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153] ‘금강’ 무대로 역사 속 전쟁들… ‘백강전투’ ‘진포대첩’

백제 한이 서린 공간… 동북아 최초의 국제戰 ‘백강전투’ 주무대 세계사 첫 함포해전 ‘진포대첩’ … 금강서 왜선 500척 火攻 격파 해병대 창설 후 첫 참전한 ‘군산·장항·이리지구 전투’

2025-10-29     정영욱 기자
나포와 서천군을 끼고 있는 금강. / 사진=투군

‘7세기 중후반의 백제(부흥군)· 왜 연합군 대 나당연합군(신라와 당나라) 한 동북아시아 최초의 전쟁이 벌어진 곳. 14세기 후반의 ‘세계사 최고(最古)의 함포전’ 진포대첩. 해병대 창설 첫 한국전쟁의 군산· 장항· 이리지구.’

이들 전쟁의 공통공간은 ‘금강’.

이곳을 무대로 전쟁들은 우연의 산물일까, 아니면 필연적이었을까.

고구려의 강력한 남하정책으로 천도한 백제의 도읍지인 공주와 부여는 백제가 중국과 왜 등과 교류할 수 있는 해로와 곡창지대 등과 맞물려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와 신라의 위협에서 벗어난 안전지대이자, 고대의 국부의 핵심 중 하나인 식량을 안전하게 공급받을 수 있는 광활한 평야지대라는 두 요소를 충족시킬 수 있는 곳이 당시의 백강이자 오늘날의 금강이었다.

이곳은 국가의 흥망성쇠와 직결되는 곳이어서 다른 국가나 세력들의 침략 루트와 최고의 곳간이란 점에서 이곳을 차지하기 위한 국가 간 다툼은 불가피했다.

이런 공간적인 특수성 때문에 수많은 신화와 전쟁, 해외와의 교류 등이 선사와 역사시대 기간 내내 이어져왔다.

# 동북아 최초의 국제전 ‘백강전투’ … 오늘날의 한국‧ 일본‧ 중국 3국 참전

나당연합군의 공격과 잦은 전쟁 등으로 백제는 660년 7월 중순 처참히 무너졌다.

하지만 700년 역사의 백제는 순순히 물러나지 않고 부흥운동을 3년간이나 펼칠 정도로 민족적인 자존심을 지켰는데 부흥세력 간 내분으로 희망의 불씨를 아쉽게 살리지 못했다.

백제 부흥군들은 왜에 군사적인 지원을 요청, 대규모 파병과 함께 고대사에서 보기 드문 동북아 최대 전쟁이 발발했다.

그 전쟁의 주무대가 금강이었다.

663년 8월 중순.

백제 부흥군의 본거지로 나당연합군이 진군하자, 부흥군은 왜의 원군 4만여 명과 함께 백강 어귀에서 전투를 벌였다. 4차례에 걸친 치열한 전투에서 백제 부흥군은 크게 패했다. 왜선 400척이 불에 타 그 연기와 불꽃이 하늘과 바다를 붉게 물들일 정도였다는 게 당시 상황을 기록한 중국과 일본의 역사서에 생생하게 담겨져 있다.

그 여파로 얼마 뒤 부흥군의 중심 거점이었던 주류성(周留城)이 나당연합군에게 함락됐다. 부여풍은 고구려로 망명하였으며, 왜군은 한반도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백제 부흥운동의 또 다른 주축이었던 흑치상지(黑齒常之)와 사타상여(沙吒相如)는 당에 투항했고 부흥군 세력 중 많은 지도층 등은 왜로 떠나 고대 일본발전에 밑거름 역할을 했다.

백강전투는 동아시아의 세력 판도가 새롭게 바뀌며 일어났던 전쟁이다. 이 여파로 백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역설적으로 왜국은 참패로 인해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는 전기를 마련하게 됐다.

# 세계해전사 명장면 ‘진포대첩’

진포대첩비. / 사진= 군산시 제공

고려 건국 이후 서해안 항로는 나라의 생명줄과 같은 역할을 했다. 즉, 고려와 조선왕조의 수도인 개경과 한양으로 국가의 세금과 주요물자수송을 위해 연안항로를 이용하면서 서해안 항로는 이후 1000년 이상 우리 역사에서 국가운영을 위한 식량보고 역할을 해왔다.

이때 쌀 생산의 중심지역인 호남평야의 출구로서 부각된 곳이 금강 어귀인 군산지역이었다. 군산지역은 고려시대에는 진포로 불렸는데 고려 초 성종이 호족들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남방에 12조창을 두었다.

