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동 연립 3부: 민정이의 세계 #2] 그 해 겨울, 장지동
그해 겨울, 장지동 연립의 공기는 이상하리만치 따뜻했다. 늘 북적이던 손님들의 발길이 끊긴 집 안은 오히려 조용했고, 그 낯선 정적은 열세 살 민정이에게 잠시 숨을 돌릴 틈을 주었다. 외갓집 식구들은 전보다 자주 민정이를 불렀고, 군것질거리나 용돈을 쥐여주었다.
칠 남매 중 넷째였던 엄마의 형제자매들은 민정이를 유난히 아꼈다. 엄마의 동생인 다섯째 막내 삼촌은 여자친구를 처음 만나는 자리에도 민정이를 데리고 나갔고, 서울에 사는 둘째 삼촌은 결혼을 앞둔 예비 숙모에게 “나한테 딸이 하나 있는데, 잘 돌볼 수 있겠느냐.”며 아이를 앞날의 조건처럼 내세웠다. 외갓집 식구들과 있으면 민정이가 항상 중심이었다. 아이는 그 자리가 당연한 줄 알았다.
어느 날, 산골 백토개에서 엄마의 사촌 언니 ‘에미꼬’ 이모가 찾아왔다. 이모의 품에는 인절미처럼 말랑말랑하고 꼬물거리는 하얀 강아지 한 마리가 안겨 있었다. 민정이가 책가방에서 꺼낸 우유를 연신 부어주자 엄마가 무심하게 한마디 던졌다. “짜구 난다. 그만 줘라.”
평소라면 허락하지 않았을 엄마였지만, 어쩐 일인지 에미꼬 이모는 강아지를 두고 떠났다. 민정이는 녀석에게 ‘흰둥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흰둥이의 온기 덕분에 민정이는 사람들이 빠져나간 집안의 한산함을 채 느끼지 못했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엄마의 변화였다. 언제부터인가 엄마는 생전 처음 보는 천진한 얼굴로 골목 어귀에서 학교가 끝나고 돌아오는 민정이를 기다리곤 했다.
“민정아, 달리기 시합할래? 요이, 땅 하면 달리는 거다!” 그것은 민정이가 기억하는 엄마와의 처음이자 마지막 놀이였다. 조금만 잘못해도 혼을 내던 엄마가 그때만큼은 어린아이처럼 활짝 웃었다. 솜사탕처럼 날리는 하얀 눈을 맞으며 엄마와 흰둥이와 함께 뛰노는 날들이 그렇게 이어질 줄 알았다.
민정이는 즐거움에 취해 미처 보지 못했지만, 엄마의 눈길은 늘 어딘가 다른 곳을 응시하며 젖어 있었다. 얼마 뒤 엄마가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잦아졌다. 민정이는 한 번씩 이웃과 친척에 맡겨지게 되었지만, 남의 집에 놀러가는 게 마냥 즐거웠다.
몇 달 뒤, 새로 결혼한 막내 삼촌과 숙모가 민정이네 집의 빈방에 들어왔다. 서울 숙모는 처음엔 민정이를 살갑게 대했다. 하지만 신혼의 단꿈 속에 민정이는 서서히 눈치 없는 식객이 되어갔다. “남편이 술을 먹으면 누나(엄마)와 민정이를 찾으며 우는 게 싫다”는 숙모의 서늘한 뒷담화가 민정이의 가슴을 할퀴었다. 퇴근한 삼촌이 민정이를 먼저 부를 때면 숙모의 눈빛은 샐쭉해졌고, 아이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 날 선 지적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마당을 자유롭게 뛰놀던 흰둥이의 목에 굵은 줄이 감기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줄에 묶인 흰둥이는 더 이상 민정이와 함께 달리지 못했다. 아이의 세상에서도 뛰노는 일은 사라졌다. 대문을 들어설 때마다 마주치는 흰둥이를 민정이는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왠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마주치는 것 같았고, 무언가 묵지근한 덩어리가 목을 눌러댔다.
흰둥이의 밥그릇에 차가운 눈이 그득히 쌓이거나 물그릇에 얼음이 서려있을 때면 눈가가 시려웠다. 흰둥이의 물그릇이 꽁꽁 얼어붙어있던 날, 민정이는 오래도록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지만, 차마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겨울은 그렇게 오래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