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154] 사비 백제의 생생한 핵심 공간 ‘금강’
불주사…백제 침류왕때 불교전래자 마라난타 창건(?) 사찰 백제의 망국의 한 오성산의 ‘오성인묘’ …백제인들의 충절 백제의 주요세력군의 주무대 웅포 함라산의 입점리 고분군
금강과 그 주변지역은 백제와 떼려야 뗄 수 없다.
금강은 선사 유적과 고조선의 설화, 고대 백제 등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문화유산들을 간직하고 있다.
금강은 해외교역의 통로였을 뿐 아니라 고려와 조선의 조운을 담당했던 핵심 공간이었다.
이런 점에서 그 주변에는 산사와 역사시대의 수많은 유적들로 가득하다.
특히 나포와 웅포 등의 금강권 지역이 역사를 오롯이 대변하고 있는 그 주인공들이다.
이곳은 백제의 수도와 가까운 고토인 만큼 수많은 백제와 관련된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나포와 연접한 익산시 웅포에는 입점리 고분군이 다수 존재할 정도로 과거 백제의 위용이 남아 있을 뿐 아니라 백제 불교전래지의 사찰(?) 등이 남아 있다.
여기에다 백제 망국의 한이 있는 이웃 성산면소재 오성인묘의 전설 등이 존재하는 것은 우연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봐야할 듯 싶다.
# 나포 취성산 불주사… 불교 조계종 제17교구 소속 사찰
불주사는 백제와 신라를 아우르는 역사적 고찰로 향토문화유산이자 불교신앙의 중심지였다.
백제에 불교가 처음 전해진 때는 침류왕 원년(384).
인도 마라난타가 동진(東晉)에서 오자 왕이 그를 맞이하여 경배했다. 이보다 2개월 전에 백제는 동진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는데, 마라난타는 백제로 오는 사신과 함께 왔을 것으로 보여진다.
나포의 불주사는 인도 승려 마라난타가 영광 법성포를 거쳐 한성백제로 향하던 길에 창건했다고 전해져 있고 의자왕 때 중창돼 통일신라 때 크게 번창했던 고찰이다.
이곳의 대웅전은 불주사의 본당이다. 이곳은 1985년 8월 16일 전라북도의 유형문화재 제117호로 지정된 바 있다.
1982년 삼성각 신축 및 배수로 공사 중 통일신라 때 금동여래입상이 출토돼 그 역사의 일부가 드러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의 역사성을 알린 것은 1911년 김종환이 쓴 대웅전 중수기에 나와 있다. ‘이 사찰은 백제에 불교를 처음 전한 인도 고승 마라난타가 창건했고 의자왕 때 삼창(三創)했다’고 적고 있으나 자세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후에 대웅전을 보수하던 중 ‘崇禎(명나라 숭정제) 3年 2月’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막새 기와(지붕에 기와를 입혀 내려온 끝을 막음하는 건축재)가 발견돼 1630년(인조 8년) 훨씬 이전부터 존재한 사찰임이 확인됐을 뿐이다.
# 백제의 왕족급 세력(?)집단의 입점리 고분군
백제의 대표적인 고분군이 위치한 웅포 입점리 고분군은 나포와 지리적으로 거의 동일한 위치에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익산 웅포 입점리 고분군의 존재는 백제역사의 물줄기 속 큰 물음표로 인식돼 왔었다.
과연 무덤 속 주인공은 누구이며, 그들은 왜 그곳에서 1500년이라는 긴 시간을 잠들어 있었을까.
이 고분군은 우리의 정사격인 삼국사기에도 거론되지 않았던 그야말로 공백의 역사 속에 있는 페이지였다.
1986년 새터 마을에 사는 한 고등학생이 마을 뒷산에서 칡을 캐다가 금동제 모자의 발견으로 알려지게 된 입점리 고분.
이 고분은 해발 240m의 함라산에서 금강변을 따라 뻗어 내린 산 능선에 자리잡고 있다.
당시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바로 그 해 8기의 고분을 조사했고, 2년 뒤에는 사적 제347호로 지정된 이 지역에 대한 정비를 위해 주변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13기의 고분을 추가로 발견해 총 21기의 고분이 확인됐다. 이 중 백제고분만 19기였다.백제고분 19기는 구덩식돌덧널무덤 11기, 앞트기식돌덧널무덤 1기, 굴식돌방무덤 7기로 분류된다.
무덤 축조시기는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인 것으로 추정된다.입점리고분이 공주시대 고분과 똑같은 축조양식을 갖춘 것은 이 지역이 백제 중기의 정치와 문화적 중심지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을 것은 분명하다.
이곳은 백제 중기부터 후기의 수도였던 공주나 부여와 떨어져 있지만 완전한 형태의 백제 중기시대 고분과 금동제 장신구류와 금동제 신발 등 당시 지배층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들이 발견됨으로써 이 고분군이 5세기 때 이 지역의 귀족층들의 무덤 가능성이 높다고 보여진다.
