(지역구)이었다는 점에서 그를 범군산인으로 추앙해도 무방할 것 같다.

이에 군산에서 태어난 분들을 우선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 군산 태생의 임정출신 독립지사

◇ 최태경 선생= 이번 기획전에 소개된 한분은 대야출신인 최태경(1892~ 1958) 선생.

평소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있던 그는 3·1독립운동 후 상하이(上海)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조국 광복투쟁에 온힘을 모았다. 3·1독립운동 이후 상하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군산 지역을 중심으로 동지를 모아 지하조직을 만들었고 임시정부와 연락하며 군자금 모금과 송금 활동을 이어갔다.

1920년 11월 20일 임시정부의 지원을 목적으로 동지를 규합하여 지하조직을 결성하고 군산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1921년에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보낸 연락원 신정산이 대야면 지경리 천도교 교구를 찾았고, 이를 통해 임시정부의 활동 취지가 지역 독립운동가들에게 전달됐다.

또한, 1924년 2월 23일 군산특파위원장(群山特派委員長)으로 임명되어 1925년까지 각처에서 2,055원의 독립운동자금을 수합하여 임시정부에 보냈다. 특히 군산특파위원장 활동은 단순한 자금 전달이 아니라, 임시정부의 국내 지원망을 지역 단위에서 실제로 작동시킨 사례로 볼 수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 ‘전북의 이회영 선생’ 춘고 이인식 선생= 전국적인 유명인물들에 비해 가려진 면이 있지만 독립운동과 육영사업 등에 공헌한 애국지사가 있다.

노블리스 오블리주(사회 고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를 의미)를 실천한 이가 춘고 이인식(1901~ 1963) 선생이다.

사진-이인식선생 동상(출처-군산시)

그는 나라가 망하자 전 재산을 팔아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회영 선생과 같은 길을 걸어온 전북을 대표하는 애국지사다.
춘고는 국운이 암울한 때 만석 부호인 명문가에서 태어나 보성고보 재학시절 3.1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부모로부터 상속받은 논과 밭 24만6,474평을 매각해 상해임시정부에 8,000원(현재가치 200억원대 추산)을 헌납한 뒤 일본으로 유학(1923)을 떠났다. 그 대가로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건국공채(建國公債) 8매를 받았다
유학 중 항일운동을 하다가 발각돼 체포 위기를 맞자 1925년 중국으로 망명했다. 1926년 6.10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국내로 잠입, 군자금 조달 등에 힘을 쏟았고 망명지인 만주의 목단강 등지에선 교육사업을 통해 독립운동과 사상 고취에 앞장섰다.
해방과 함께 귀국한 그는 중앙정치의 좌우대립과 권력다툼에 염증을 내고 낙향과 함께 교육사업에 뛰어들었다. 지인이었던 당시 이요한 전북지사의 권유 등을 받아들여 후학 양성에 헌신했다.

그는 서수 일본인의 이엽사 농장 자리에 임피중학교를 설립해 교육가로서 일생을 바쳤다. 그의 제자들은 오영우 예비역 대장과 수많은 교육계 인사들이다.
이 공로로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됐고 1974년 10월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됐다.
◇ 고판홍 선생= 대개의 독립지사들이 그렇듯 후손조차 없는 애국지사가 고판홍(1895~?) 선생.

나포 출신인 그는 1920년 10월 전주 김성도(金成道)의 자택에서 조기선(趙基善)·유기홍(柳箕弘) 등과 함께 임실군내 부호들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여 중국 상해 임시정부로 송금하여 재정을 지원할 것과 군자금 모집 후 항일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했다.

이에 따라 이선경에게 군자금 모집하면서 휴대할 권총과 영수증 제작을 의뢰하는 한편, 같은해 11월 30일 임실군 청웅면 옥석리의 오태섭(吳泰燮)을 방문한 것을 시작으로 12월 3일까지 임실읍 신안리의 한규석, 청웅면 남산리의 김석기(金錫綺), 운암면 용운리의 이봉욱(李奉昱) 등을 방문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1921년 3월 2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이후 그에 대한 기록은 거의 멸실, 별다른 행적이 없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 지역에서 잊혀진 범군산인 고 윤석구 항일지사

상기의 애국지사들과 달리 고향은 아니지만 사실상 군산을 독무대로 독립운동과 인재육성 등은 물론 해방 후 대한민국의 초석이 된 이가 있다.

