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동 연립 3부: 민정이의 세계 #18] 원래 그런 사람

2026-07-10     김규아

컴퓨터 화면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익명게시판에는 지역신문 기사가 캡처되어 올라와 있었다. 「인사와 행정을 좌지우지하는 직원, 청렴도 우려」. 댓글은 이미 수십 개가 달려 있었다. 손가락으로 천천히 화면을 내리던 민정이의 시선이 한 문장에서 멈췄다. ‘이 사람 사는 게 원래 그렇죠’

관자놀이에 흰머리가 희끗희끗 내려앉은 민정이는 그 문장을 오래 바라보았다. 무엇이 원래라는 걸까. 어떻게 살았다는 거지. 그 뒤부터 민정이를 설명하는 말은 하나로 줄어들었다. '원래 그런 사람.' 그 말 하나면 충분했다. 몇 년이 지나서도 사람들은 기억했다. “그 부서에서 잘못했다고 누가 뭐라고 하던데? 무슨 일이었어?” 구체적인 이야기는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이유는 사라지고, 말만 남았다. 원래 그런 사람.

언제부터 그런 사람이 되어갔던가…. 이혼 후 고향으로 돌아와 처음 맞은 추석이었다. 외가 친척들과 모여 전을 부치고 있었다. 사촌 올케가 과일을 내려놓으며 민정이 옆에 앉았다. "언니."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레 말했다. "나는 언니가 회사 나가는 것만도 존경스러워요." 민정이가 웃었다. "왜?" "저 같으면… 숨도 못 쉬고 살 것 같아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어떻게 버텨요?" 올케의 목소리가 떨렸다. 민정이는 배 한 조각을 들었다. "...그냥” 잠시 씹다가 맥없이 웃었다. “살아야 되니까" 목이 메어 배가 잘 넘어가질 않았다. '그냥'이라는 두 글자 안에 들어 있는 시간은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다.

그 무렵 민정이는 하루도 빠짐없이 같은 기도를 했다. 아침에 일어날 때도, 잠들기 전에도. ‘하나님. 부디 큰애가 스무 살 될 때까지만 버틸 수 있게 해주세요’ 어떤 날은 기도가 달라졌다. ‘아니… 둘째가 스무 살 될 때까지만요’ 그러다 또 바뀌었다. ‘아이들이 제힘으로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만…’ 그 기도는, 그 눈물은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었다. 보여준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라고 믿어본 적도 없었다.

감정을 들여다보면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집에 들어서면 아이들의 맑은 눈동자가 먼저 보였다. 그 눈을 마주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 그럴수록 민정이는 일을 붙잡았다. 보고서 하나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작은 행사 하나도 밤을 새워 준비했다. 퇴근해서도 자료를 펼쳤다. 일하는 동안만큼은 다른 생각이 비집고 들어오지 못했다.

사람들은 다른 것을 보았다. "욕심이 많네." "혼자 다 하려고 그래." 민정이는 변명하지 않았다. 예전에도 그랬다. 인사 담당일 때 근무성적을 조작해 승진했다고 누군가 말하고 다녔다. 문서 한 장만 찾아봐도 근무성적과 크게 상관없는 근속승진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진위를 확인하지 않았다. 장지동 연립에서도 그랬다. 사람들은 사실보다 이야기를 먼저 믿었다. 주변에 기댈 곳 하나 없는 이에 대해서는 더욱 더.

기사가 나기 얼마 전에도 그랬다. 위에서 홍보 방식과 홍보비 집행 방식을 전면 개편하라고 닥달했다. 관행을 바꾸고, 미움을 사는 일이었다. 옆과 뒤를 보지 못했던 민정이는 그대로 따랐다. 지시받은 대로 기준을 만들고 공문을 작성했다. 며칠 뒤부터 들려오는 흉흉한 얘기들. "대체 무슨 욕심이 있어서 저러는데?" "갑질하는 거야?" "튀려고 지멋대로 하네" ”윗사람 빽믿고 좌지우지 하는고만“

그냥 흘러갈 말인 줄 알았다. 일을 지시한 사람과 동료들은 진실을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직원 하나가 말을 흘리기 시작했다. "팀장님이 너무 강하게 밀어붙여요" 그 말은 사람들 입을 거치며 조금씩 달라졌다. "민정 씨 때문에 힘들었대" "갑질했다더라" “죽고 싶었다던데” 며칠 뒤 신문이 나왔다. 익명의 관계자. 내부 직원. 독단적인 업무 추진. 그 기사에는 상사와 동료는 사라지고, 민정이만 남아 있었다. 그 모든 끝에 남은 것은 오늘의 익명게시판이었다. ‘이 사람 사는 게 원래 그렇죠’ 민정이는 다시 그 문장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인생이 그 한 줄로 정리된 것 같았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엄마는 말했다. "너는 집안의 기둥이니까 견뎌야 해" “항상 웃어” 숙모는 울던 민정이를 보고 피식 웃었다. "그 정도 가지고?" 친척들은 말했다. "애가 왜 저렇게 유난이래." 그날 이후 민정이는 하나씩 배웠다. 울면 안 되는 것. 기대면 안 되는 것. 약해 보이면 안 되는 것. 이상하게도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을 보면 먼저 나서게 되었다. 대신 말해주고, 대신 맞서주고, 대신 짊어지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사람들은 그것을 강하다고 말했다.

밤이 깊었다. 아이들이 잠든 뒤에도 민정이는 거실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불을 끄고도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천천히 두 손을 모았다. 입술이 작게 움직였다. ‘하나님. 아이들이 저 없이도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만…. 그때까지만, 그때까지만…. 버틸 수 있게 해주세요’ 조용한 집 안에서 초침 소리만 또박또박 시간을 밀어냈다.

다음 날도 민정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출근했다. 웃으며 인사를 했다. 동료가 커피를 건네며 말했다. "민정 씨는 참 쎄." 민정이는 웃으며 커피를 받았다. "그게 머 별건가" 정말 별거 아닌 일인 것처럼.

퇴근길. 민정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파란 하늘 위로 노을이 번지고 있었다. 바알개진 허공에 검은 점들이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 하나의 선이 되었다. 살기 위해 찾아왔다가 떠나가는 가창오리떼들. 거센 바람에 흩어졌다가 이내 무리를 이루며 날아갔다. 민정이는 오래도록 그 날갯짓을 바라보았다. 흩어질 수는 있어도, 무너질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강하다고 말했다. 민정이에게 그것은 살아남는 방법일 뿐이었다. 문득 민정이는, 자신이 '원래 그런 사람'이 되어가기 시작했던 시절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