이때 전라북도권의 중심 거점으로 임피지역의 진성창을 관할한 진포를 조종포(朝宗浦)라 하고 1천석을 실을 수 있는 대형선인 초마선(哨馬船) 6척을 배정했다. 주목되는 것은 고려 성종이 이름을 ‘조종포(朝宗浦)’라 한 것이다. 이는 ‘조정의 으뜸’이란 뜻으로 그 중요성을 반영한 명칭으로 생각된다.

나포의 들녘. / 사진=투군

그런데 이곳이 고려 후기 국력이 쇠해 방비가 약해지자 왜구들이 남해를 거쳐 서해의 군산지역까지 진출하여 집중적인 약탈을 자행했다. 고려 우왕 6년(1380) 8월 진포에 왜구들이 500척에 이르는 대선단을 거느리고 곡식을 노략질하기 위해 군산 방면으로 침입해 왔다. 이때 군사의 규모는 약 1만명 이상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왜구는 약탈한 곡식들을 함선에 적재할 때 흔들리지 않도록 큰 밧줄로 배들을 서로 잡아매고, 일부 병력을 남겨둔 채 육지를 돌아다니며 곡식을 비롯한 재물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왜구의 대함대가 침입했다는 급보를 받은 고려 정부는 심덕부, 나세, 최무선 장군의 지휘 아래 화약무기를 적재한 신형함선 100척을 출동시켜 왜선을 소탕하도록 했다.

고려 함선들은 진포에 이르러 밧줄로 서로 묶여있는 적함을 향해 일제히 화전과 화통, 화포를 사용해 퍼부었다. 화공을 통해 고려 함대는 적선 500척을 모조리 파괴한 뒤 왜구들에게 붙잡혀 있던 330명의 고려 백성을 구출했다.
진포대첩은 1350년 왜구들이 고려에 본격적으로 침입하기 시작한 이래 30년 만에 고려 수군이 거둔 최초의 승리이며, 또 대왜구 투쟁에서 고려가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이기도 하였다.

최무선이 개발한 화포와 화약무기가 진포대첩에서 처음 실전에 적용됐고 바다로 진출한 왜구에 결정타를 가했다. 진포대첩은 함포가 전투의 핵심 무기로 등장한 세계 최초의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이 승전은 군산지역의 해양력과 자주정신의 상징으로, 진포해양테마공원 등에서 관련 유물과 전시를 통해 기념되고 있다.

이곳에서 퇴로가 차단된 왜구는 한 달 뒤인 같은 해 9월 금산과 상주 등 육로를 거쳐 남원 운봉지역까지 들어왔다. 이성계는 이곳에서 고려의 큰 우환인 왜구를 토벌했는데 이를 황산대첩이라 불린다. 이곳에서의 대승은 민심과 주도권을 얻어 조선왕조의 개창 동력으로 삼았을 뿐 아니라 사실상 왜구의 침탈을 종식시켰다 할 수 있다.

# 월명공원내에 위치한 해병대 군산·장항·이리지구 전적비

해병대군산장항이리전적비. / 사진= 군산시 제공

한국전쟁을 맞아 조국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해병대가 그 예하 고길훈 부대(대대규모)를 군산, 장항, 이리지구 전투에 최초 출전시켜 서해안의 젖줄인 금강을 지키기 위한 혈전에서 적을 격파한 최초의 전투.

이 전투의 주된 내용은 이렇다.

1950년 7월 초 천안을 점령한 북괴군 제6사단 13연대는 서해안을 우회, 파죽지세로 호남지역으로 진출했다. 해병대 고길훈 부대는 동년 7월 13일 해군함정 FS(재천호) 편으로 제주기지를 출항, 7월 16일 군산에 상륙했다.

금강을 건너 장항 북방 4km 지점에서 대대 규모의 적에게 기습적인 공격을 감행, 북한의 금강선 진출을 저지 격파했다.

고길훈 부대는 7월 20일까지 금강을 방패 삼아 군산시를 방어, 격렬한 시가전을 전개했다.

해군 군사경비부 육전대와 함께 LST-810함에 정부미 1만3,000가마와 중요한 정부물자반출작전을 수행한 후 고길훈 부대의 주력은 해상으로 철수했다. 이리 방면으로 출동한 해병 제3중대는 육군독립대대, 경찰과 더불어 밀려드는 적과 결사적인 항전을 통해 적의 남하를 효과적으로 막아냈다.

이 전투에서 해병대는 적사살 62명, 사상 311명, 포로 5명의 대전과를 올렸고, 전사 36명, 부상 31명, 해방 불명 8명의 손실에 그쳤다.

월명공원에는 이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해병대 전적비가 건립돼 있다.