군산에서 제헌의원으로 선출된 애국지사 윤석구 선생(1892~1950).
그는 1892년 3월 15일 충청남도 서천군 화양면 완포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상경해 영국인 선교사가 세운 한영학교를 수석 졸업했고, 졸업 후 한영학교 교사로 재직하기도 했다.

1913년 중국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독립군으로 활동하던 그는 황포군관학교를 2기로 졸업했고, 김구의 명령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삼수군지국 서기로 임명돼 활동하기도 했다.

1922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내 자금책에 임명되면서 귀국해 군산멜볼딘여학교 교사로 부임했고, 이후 이곳에서 정착했다.

그는 교사로 근무하면서 꾸준히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송금했고, 임시정부 귀국 준비위원에 임명되어 군산부에 ‘영신환’이라는 한약방을 운영하며 8.15 광복을 맞이했다.

8.15 광복 후 우익 정치인으로 정계에 입문,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군산지부장,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군산지부장, 비상국민회 전라북도 대표의원 등으로 활동했다.
이후 이승만의 요청으로 1948년 8월부터 1949년 6월까지 초대 체신부장관을 지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가족들과 함께 군산을 떠나 고향 충남 서천군으로 피신했으며, 다시 군산으로 와서 반공강연을 했다.

그 뒤 조선인민군이 군산에 도착할 즈음 건너갈 배를 기다리다가 진주한 인민군에 체포됐다.

그는 전주형무소로 옮겨진 뒤 초대 체신부장관이었던 것이 밝혀져 1950년 9월 인천 상륙작전으로 후퇴하는 조선인민군에 의해 희생됐다.

그러면 상해임시정부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 대한민국 임시정부 탄생… 파리강화회의와 3,1운동 여파

/ 사진 출처= 군산시 

독립선언은 왜 1919년에 발표됐을까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직접적인 계기가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 그리고 파리강화회의였다.

1914년 7월 유럽에서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은 1918년 11월 11일 종결됐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많은 나라들이 두 패로 나뉘어 치른 전쟁이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연합국들이 전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1919년 1월부터 프랑스 파리에서 강화회의를 개최했다.

당시 현실로 보면 파리강화회의는 한국과 별다른 관련이 없었다. 한국은 추축국인 독일과 전쟁을 한 일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에 연관된 일도 없었기때문이다. 더욱이 일본은 승전한 연합국의 일원이었다.

그렇지만 독립운동가들은 파리강화회의에 기대를 갖게 됐고, 이를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기회로 만들고자 했다.

이후 상해에 모인 인사들은 ‘독립국’을 세우기 위한 준비작업에 돌입했다. 1919년 4월 10일 현순· 손정도· 신익희· 조소앙· 이동녕 등 29명이 대표가 돼 한 자리에 모였다.

이들이 가장 먼저 결정한 것은 임시의정원을 구성한 일이었다. 임시의정원은 현재 국회와 같은 것이다.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선 국호, 관제, 국무원 선출, 헌법제정 등이 논의됐다. 가장 먼저 결정된 것은 국호였다. 국호는 신석우가 ‘대한민국’으로 하자고 제의해 그대로 가결됐다. 이로써 한국역사상 처음으로 대한민국이란 나라 이름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우리 민족의 역사가 완전히 뒤바뀌게 됐다.

군주주권에서 국민주권으로, 전제군주제에서 민주공화제의 역사로 바뀐 것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는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 이래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군주가 국가의 주권을 행사하는 군주주권의 역사였고, 군주가 주권을 행사하는 전제군주제의 역사였다.

반만년 역사의 대부분이 군주주권과 전제군주제의 역사였던 셈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국민이 주권을 갖는 시대에 살고 있다.

국민이 주권을 갖는 새로운 역사를 연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