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동 연립 3부: 민정이의 세계 #9] 정글의 법칙

2026-05-08     김규아

언제부터인가 장지동 연립에 발을 들이는 순간 심장이 먼저 조여들었다. 누굴 마주칠지 몰라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고, 집 안으로 들어서면 더 견디기 힘들었다. 거실 공기는 늘 가시가 돋아 있었다. 말 한마디, 눈길 하나에 가슴이 찔렸다. 민정이는 안방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가 벽에 등을 붙이고 무릎을 끌어안았다. 방 안에 아무도 없는데도 숨을 죽였다.

“저런 것도 못 배웠어.”, “오냐오냐 키웠으니까 저 모양이지.” 숙모는 민정이에게 들으랍시고 혼잣말을 했다. 등 뒤로 꽂히는 이웃들의 동조들. 그들에게 민정이는 투명 인간이었다. 입술을 깨물자 비릿한 피 맛이 번졌다. 몇몇 어른들의 안쓰러운 시선도 숙모의 매서운 눈초리와 마주치면 감추기 급급했다. 어느 누구도 막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그날 밤도 집을 나왔다. 나운동 공사판. 덜 지어진 건물들이 뼈대만 드러낸 채 서 있었다. 젖은 흙 냄새가 올라왔다. 구석에 아이들이 몰려있었다. 말랭이에서 어울리던 친구들과 눈인사를 나눴다.

“야, 너도 해볼래?” 다른 무리의 아이들이 앞을 가로막으며 투명한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안쪽이 뿌옇게 젖어 있었다. 흙과 검은 때가 손톱 사이에 박힌 아이의 손. 그 순간, 집이 떠올랐다. 불 꺼진 안방, 숨 막히는 침묵, 아무도 반기지 않는 집.

민정이는 봉지를 받아들었다. 차갑고 축축한 감촉, 곧 밀려드는 역한 화학 냄새. 속이 뒤집혔다. 아이들의 눈이 보였다. 초점이 풀린 눈동자…. 본능적으로 알았다. 저 비닐 안으로 고개를 들이미는 순간,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민정이는 봉지를 떨어뜨렸다.

“할 거야, 말 거야.” 주변이 싸늘하게 식었다. 뒤에서 비웃음이 터졌다. 좁혀오는 발걸음. 아이들이 에워쌌다. “이게!” 주먹이 날아들려는 찰나, 그림자 하나가 앞을 막아섰다. 말랭이에서 보던 아이였다. 잠깐, 눈이 마주쳤다. 민정이는 돌아섰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퍽, 퍽퍽. 등 뒤에서 둔탁한 타격음과 비명이 들려왔지만 멈추지 않았다.

다음 날, 그 아이가 흠씬 맞고 돈까지 털렸다는 말을 들었다. 부끄러움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약해서 도망쳤다.’ 자기혐오가 올라왔다. 어릴 적 골목에서 맞고 있을 때, 구해주었던 선화 언니의 말이 떠올랐다. “세상은 가만히 있으면 더 달려들어. 착하기만 하면, 자신은 물론 아무도 지킬 수 없어.”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왜 친척들과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렸는지. 민정이가 만만해져서였다. 승냥이들은 상대가 약해 보이는 순간, 떼로 달려들어 물어뜯는다. 타인의 약점을 짓밟고 서서, 그 위에서 제 자리를 확인하는 것, 그것이 그들이 사는 방식이었다.

민정이는 주먹을 꽉 쥐었다. 욕을 하면 더 모진 욕으로 돌려주고, 때리면 그 이상으로 갚아주겠다고 다짐했다. ‘강해 보여야 살아남는다.’ 그것이 정글에 떨어진 아이가 절실히 배운 삶의 방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