고분군 대부분은 외형의 봉토 밑지름 약 15m, 높이 약 2m이다. 발굴조사 결과 풍화된 암반을 경사면에서 ‘ㄴ’자 형태로 따내고 석실을 쌓아 만들었다. 네 벽은 자연 산돌을 사용, 편평한 면을 고르게 맞추어 쌓아 올리면서 80∼90㎝ 높이까지는 수직으로, 그 위로는 네 벽을 맞죄어 이른바 궁륭형의 천장을 만들어 천장돌로 30∼40㎝ 크기의 뚜껑돌 4개로 덮었다.
고분 입구에서 무덤방으로 들어가는 널 길은 동벽에 붙여서 남쪽으로 마련되고 널 길 입구 밖으로 너비 13∼15㎝의 배수로가 340㎝까지 뻗쳐 있다. 널방의 크기는 268×240×240㎝이며, 널길은 158×85×116㎝이다.
유해의 머리 방향은 무녕왕릉과 같은 남쪽을 향하고 있다. 금동관과 금동관모는 남쪽에, 금동신은 북벽쪽에 놓여 있다. 발굴조사 당시 출토된 유물로서는 금동제장신구류· 금동제신발· 말재갈· 철제발걸이· 토기· 중국산청자항아리· 화살통장식· 금귀걸이· 유리구슬 등이 있다.
입점리 일대에서 발견된 수혈식 석곽분은 백제초기의 무덤과 구조형식이 대체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판명됐다. 이는 백제중기 시절 수도를 공주로 옮기는 과정서 일부 지배집단이 공주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익산지역으로 이동했을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당시 이 유물발굴관계자는 “입점리는 위치상으로 볼 때 당시 부여와 공주로 이르는 물길 입구이며 남쪽으로는 익산과 김제를 통치할 수 있는 정치적 요충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무덤의 구조가 공주 송산리 5호분과 같은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5세기 때 왕족 중 한사람이 이 일대를 맡아 통치했을 것이 유력하다”라고 말했다.
특히 이곳에 나온 금동관모의 뒤편의 휘어진 긴 나팔 모양의 장식은 일본 규슈의 에타후나야마 고분의 출토유물과 동일한 것으로 당시 백제의 뛰어난 금속공예의 기술이 일본에 전파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당시 출토를 발표했던 언론과 입점리 고분전시관 등의 자료를 참조했다.
# 성산 오성인묘 vs 서천군의 천방사 전설… 唐 침략 모티브 유사
나포와 인접한 성산면 금강 변에 위치한 오성산(五聖山)은 백제 의자왕 20년(660) 당나라군과 백제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을 가능성이 있는 공간이다.
오성산은 다섯 개 봉우리로 이뤄졌으며 산정에는 사비성(부여)을 향해 진격하는 당나라장수 소정방에 항거하다 죽임을 당한 다섯 노인이 묻혀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름하여 ‘오(五)성인 묘’다. 물론 이곳의 오성인은 설화 속 인물들이다.
여지도서(輿地圖書: 1757~1765) 임피현 고적조에 따르면 당나라 소정방은 오성산에 병(兵)을 주둔하고 짙은 안개로 길을 잃고 헤매다가 다섯 노인을 만난다. 소정방이 그들에게 사비(부여)로 가는 길을 묻자 다섯 노인은 ‘너희들이 우리나라를 치러왔는데 어찌 길을 가르쳐 줄 것이냐’며 항거했다.
이에 격분한 소정방은 노인들을 참살하기에 이르고, 그럼에도 후일 물러갈 때 이들의 충절을 기려 오성산 위에 장사지냈다고 기록했다.
오성산(227m) 정상 부근에서 발견된 백제 양식의 테머리식 산성과 칼끝처럼 뾰쪽한 도진봉에 남아 있는 봉화대 흔적은 이 지역이 백제 시대 금강 하구를 감시하던 군사적 요새였음을 암시한다.
이곳 산정에서는 나라를 위해 의연히 목숨을 바친 오성인의 호국 충절 정신을 기리는 오성문화제전(오성인 추모행사)이 매년 가을에 열린다.
지역의 으뜸 명승지로 백제인의 충혼이 서린 오성산, 해질녘 정상에서 바라보는 노을은 더할 나위 없는 절경으로 예로부터 ‘임피팔경’의 하나로 꼽혀왔다.
한편 오성인 전설과 결이 다소 다른 전설도 존재하지만 당나라의 침략과 관련 모티브는 유사하다.
이웃 충남 서천군 문산면 신농리 천방산(千房山)에 있었던 천방사(千房寺)가 당나라 소정방에 의하여 창건된 일화에 대한 전설이지만 협력해서 만들어진 내용이다.
백제에 침입한 당나라의 장군 소정방은 백제의 수도 사비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길목인 천방산 일대로 쳐들어왔다. 사비성으로 가기 위하여서는 금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안개가 짙어서 사방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고, 풍랑까지 일어 곤란하였다.
소정방이 마침 지나가는 승려를 만나 빠져나갈 방도를 묻자, 승려는 천방산에 천 간의 절(1,000개의 방이 있는 절)을 짓고 천일기도를 하면 어려움이 다 가라앉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소정방은 천방산에서의 어려움을 해결한 뒤 사비성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고 한다는 전설이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등 참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