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동 연립 3부: 민정이의 세계 #19] 공주님 세나
자이언트 롤라장은 아이들의 세상이었다. 그 곳에서 서열을 배웠고, 편을 나눴고, 친구를 잃었다. 어떤 아이에게는 놀이터였고, 어떤 아이에게는 작은 전쟁터였다. 민정이와 세나는 거의 매일 거기서 함께 했다.
물 빠진 청바지와 청재킷을 교복처럼 비슷하게 입은 아이들 사이에서 세나는 유난히 눈에 띄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유명 상표로 차려입고, 손목에는 패션시계를 찼다. 워크맨 헤드폰을 끼고 있는 모습은 마치 영화 유콜잇러브에서 막 걸어 나온 소피 마르소 같았다. 처음에는 아이들도 신기하게 바라봤다.
하지만 잠시뿐이었다. "쟤 또 왔네." "돈 많은 애들끼리 놀지." "괜히 째부리려고 오는거야."
그래도 세나는 웃으며 먼저 다가갔다. 아이들은 못 본 척 등을 돌렸다.
세나와 있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민정이는 조금씩 말랭이 아이들과 멀어졌다. "민정이는 이제 부잣집 애랑만 논다." 아이들은 그렇게 믿기 시작했다.
그날도 둘은 롤라장을 돌고 있었다. 갑자기 음악이 끊겼다. 중앙 디제이 부스에서 오빠들이 키득거리며 쳐다보고 있었다. 통 넓은 청바지. 쇠사슬 같은 목걸이. 뒷주머니에 꽂은 커다란 도끼빗. 무스로 잔뜩 세운 머리에서는 스프레이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아이들은 그들을 무서워하면서도 은근히 동경했다.
"야." 그 중 한 오빠가 세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공주님 오셨네." 주변에서 웃음이 터졌다. “뭐하러 이런데 오냐?” "집에서 피아노나 쳐" 세나는 가만히 서 있었다. 울지도 못하고, 뭐라 말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민정이는 그 얼굴을 한눈에 알아봤다. 어디에도 끼지 못했던 아이의 얼굴.
순간 오래 묵어 있던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뭐하는 거야?” 재킷을 휙 벗어던졌다. 목소리만큼 심장이 크게 뛰었다. 모른 척하면 민정이와는 상관없을 일이었다. 그래도 앞으로 걸어 나가 세나 앞을 막아섰다. "왜 시비 거는데?"
오빠들이 낄낄 웃어댔다. "니가 왜 끼어들어?" "쪼그만 게."
민정이는 뒤를 힐끗 바라봤다. 매표소에는 롤라장 주인이 서 있었다.
"롤러 타러 온 사람을 왜 못 타게 해요?" "여기서 사람 때릴 거예요?" 일부러 더 크게 소리를 지르자 주인이 안을 들여다보았다.
오빠들은 슬금슬금 서로의 눈치를 봤다. "에이, 됐다." "가자." 한 오빠가 어깨를 으쓱하며 빈정거렸다. "그래. 롤라나 열심히 타." 다른 오빠들과 키득거리며 디제이 부스로 돌아갔다.
민정이는 그제야 주먹을 폈다. 손바닥에는 손톱자국이 깊게 패여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세나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안 무서웠어?"
민정이는 잠시 걷다가 웃었다. "뭐... 그냥"
세나는 걸음을 멈추며 미소를 지었다. "너는 하나도 안 무서웠을 거 같애"
민정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심장은 아직도 쿵쾅거리고 있었다. 혹시 오빠들이 뒤따라오지 않을까. 골목이 나올 때마다 자꾸만 뒤를 돌아봤다.
세나는 깔깔거리며 앞서 걸어갔다. 민정이는 그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 천천히 뒤를 따랐다. 그날 이후 세나는 더 이상 민정이 뒤에 숨지 않았다. 대신 롤러장에 갈 때마다 디제이 부스 앞에 서 있곤 했다. 화려한 조명 아래, 음악에 맞춰 웃고 떠드는 오빠들. 세나는 처음 민정이를 바라보던 것과 같은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